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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황후 마리아-74화 (74/120)

74화

“이젠 헨리가 제 어미도 돈에 팔아먹고, 나라 꼴 잘 돌아간다.”

찰스는 모니카의 허리를 움켜쥔 채 버럭 고함을 쳤다. 그러나 모니카의 눈에는 죽도록 맞고만 있는 에론밖에 안 보였다.

“찰스, 에론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죽여 버릴 거야!”

“미래의 남편한테 말하는 본새하곤. 쯧쯧!”

“남……편? 이런 미친! 형수님이라 불러, 아니면 전하라고 하든지. 내가 너보다 윗전이라는 거 잊지 말라고. 이 근본도 없는 새끼야!”

“나라의 근본은 너희 모자가 마리아 스튜어트를 폐위시키면서 물 말아 먹었다는 거 모르나?”

스튜어트 공작가가 사라졌으니 자신이 황제가 되지 말라는 법은 없었다. 그나마 라스토니아를 지탱하는 건 마리아와 그의 가문이었건만. 어리석은 헨리 모자가 나라를 한순간에 나락으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러니 황족이자 황위 서열 1위인 자신이 나설 수밖에. 그러게, 누가 마리아를 폐위하라고 했나. 또한 이 모든 행동은 라스토니아를 위하는 애국심의 발로였다. 그때 대지를 울리는 천둥소리와 함께 지진이 난 양 땅이 요동쳤다.

“대공 전하! 북쪽에서 수상한 자들이 몰려오고 있습니다!”

검은 갑옷을 입은 군대로 수적으론 많지 않으나, 뿜어내는 기세가 아주 맹렬했다. 찰스의 사병들은 그들의 강한 기세에 밀려 슬금슬금 후퇴하기 시작했다. 마침 커다란 창이 허공을 날아와 에로를 폭행하던 병사의 가슴을 관통했다. 이어서 공기를 가르고 들려온 말은 크나큰 충격이었다.

“에론 왕자님!”

그제야 찰스의 사병들은 썰물처럼 뒤로 빠져나갔다. 키르탄의 군대가 여기까지 마중 나올 줄은 몰랐다. 그들은 거대한 해일처럼 밀려가 사병들을 진압했다. 에로는 핏물에 눈이 가려 시야가 어둑했다. 그저 보이는 거라곤 자신을 향해 내민 커다란 손이 전부였다. 하지만 투구 속에서 빛나는 익숙한 눈동자를 보곤 에로는 울음을 터뜨렸다.

‘그가 왔어. 나를 구하러.’

솔샤르가 자신을 구하러 이곳까지 올 줄이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솔샤르가 에로를 자신의 말에 태우자, 그의 병사들은 찰스의 사병들을 무자비하게 공격했다. 이내 솔샤르는 찰스 대공을 향해 말을 달렸다. 자신의 앞을 막는 사병들은 솔샤르의 할버드에 목이 날아갔다.

‘숨통을 뚫어 주마.’

솔샤르는 에로를 앞에 태우곤 거대한 할버드로 찰스를 향해 휘둘렀다. 슈웅! 찰스가 쓰고 있던 투구가 허공을 향해 날아가고 칼날은 그의 왼쪽 뺨을 스쳐 지났다.

“으윽!”

찰스는 제 뺨에 흐르는 피를 닦을 사이도 없이 모니카를 끌고 도망쳤다. 하지만 모니카는 그에게서 벗어나려 필사적으로 버둥거렸다. 그러나 이미 솔샤르가 찰스의 동선을 파악하곤 앞을 막아선 후였다. 그는 찰스에게 할버드를 겨눈 채 윽박질렀다.

“감히 키르탄의 왕자님을 죽이려 하다니. 라스토니아 황족은 비열하기 짝이 없구나.”

솔샤르의 엄포에 찰스는 어떻게든 대적해 보려 똑같이 검을 겨눴다. 반면 모니카는 기절한 에로를 보며 울부짖었다.

“에론! 정신 차려요! 나, 여기 있어요.”

모니카는 찰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에론에게 달려가려고 몸부림쳤다. 하지만 찰스는 모니카를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우리는 라스토니아 황실과 파혼을 선언한다.”

솔샤르는 아주 간단한 말로 모니카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이내 찰스의 목을 치려 할버드를 위로 추켜올렸다. 그때 헬랜드를 떠날 적 마리아가 제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찰스 대공은 죽이지 마세요. 대공은 틀림없이 모니카를 잡고 늘어질 테니까요.]

에로를 피떡으로 만들어 놓아 잠시 이성을 잃었지만, 금세 침착함을 되찾았다. 그러게, 찰스가 거추장스러운 모니카를 해결해 준다니 살려 줘야지.

“아, 안 돼! 나를 두고 가지 말아요! 에론!”

솔샤르는 에로를 향해 울부짖는 모니카를 뒤로하곤 제 병사들을 퇴각시켰다.

* * *

마리아는 시녀가 가져온 꽃을 정리하여 화병에 꽂았다. 그러는 내내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했다. 간혹 입덧이 올라와 힘들기도 하지만 그마저도 행복했다. 때마침 문이 열리며 분홍빛 머리가 빼꼼 보였다.

“어서 와요, 라모나!”

마리아는 자신을 찾아온 라모나를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꽃꽂이하세요?”

“같이 할래요?”

“네.”

라모나는 한달음에 달려와 마리아의 꽃꽂이를 돕기 시작했다. 한데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니 그녀의 얼굴은 천생 요정이었다. 이토록 현실감 없이 예쁘니 로랑한테 해코지를 당했지. 스톤과 생활하면서부터 라모나는 인간보다는 요정의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저기, 왕비님.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요?”

“음, 우리 엄마 얘긴데요.”

“라모나 엄마요?”

“네.”

라모나는 살짝 긴장한 얼굴로 말문을 열었다. 자신은 정령과 인간의 혼혈이라서 어릴 적 사람들의 관심을 많이 받았다고 했다. 또한 사람들의 반응이 매우 극단적이란 말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매우 신기해하면서 좋아해 주기도 했지만, 또 어떤 이는 심하게 차별하며 배척했다고 했다. 물론 로랑은 라모나의 미모를 시기했으니 후자 쪽에 들어갈 터. 그러나 라모나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이런 게 아닌 듯했다.

“우리 엄마는 저를 낳고 돌아가셨어요.”

“왜요?”

“정령의 아이를 감당할 만큼 몸이 건강하지 못하셨대요. 그래서 외할머니가 아이를 없애자고 여러 번 권유했는데도 엄마는 끝까지 고집을 부리셨대요.”

“세상에!”

마리아는 진심으로 라모나의 이야기에 슬퍼했다. 그러나 정작 라모나는 슬프기보다는 담담한 얼굴이었다. 그녀는 마리아를 정면으로 응시하곤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왕비님이라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

“아이 때문에 죽는대요. 어떤 선택을 하시겠어요?”

‘어떤 선택?’

마리아는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저라면 어떤 선택을 할까. 이런 경우는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어서 그런지, 라모나의 질문에 대답하기가 어려웠다.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

“하지만 쉽게 아이를 포기하진 않을 것 같아요. 어떻게든 방법을 찾으려 할 것 같아요.”

“그렇군요.”

라모나는 환하게 웃었다. 역시 예상대로 마리아는 그리 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녀에게 선택할 기회를 주는 게 옳았다.

“왕비님, 저기…….”

왕실 사람들과의 암묵적인 약속을 어기는 행동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마리아가 감당할 문제이고 그녀의 결정을 존중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고민 끝에 자신이라도 그녀에게 언질을 주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시기가 좋지 않았던 모양이다.

“군터.”

라모나가 막 이야기를 꺼내려는 찰나, 군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라모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저는 이만 가 볼게요.”

라모나가 나가자, 군터는 마리아를 자신의 무릎에 앉히곤 기나긴 입맞춤을 했다. 마리아가 임신한 뒤부턴 단 몇 분만 보지 않아도 서러울 정도로 그녀가 보고 싶었다.

“어떡해요? 임신 초기에는 조심해야 해서 군터가 많이 참아야 하는데.”

“음, 성행위에는 아주 여러 가지의 방법이 있다고 들었는데 말이야.”

군터가 음흉한 눈으로 마리아를 훑어 내리자, 그녀는 얼굴을 붉혔다.

“마리아.”

일순간 군터의 목소리가 매우 진지해졌다. 아니, 눈빛, 표정 모든 게 다소 경직된 듯했다.

“내일 약을 먹어야 해.”

“제가요?”

“그래, 왕궁의 약제사가 지은 약이야.”

“아, 선물이구나. 건강한 아기 낳으라고.”

“어……? 어. 그런 거지.”

마리아가 군터의 가슴에 얼굴을 기대자, 그는 그녀의 머리에 얼굴을 묻었다. 이 비참하고 불안한 심정을 그녀가 알까? 진실을 알게 되면 자신을 많이 원망할 텐데. 하지만 제게 몇 번을 물어도 답은 변하지 않는다.

‘나는 무조건 너다.’

마리아가 제 곁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헬랜드도 부와 명예도 인간적인 삶도 다 필요 없었다. 가능하다면 제 생명을 잘라서 그녀에게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너한테 죽을 때까지 원망받아도, 절대 죽게 내버려 두진 않아.’

* * *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살이 찢어지는 통증에 눈을 뜨자 여전히 눈앞이 희미했다. 그래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부관님.”

제 뺨을 감싼 채 바라보는 사람이 솔샤르라는 것을.

“에로. 드디어 너를 다시 만났구나.”

그의 말에 에로는 기어이 눈물을 터뜨렸다. 에로는 두 팔을 들어 솔샤르의 목을 감쌌다.

“보고 싶었어요.”

“나도 보고 싶었다.”

군터 앞에서 티를 내고 싶지 않아서 일부러 의연한 척했으나, 실은 매일 스톤에게 달려가 에로의 상황을 보여 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 그때만큼은 제이미의 부재가 얼마나 크게 느껴지던지. 제이미만 있었다면 매일 에로를 볼 수도 있었을 텐데. 뒤늦은 후회로 괴로웠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안은 채 한동안 말없이 교감했다.

“참, 여기요.”

에로는 갑자기 솔샤르에게서 몸을 떼곤 품속 깊숙이 숨겨 놓았던 붉은 벨벳 주머니를 건넸다. 솔샤르는 에로가 건넨 인장을 제 품속에 밀어 넣었다.

“제가 해냈어요.”

“장하다. 이것으로 네가 할 일은 끝이다.”

“네, 더는 부관님 곁에서 떨어지지 않을 거예요.”

“당연하지.”

두 사람은 서로가 너무 애틋해서 말문이 막혔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느낀 것을. 사랑한다는 말을 밖으로 꺼내지 않는 이유는 그만큼 서로가 소중하기 때문이었다.

“가자, 스톤한테 가서 다친 상처를 치료받아야지.”

“네, 다들 너무너무 보고 싶은 거 있죠?”

에로 특유의 말투에 솔샤르는 환하게 웃었다. 이제야 자신이 알던 그녀가 돌아온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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