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화
라모나는 스톤과 군터의 대화를 엿듣곤 다급하게 마리아가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오늘 밤에 왕비님께 낙태 약을 먹인다는 거지?’
이 일로 인해 자신이 크게 처벌받더라도 감수할 생각이다. 군터에게 마리아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잘 알지만, 그럴수록 상대의 의사를 존중해 주는 게 옳지 않을까. 지금쯤 응접실에서 노라와 다과를 즐길 시간이니, 그곳으로 가야지. 드디어 라모나가 응접실 앞에 도착했다. 그녀는 응접실로 들어가기 전, 거친 숨을 몰아쉬곤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호기롭게 이곳까지 달려오긴 했는데 막상 문을 열려 하자, 수만 가지의 고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하지만 그 많은 사람 중의 한 명은 당사자에게 진실을 말해 주어야 하니까. 라모나는 잠시 숨을 멈춘 채 손잡이를 돌렸다.
“라모나, 어서 와요.”
지금 제 심정과 상반된 상냥한 마리아의 목소리와 향긋한 차향이 라모나를 더 절망케 했다. 평소처럼 즐거운 대화만 했으면 좋으련만. 한데 노라의 표정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차를 마시면서도 내내 어색한 미소로 마리아를 응시하고 있었다.
“저도 차 주세요.”
라모나의 말에 노라는 찻주전자를 들고 일어섰다.
“조금만 기다려라, 차가 다 식었지 뭐냐.”
노라는 따뜻한 차를 가지러 응접실을 나갔다. 시녀를 시켜도 되지만, 노라도 오늘은 마리아와 마주하기가 힘든 모양이다. 기회라도 잡은 양 자리를 피하는 것을 보니……. 하긴 마리아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 게 쉽지는 않겠지.
오늘 벌어질 엄청난 일을 생각하면 노라도 두려울 테니까. 라모나는 노라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에야 마리아를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왜…… 나를 그렇게 봐요?”
마리아는 평소와 다른 라모나가 의아했다. 노라도 대화 내내 표정이 좋지 않더니, 라모나도 무슨 일이 있는지 얼굴이 바짝 굳은 게 이상했다. 라모나는 얼마간 망설이는가 싶더니 눈을 부릅뜨곤 마리아에게 말문을 열었다.
“대왕님께서 왕비님께 곧 약을 주실 거예요.”
“알아요. 몸에 좋은 약이라고 들었어요.”
“아뇨! 그 약을 드시면 왕비님은 배 속의 아이를 잃으실 거예요.”
라모나가 던진 뜻밖의 말에 마리아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그녀는 크게 충격을 받았는지 말도 못 한 채 입만 뻥긋거렸다. 어째서 자신이 낙태 약을 먹어야 하는지 물어야 하는데 말이 입 안에서 엉켜 나오질 않았다.
“라……모나, 왜요? 내가 왜 낙태 약을 먹어야 하는데요?”
마리아는 한참 만에 비통한 어조로 물었다.
“그건, 아악……!”
라모나가 막 대답을 하려는 찰나였다. 보이지 않는 손이 허공을 날아와 라모나의 입을 틀어막은 뒤, 응접실에서 끌고 나갔다. 마리아는 라모나가 허공을 날아 문밖으로 끌려가는 광경을 보았다. 예상대로 라모나는 스톤의 방으로 끌려갔다.
“라모나, 이 시건방진 것 같으니!”
스톤의 고함이 메아리처럼 울렸다. 이내 라모나는 커다란 기둥에 보이지 않는 밧줄로 칭칭 묶였다.
“스톤 님은 틀렸어요!”
라모나도 지지 않고 소리쳤다.
“어리석은 것 같으니! 네가 나설 일이 아니다!”
“왕비님께 진실을 숨기는 건 죄악이에요. 어째서 대왕님과 스톤 님은 왕비님을 존중하지 않는 건데요?”
“존중하지 않는 게 아니야! 너무 소중해서 상처 주기 싫은 거지.”
“비겁한 핑계예요.”
“철딱서니 없는 것! 오냐, 기어이 눈으로 봐야 믿겠지. 내가 본 악몽을 그대로 보여 주마. 마리아에게 얼마나 참혹한 일이 일어나는지 말이다.”
스톤이 역정을 내자, 그의 방은 갑자기 캄캄해졌다. 이내 허공에 심하게 진통하는 마리아의 모습과 그녀의 손을 잡은 채 고통스러워하는 군터가 보였다.
‘아악……!’
마리아가 진통하자, 궁의와 시녀들이 그녀를 보살폈다. 하지만 아이는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되레 마리아의 고통은 심해지기만 했다.
‘왕비님, 조금만 더 힘을 내십시오.’
궁의의 독려에 땀범벅이 된 마리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기의 머리가 걸렸습니다. 이대로 가면 질식할 겁니다. 그러니 더 힘을 주셔야 합니다.’
‘질식사! 아……. 안 돼!’
마리아는 궁의의 말을 듣곤 얼굴이 빨개지도록 힘을 주었다. 그녀의 이마에 핏대가 솟고 손은 파들파들 떨렸다.
‘아……. 아악!’
마리아는 있는 힘을 다해, 마지막이라도 된 양 비명을 질렀고 산실에는 긴장감이 팽배했다. 이어 터진 아기의 울음소리. 궁의는 빠르게 아기를 받아 냈다.
‘왕비님이 해내셨습니다.’
‘마리아.’
우렁찬 아기의 울음소리에 군터를 비롯한 모든 이가 환호했으나, 마리아는 그대로 침대에 힘없이 늘어졌다.
‘마리아! 정신 차려!’
군터의 고함과 함께 마리아의 몸을 덮고 있던 면 시트가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출혈이 심합니다.’
궁의가 놀라서 시녀들과 마리아의 출혈을 막아 보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마리아는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차갑게 식어 갔다.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그녀의 풀린 동공이 천장을 응시하다 그대로 고개를 떨궜다.
‘꺅!’
‘왕비님이 숨을 거……두셨습니다.’
시녀들의 비명이 산실을 날카롭게 울렸다. 이내 라모나는 빨갛게 물든 마리아의 모습을 보며 울음을 터뜨렸다. 결국 스톤의 예언대로 마리아는 아이를 낳곤 과다 출혈로 목숨을 잃었다. 말로만 듣던 일을 제 눈으로 확인하니, 그 참혹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였다.
사지가 부르르 떨리고 짙은 절망감이 그녀의 영혼을 잠식했다.
“보았느냐? 이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알겠느냐 말이다?”
스톤은 고개를 숙인 채 오열하는 라모나를 보며 소리쳤다. 그때였다. 라모나의 울음소리가 커질수록 그녀의 몸에서 거대한 빛이 쏟아지더니 스톤이 묶은 끈을 단숨에 끊어 버렸다.
“!?”
이내 허공으로 떠오른 라모나의 눈동자 색이 붉게 변했다.
“너는?”
스톤은 그제야 라모나가 어떤 정령과의 혼혈인지 알아차렸다. 전에는 라모나가 거의 인간에 가까워서 아버지가 어떤 정령인지를 알지 못했으나, 이제는 대략 짐작이 갔다.
“하실 수 있잖아요?”
어느새 라모나의 얼굴에는 눈물 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단호한 목소리로 스톤을 채근했다.
“스톤 님은 겁쟁이예요.”
“정령은 인간의 운명을 함부로 바꿔선 안 된다.”
“정령은 신이 아니에요. 쓸데없는 사명감이란 말이에요.”
부유하던 라모나는 천천히 밑으로 내려왔다.
* * *
마리아는 라모나의 말을 듣곤 그대로 후원으로 향했다. 더는 그 자리에 앉아서 군터가 제게 낙태 약을 가져오기만을 기다릴 수가 없었다. 상상만 해도 끔찍한 광경이었다. 라모나한테 이유를 들었어야 했는데.
‘아니지, 이유는 군터한테 들어야지.’
마리아는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떨리는 손을 맞잡았다. 가슴이 뒤집히고 머릿속이 뒤죽박죽이었다. 화가 난다기보다는 덜컥 두려움이 앞섰다. 군터가 이유도 없이 제게 낙태 약을 주려고 하진 않을 터.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한데 그에게 들을 진실이 두려웠다. 그때였다. 제 마음이라도 읽기라도 했는지, 군터의 목소리가 들렸다.
“군터.”
그는 마리아의 상기된 얼굴을 보자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꼈다. 그는 만지작거렸던 약병을 잠시 품속에 밀어 넣었다.
“왜 여기에 혼자 있지, 노라는?”
“네? 아, 혼자 생각할 게 있어서요.”
마리아는 막상 군터를 보자 무엇부터 물어봐야 할지 막막했다. 뭐라고 물어보지? 제게 주려는 약의 정체가 무엇이냐고? 왜 자신이 낙태해야 하는 거냐고? 그렇게 물어봤다가 엄청난 소리를 들으면 어쩌지? 찰나였으나 수만 가지의 의구심이 마리아를 괴롭혔다. 미치도록 궁금한데 감히 물어보지도, 들을 자신도 없는 상황이었다.
‘언제까지 피할 건데.’
그건 제 방식이 아니었다. 마리아 스튜어트는 언제나 대범하며 현실을 직시하는 사람이었다.
“군터는 아이를 원하지 않아요?”
마리아는 낙태 약보다는 그 이유를 알고 싶었다. 그녀의 물음에 군터의 청록빛 눈동자가 짙은 검은빛을 띠었다. 마리아는 왠지 그 어두운색이 절망처럼 느껴져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자신이 임신했다고 했을 때도 군터는 놀라긴 했으나, 많이 좋아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마리아는 군터의 대답만 기다렸다. 하지만 그는 쉽사리 말문을 열지 못했다. 아무래도 큰 비밀이 있는 게 분명했다.
“원하지 않는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들은 군터의 대답이었다.
“뭐라고요?”
“나는 지금 이대로가 좋아. 마리아와 나, 이렇게 단둘이 말이다.”
그의 뜻은 매우 단호했다. 무어라 반박할 수 없을 정도로. 또한 그가 가져온 약은 낙태 약임을 암묵적으로 시인한 셈이었다.
“우리 사이에 누구도 끼어드는 것이 싫다.”
“!?”
마리아는 말문이 턱 막혔다. 아주 대단한 이유가 있을 줄 알았는데, 단순히 아이가 싫어서라니. 다른 아이도 아니고 우리의 아이인데? 그에게 사랑의 결정체인 아이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건가. 마리아는 무슨 말로 반박해야 할지, 우왕좌왕했다. 사람이 너무 기막힌 상황을 맞닥뜨리면 사고가 마비된다고 하더니, 지금 제 경우가 딱 그랬다.
“알……겠어요.”
알겠다니, 고작 내놓은 말이 수긍하는 말이었다. 당장은 아무 생각이 나질 않아서 더한 것을 물어볼 수가 없었다.
“저도 고민할 시간을 주세요.”
“그래.”
두 사람 사이에 냉랭한 소용돌이가 휩쓸고 지났다. 마리아가 창백한 얼굴로 군터를 지나치는데도 그는 그녀를 잡지 않았다. 마리아에겐 가혹한 일이니, 홀로 고민할 시간만큼은 충분히 주고 싶었다.
‘네가 아프게 절망하는 것보다 차라리 네가 날 원망하는 게 낫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