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황후 마리아-76화 (76/120)

76화

마리아는 머릿속이 텅 빈 것만 같았다. 그녀는 정처 없이 앞만 보고 걷다가 자신이 어느새 왕궁 마구간에 와 있음을 깨달았다. 그녀는 얼마 전 군터가 제게 선물한 백마에 올라탔다. 아무래도 왕궁에선 가슴이 터질 것 같아서 더는 생각조차 무리였다. 잠시라도 이곳을 벗어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다.

마리아는 말을 타고 무작정 왕궁을 뛰쳐나갔다. 거친 사막이든 숲이든 황량한 대지든 상관없다. 잠시라도 군터 플레이슬리가 보이지 않는 곳이 필요했다. 그녀는 제게 불어오는 거센 바람을 느낀 후에야 제대로 숨을 쉴 수 있었다.

‘다 착각이었나?’

군터와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왠지 거짓말로 밝혀진 듯했다. 마리아의 가슴에 군터를 향한 배신감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자신을 석녀라고 비난하던 헨리, 제 의사도 묻지 않고 낙태 약을 먹여 아이를 죽이려는 군터, 두 사람에게 느낀 배신감을 저울에 올리면 수평을 이룰 것이다. 아니, 어쩌면 저울이 군터 쪽으로 더 기울지도……. 그만큼 마리아는 군터에게 크게 실망한 터였다.

마리아는 더 빠르게 말을 몰았다. 눈물이 바람에 흩날리며 곱게 올린 머리가 아무렇게나 헝클어져도 전혀 개의치 않았다.

‘군터, 나는 당신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아니, 다시는 그의 얼굴을 볼 자신이 없었다. 군터만큼은 오롯이 제 편이라 여겼다. 더 나아가 자신을 위해서라면 희생도 자처할 만큼 고마운 남자인 줄 알았다. 한데 그건 오해였다. 결국 군터도 저 자신이 가장 소중한 남자에 불과했다. 자신은 임신 사실을 알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석녀가 아니라는 게 밝혀져서 좋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헨리의 아이가 아닌 군터의 아이를 가진 것이 축복이라 여길 정도였다.

‘그런데 당신이 다 망가뜨렸어.’

천국과 지옥은 정말이지 동전의 양면과 같은 것. 언제라도 반대로 돌아서면 전혀 다른 세상이 존재하고 마니까.

“아아악!”

마리아는 말을 달리며 울부짖었다. 군터는 자신이 유일하게 사랑한 남자였다. 또한 저보다 그를 더 믿기도 했다. 그런데 어째서 그는 자신을 이런 지옥에 밀어 넣는지 모르겠다.

‘나는 당신이 마음대로 죽였다 살렸다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란 말이야!’

결국 자신은 군터에게 존중받지 못하고 산 셈이었다. 또한 그의 사랑은 다 거짓일 뿐, 그가 말하는 사랑은 자기 사정대로 바뀌는 감정에 불과했다.

‘누구도 내 아이를 함부로 죽일 권리는 없어.’

마리아는 한 손으로 제 배를 감쌌다. 이젠 군터와 마리아의 아이가 아니라, 오로지 제 아이로만 여길 참이다. 그녀는 잠시 말을 멈추곤 뒤를 돌아보았다. 정신없이 달리느라 궁에서 이렇게 멀어졌는지 알아채지 못했는데, 저 멀리 헬랜드의 궁이 점으로 보였다. 한데 다시는 그곳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그냥 이대로 계속 말을 달려 어디든 떠나고 싶다는 마음밖에는 없었다. 마리아는 주저 없이 말을 달렸다.

‘돌아가지 않아.’

지금이야말로 홀로서기를 할 때였다. 어떤 남자에게도 의지하지 않은 채, 어른 마리아로 살아가야지. 누구도 제 인생을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할 테다. 마리아는 손등으로 쏟아지는 눈물을 훔쳤다. 충동적으로 왕궁을 나오긴 했으나 이마저도 운명일 터. 때론 계획을 이탈하여 살 때 더 좋은 상황과 맞닥뜨린다고 했다. 이번에는 제게 주어지는 상황에 맞춰 살아 봐야지.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스스로 해결하면서 말이다.

그 시각, 왕궁은 발칵 뒤집혔다. 해가 진 후에도 마리아는 왕궁 어디에서도 보이지 않았다. 군터는 왕궁 전체를 이 잡듯이 샅샅이 뒤졌다. 그녀에게 고민할 시간을 준 것뿐인데 이렇게 꼭꼭 숨어 버릴 줄이야.

“노라가 말했나?”

“아닙니다! 제가 감히 어떻게?”

노라는 두 손을 휘이 저으며 부정했다. 자신이 아무리 오지랖이 넓어도 마리아에게 어찌 그런 말을 할까. 더구나 대왕이 함구령을 내린 마당에 무슨 배짱으로.

군터는 곧바로 스톤에게로 갔다.

“스톤, 마리아가 없어졌……?”

문을 열자, 라모나는 마법진에 갇혀 있고 스톤은 무심하게 창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마치 스톤이 라모나에게 벌을 주는 듯했다.

“라모나가 마리아에게 발설했어.”

“뭐?”

“군터도 나도 마리아를 존중하지 않는 게 이해가 안 됐대. 어떤 상황이든 마리아가 선택할 수 있도록 해 줘야 한다고……. 틀린 말은 아니지. 하지만 쉽게 할 수 있는 말도 아닌 것을.”

목숨이 걸려 있지 않았더라면 굳이 이렇게 무리하지도 않았을 터. 역시 사랑이 지나치면 독이 된다는 건 옳은 말이었다.

“마리아가 궁에 없다.”

마침 시종장이 부리나케 뛰어 들어왔다.

“대왕, 왕비님께서 낮에 말을 타고 궁을 나가셨답니다.”

“뭐? 왜 그걸 이제야 말해?”

군터는 시종장을 향해 무섭게 고함쳤다. 군터가 막 방을 나서려 하자, 스톤이 그를 붙잡았다.

“마리아는 군터를 떠난 거야.”

“!?”

“오늘 밤에 마리아를 찾지 못하면 영원히 마리아를 볼 수 없다는 거, 알지?”

스톤은 깊은 슬픔에 젖은 얼굴로 군터에게 말했다. 마리아가 그길로 군터를 떠났다면 반드시 어딘가에 정착하여 아이를 낳을 것이고, 그녀는 운명대로 생을 달리할 것이다.

“스톤, 말조심해라. 마리아는 절대 나를 못 떠나.”

“흥.”

스톤은 콧방귀를 뀌곤 다시 창 쪽으로 돌아섰다. 그렇게 믿고 싶은 군터의 간절함은 알겠으나, 저와 군터가 마리아한테 한 짓은 참으로 독단적이었다. 하지만 시간을 되돌린다고 해도 그녀에게 단명할 운명이란 말은 하지 않을 생각이다. 그게 더 잔인한 말이니까. 죽으면 영원히 못 보는 거니까.

“그럼, 반드시 마리아를 찾아서 잘 설득해 봐.”

스톤은 거의 희망이 없을 거라는 얼굴로 말했다. 오직 마리아가 군터의 말을 듣고 최대한 이성적인 판단을 해 주길 바랄 뿐이었다.

* * *

“노라, 마리아가 마석 목걸이를 차고 있었나?”

군터는 궁을 나가기 전, 노라에게 물었다. 마리아가 마석 목걸이를 차고 있어야 그녀를 찾는 데 수월했다.

“아뇨. 그 목걸이는 여기에…….”

불행하게도 마리아의 마석 목걸이는 노라의 손에 들려 있었다. 어제 온천욕을 하느라 풀어 놓곤 다시 걸지 않았단다.

“빌어먹을!”

군터는 그대로 말을 타고 왕궁을 나갔다. 대체 이 여자는 어디로 간 걸까. 숲에는 스톤이 풀어 놓은 마물이 득실거리는데. 익히 알고 있지만 참 무모하고 겁이 없는 여자였다. 더불어 그녀에게 고민할 시간을 주겠다고 한 과거의 자신을 죽이고 싶어졌다.

[마리아는 군터를 떠난 거야.]

‘말도 안 돼.’

분명 마리아는 제게 사랑한다고 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곁을 쉽게 떠날 수 있는 건가. 저 자신은 죽어도 안 되던데. 사랑이 그토록 힘이 없는 거라면 그건 사랑이 아니었다.

‘네가 어떻게 나를 떠나,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군터의 사지가 부르르 떨렸다. 마리아가 어디로 향했는지 잘 아는 양, 능숙하게 말을 몰았으나, 실은 눈앞이 캄캄했다. 어디에 가서 그녀를 찾아야 할지 이토록 혼란스러운 적이 없었다. 마침 스톤의 환청이 귓가에 들렸다.

‘군터, 돌아와, 어서!’

‘돌아오라니?’

‘방법이 있으니 돌아와.’

‘!?’

군터는 말 머리를 왕궁으로 돌렸다. 역시 스톤이 방법을 찾아낸 게 틀림없을 터였다. 그는 다급하게 궁으로 돌아갔고, 스톤의 방에 도착하자 뜻밖에도 라모나가 빛에 휩싸여 있었다.

“라모나, 군터에게 마리아를 찾을 방법을 알려 줘라.”

스톤의 말에 군터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라모나가 정령과 인간의 혼혈인 건 알지만, 그녀에게 무슨 능력이 있다고.

“라모나는 감정의 정령이야. 그중에서 행복과 분노의 정령이지. 아직은 하급 정령이지만 차차 상급으로 올라갈 수도 있어.”

“뭐?”

그런 정령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들었다. 하긴 세상에는 별 이상한 마물도 수두룩하니까. 그때 라모나가 군터에게 다가왔다.

“대왕님, 눈을 크게 뜨세요.”

군터는 라모나의 말대로 눈을 감았다. 지금 급한 건 라모나의 정체가 아니니까. 그러자 라모나는 자신의 눈물을 군터의 눈동자에 떨어뜨렸다.

“윽!”

고통스럽진 않지만, 눈에 레몬즙을 넣은 양 매우 시렸다.

“인간에게 여러 가지의 감정의 색이 있어요. 궁을 나서시면 왕비님의 감정이 색으로 보일 거예요.”

“그걸 쫓아가란 뜻이냐?”

“네.”

* * *

마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절벽에 와 있었다. 지난날 알랑 세라두가 자신을 죽이려 했던 그 절벽. 어째서 이곳으로 왔는지 모르겠다. 정처 없이 달리다 보니 도착한 곳이 절벽이라니. 그래도 달이 어두운 밤을 대낮처럼 밝혀서 두려움은 덜했다.

‘또 절벽 밑으로 뛰어내리라는 건가.’

이젠 실소가 터졌다. 더는 죽고 싶지 않은데. 그나마 다행인 건 아주 낯설지 않은 곳이라는 점이다. 헬랜드에서 자신이 두 번째 와 본 곳은 여기가 유일하니까. 마리아는 말을 나무에 묶어 두곤 그 옆에 앉았다. 그러곤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이제 자신이 해야 할 건 고민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계획을 세워야 할 터. 무작정 길을 떠날 순 없었다. 다행히 제 몸에 걸친 보석이 많아서 여비로 쓰기에는 무리가 없었다. 머리부터 신발까지 금붙이가 안 달린 곳이 없으니까. 마리아는 손으로 제 배를 만지며 속삭였다.

“아가, 걱정하지 마. 엄마가 너를 지켜 줄 테니. 우리 둘이 행복하게 사는 거야.”

마리아에게 목표는 이미 정해졌다. 그때 숲에서 바스락 소리가 나며 인기척이 느껴졌다.

“!?”

마리아는 놀라 마른침을 삼켰다. 혹시 마물인가. 그녀는 바닥에 있는 돌멩이를 손에 쥐었다. 이럴 줄 알았더라면 검이라도 챙겨 오는 거였는데. 드디어 거대한 그림자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리아가 그림자를 향해 막 돌멩이를 던지려던 찰나였다.

“마리아.”

익숙한 목소리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