소설리스트

폐황후 마리아-73화 (73/120)

73화

야심한 밤, 모니카는 황궁 내의 신전으로 향했다. 대예배당의 뒤쪽으로 향하는 작은 입구가 있는 곳을 통하면 역대 라스토니아의 황제의 의관과 애장품 그리고 황제의 인장이 보관되어 있었다. 이 성스러운 밀실의 열쇠는 딱 세 명만 가질 권한이 있었다. 황제, 선황후, 그리고 신전의 대주교. 모니카는 검은 로브로 정체를 완벽하게 가린 채 밀실로 향했다.

‘잠깐만 빌리는 거라고, 금세 제자리에 가져다 놓으면 돼.’

모니카는 에로의 간절함을 모르지 않았다. 막 왕국으로 도약하는 중이니 무엇이든 허투루 하고 싶지 않을 터. 더구나 키르탄은 장차 제 나라이기도 했다.

‘헨리, 너무 걱정하지 마. 이 엄마는 절대 우리 아들을 곤란하게 하지 않을 거니까.’

모니카는 자신의 행동에 대해 거듭 변명했다. 그녀는 황금색 화려한 상자 안을 열어 사자와 호랑이가 조각된 청동으로 만든 인장을 조심스레 꺼냈다. 그녀는 인장을 붉은 벨벳 주머니에 넣곤 로브 안쪽 깊숙이 숨긴 채 재빨리 밀실을 빠져나왔다.

그러나 제 심장에서 움튼 요란한 진동이 그녀의 긴장감을 증폭시켰다. 분명 금기를 범하는 행위가 아니라며 스스로를 안심시켰는데도 천하의 몹쓸 짓을 하는 양 두려웠다. 살면서 자신이 원하는 드레스를 입지 못할 때와 총애했던 정부가 말도 없이 사라졌을 때 빼고는 이토록 살 떨린 적이 없었건만, 마치 라스토니아를 통째로 훔치는 듯한 죄책감에 사지가 후들거렸다.

‘왜 두려워해? 난 이 제국의 선황후야. 최고 어른이라고.’

그러면서도 제 궁으로 돌아가는 내내 두려움에 떨며 종종걸음쳤다. 드디어 궁 초입에 들어서려는 찰나였다. 검은 인영이 모니카의 앞을 막아섰다.

“모니카. 어디를 다녀오는 거지?”

“!?”

갑자기 나타난 낯선 존재에 모니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바람에 쓰고 있던 후드가 벗겨질 정도였다.

“찰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그리고 모니카라니, 예의를 갖추지?”

쏘아붙이는 모니카의 목소리는 매우 차가웠다.

“같이 늙어가는 마당에 예의는 무슨……?”

그때였다. 찰스가 모니카를 향해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그는 복잡한 얼굴을 한 채 그녀를 노려보았다.

“왜……. 왜?”

“이 야심한 시간에 혼자 궁을 배회하는 이유가 뭔데?”

찰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모니카는 시녀들 없이는 바닥에 떨어진 손수건 한 장도 제 손으로 줍는 여자가 아니었다.

“신경 끄시죠, 찰스 대공.”

모니카는 찰스를 무시하곤 그냥 지나쳤다. 하지만 찰스는 그녀를 쉽사리 놓아주지 않았다. 굳이 다가와 팔을 잡는다거나, 앞을 막아서지 않았다. 그저 말로 사람의 발목을 묶는다고 할까.

“그 어린놈 믿지 마.”

“말조심해!”

“내가 알아보니 키르탄이라는 왕국은 없어.”

“그게 무슨 소리야?”

모니카가 찰스를 향해 완전히 돌아섰다. 키르탄 왕국이 없다고? 그럼 에론이 자기한테 사기라도 쳤다는 건가.

“왕국도 아니고, 북쪽 어디에 광산이 크게 터져서 돈 좀 번 졸부에 불과하단 말이야. 라스토니아의 선황후인 모니카가 어울릴 만한 족속이 못 돼.”

“그쯤은 나도 알아. 하지만 곧 키르탄은 왕국이 될 거야.”

‘난 또 뭐라고.’

모니카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에론이 저한테만큼은 솔직히 다 말해 준 것을. 아직 대륙 법원에 왕국이라고 인정받지 못한 상태여서, 인장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솔직히 에론보다 찰스가 더 미덥지 않았다. 예전부터 호시탐탐 황위를 노리는 것을 왜 모를까. 헨리에게 적장자가 없다는 것을 알고 또 제게 들이대는 것일 터. 황위 서열 1위니까.

‘낸시가 황후가 되면 금세 황자를 낳을 거야. 그러니 꿈 깨.’

혹여 자신을 이용해서 헨리의 황위를 빼앗으려는 음흉한 심보를 모를까 봐. 자신을 허수아비로 전면에 내세우곤 황제 노릇이 하고 싶은 것일 터. 황위 앞에선 부모 자식도 없다는 말은 진리였다.

“모니카, 나랑 혼인해.”

찰스가 뜻밖의 말로 모니카를 놀라게 했다.

“개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내가 왜 너, 아니 찰스 대공이랑 재혼을 해?”

“둘 다 혼자가 됐고, 황실 어른으로서 폐하를 든든히 받쳐 주면 좋잖아? 홀로 된 형수를 동생이 보살펴 주는 건, 황실 법도에도 어긋나지 않고 말이야. 혼인도 가능하다는 거, 알잖아?”

“당장 내 앞에서 그 보기 싫은 면상 치워.”

모니카는 찰스를 향해 온갖 욕을 다 퍼부은 뒤 돌아섰다.

* * *

노라는 스톤에게 마리아의 비극적인 운명을 듣곤 크게 놀랐다. 아이를 가지면 단명하게 된다는 말에, 노라는 몇 번이나 스톤에게 되물었다. 하지만 되돌아온 답은 변함이 없었다. 물론 라모나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두 사람이 군터를 도와주도록 해.”

더불어 시기가 늦어질수록 마리아에게 좋지 않다는 말도 해 주었다.

“참, 더럽게 기구한 팔자네.”

노라가 눈물을 터뜨렸다. 하지만 선택은 필요 없는 문제였다. 당연히 아이보다 마리아가 중요하지. 그런데 문제는 마리아가 겪어야 할 절망이었다. 자신은 석녀가 아니라며 얼마나 좋아했는데. 사랑하는 군터의 아이를 가져서 행복하다고 했었다. 그런데 그녀를 속인 채 주위 사람들이 다 나서서 낙태를 종용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해 버렸다.

“마리아에게 나의 예언은 말하면 안 돼.”

세상 어떤 사람도 자신의 죽음이 언제 도래할지 아는 건 큰 공포였다.

“말 안 합니다.”

선뜻 대답하는 노라와 달리, 라모나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비통한 상황이긴 해도 완벽하게 동조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라모나, 너는 왜 대답을 안 하는 거냐?”

“네……? 그게, 저는 좀 다른 생각이라서요.”

라모나는 스톤의 말을 듣는 순간, 제 몸 안에 복잡한 감정의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것을 느꼈다. 강한 저항과 반문, 불합리, 모순 등……. 선뜻 그의 뜻에 동조하기 힘이 들었다. 물론 자신이 왜 그런지는 잘 모르겠다. 이런 느낌은 처음 경험하는 거라서.

“?”

노라와 스톤이 의아한 얼굴로 라모나를 바라봤다. 아이를 가지면 단명한다는 예언에 이견이 있을 수 있나. 그것 자체가 더 이해하기 힘들었다.

“왕비님께서 선택하실 문제라고 생각해요.”

“뭐?”

“됐어. 그러다 더 상처만 받아. 여하튼 라모나도 입 다물어.”

노라는 격앙된 목소리로 라모나의 의견을 일축해 버렸다.

‘선택 같은 소리 하고 앉았네. 사람이 죽는 마당에 무슨 선택. 당연히 살아야지.’

속이 아프고 쓰린 건 노라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마리아에게 낙태약을 권하는 이유와 비극적인 운명, 두 가지를 모두 알려 주는 건 그녀가 감당할 수 없는 일이었다. 차라리 군터의 결정대로 조용히 유산하는 것으로 한번 아프고 마는 게 현명할 터였다.

* * *

에로는 모니카와 함께 키르탄으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탔다. 그는 머릿속으로 자신이 세운 계획에 관해 연신 되짚는 중이었다.

‘헬랜드로 가려면 파스트 행궁을 지나야 해. 거기서 모니카와 헤어져야 한단 말이지.’

이미 인장은 자신의 손에 들어온 상황. 모니카는 눈곱만큼도 자신을 의심하지 않았다. 마차를 탄 와중에도 어제 아침에 자신이 선물한 사파이어 반지와 목걸이를 거울에 비춰 보느라 바빴다. 한데 에로는 한 가지 껄끄러운 것이 있었다. 마리아의 조언대로 찰스를 경계하긴 했는데, 이미 그쪽에서 자신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먼저 찰스를 찾아가 대화를 건네기도 했다.

[나는 돈만 주면 편리해지는 인간이 아니라오.]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저는 떠나기 전, 찰스 대공 전하께 인사도 나누고 작은 성의를 보이려 찾아왔을 뿐입니다.]

에로는 찰스 앞에 금화가 든 상자를 올려놓았다. 한데 찰스는 발을 탁자에 올리곤 상자를 옆으로 툭 차 버렸다. 이내 상자에서 쏟아진 금화가 카펫에 나뒹굴었다.

[모니카는 이까짓 금화 몇 푼과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쓰임새가 많은 여자지.]

역시 찰스는 황위를 향한 야망을 버리지 못한 상태였다.

[이봐! 애송이, 매사 몸조심하라고.]

에로가 서둘러 나가려는 찰나 그가 던진 말이 마치 경고처럼 들렸다. 결과적으로 찰스와 좋은 관계를 트는 건 실패한 것이다. 에로는 찜찜한 마음을 뒤로한 채 라스토니아를 떠났다. 헨리의 배려로 몇 명의 기사들이 호위를 해 주어서 파스트 행궁까지 가는 데는 크게 염려할 필요가 없었다.

“에론, 이제야 실감이 나요. 내가 당신의 여자가 되었다는 것이요.”

“모니카, 키르탄의 생활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내가 지켜 줄 테니 나만 믿어요.”

“에론…….”

“그리고 고마워요. 사랑 하나만 믿고 고생길을 자처해 줘서.”

“난 에론만 곁에 있으면 돼요.”

두 사람은 서로를 꼭 안아 주었다. 하지만 이런 평화도 오래가지 못했다. 라스토니아를 떠난 지 사흘쯤 되었을까, 파스트 행궁이 바로 지척인 곳에서 일이 터지고 말았다. 마차 앞뒤를 새카맣게 감싼 병사들이 보였다. 어느 귀족의 사병인지 갑옷에는 아무런 표시가 없었다.

그보다는 그들을 대적하기에는 헨리가 붙여 준 기사의 수가 턱없이 부족한 게 문제였다. 일순간, 낯선 사병들이 마차 주위를 돌며 겁을 주기 시작했고 기어이 기사들과 싸움이 벌어졌다. 우당탕! 마차가 부서지고 기사들이 무참히 죽어 나갔다. 마차 밖은 피가 터지는 살육의 현장이 따로 없었다.

그때 문이 열리며 머리부터 발끝까지 은색 갑옷을 걸친 사내가 에로와 모니카를 우악스럽게 끌어냈다.

“나와!”

에로는 밖으로 나와 재빨리 상황 판단을 먼저 했다. 예상대로 머릿수로 밀린 상황. 헨리의 기사들은 전멸한 상태였다. 이내 병사들은 에로와 모니카를 갈라놓았다.

“에론!”

“모니카!”

두 사람은 떨어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되레 병사 몇 명이 에론을 무자비하게 폭행하기 시작했다.

“그만둬! 이놈들아! 우리가 누군 줄 알고 이러느냐?”

모니카가 목청이 터지게 소리쳤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무력하게 에론이 폭행당하는 광경을 보면서 울부짖었다. 퍽퍽! 이어지는 발길질에 에론은 피를 토하고 얼굴은 피범벅이었다. 정말이지 맞아 죽기 직전이었다.

‘더럽게 아프네.’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에로를 향해 비아냥거렸다.

“왕자라면서 검조차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니. 역시 사기꾼 냄새가 펄펄 난다니까.”

“찰스!”

대번 목소리를 알아들은 모니카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

“이 배불뚝이 개새끼야! 당장 에론을 풀어 줘!”

“허 참! 오래 살고 볼 일이야. 내가 모니카의 순정을 다 볼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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