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7화
예상대로 마리아를 찾아낸 사람은 군터였다. 마리아는 본능적으로 절벽으로 달려가 그를 경계했다. 군터는 틀림없이 자신을 막무가내로 궁으로 끌고 가려고 할 터.
“다가오지 말아요. 한 발짝이라도 움직이면 절벽으로 뛰어내릴 테니까!”
마리아는 군터를 향해 고함쳤다. 자신이 그를 이길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다.
“마리아, 위험해.”
군터는 마리아를 향해 손을 뻗은 채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거짓말쟁이! 사기꾼! 이기주의자!”
“!?”
“어떻게 내 아기를 낙태시킬 생각을 해요? 군터, 당신은 잔인한 사람이에요.”
“그런 게 아니야.”
“그런 게 아니면 뭐죠? 여전히 우리 둘 사이에 누군가가 끼어드는 게 싫다고 말할 건가요?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요? 어떻게 사랑의 결정체를 방해꾼이라 여기냔 말이에요!”
“나는 아이보다 네가 더 소중하니까!”
군터도 버럭 소리를 질렀다. 절벽 끝에 서 있는 마리아를 보자 눈앞이 아찔해서 서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러니 어서 이 참담한 언쟁을 끝내야지.
“소중해서? 사랑하니까? 거짓말! 세상에 어떤 남자가 사랑하는 사람한테 이런 폭력을 휘두르죠? 제 의사와는 상관없이 몰래 낙태 약을 먹이려고 하다니. 당신 정말 최악이야!”
다른 이는 몰라도 군터는 제게 그러면 안 되는 거였다. 자신이 평소 세상 사람들에게 ‘석녀’라 불리며 얼마나 고통받았는지 또 절망했는지 가장 잘 알면서.
“그래, 알아. 무능한 나는 정말 최악이다. 그래도 궁으로 돌아가서 다시 이야기하자.”
군터는 고통스럽게 일그러진 얼굴로 마리아에게 말했다.
“싫어요! 당신이 납득할 만한 말을 해 줄 때까지는 여기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을 거예요. 저한테 아이를 포기하라고 강요한다면 당신이 보는 앞에서 저 밑으로 뛰어내릴 거라고요!”
“마리아! 제발!”
급기야 두 사람은 언성을 높이는 상황이 벌어졌다. 군터는 마리아를 향해 한 발짝 걸음을 떼려다가 그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으……. 윽!”
군터가 두 손으로 제 머리를 감싼 채 엎드려 고통스러워하자, 마리아는 흠칫 놀랐다. 군터는 눈앞의 모든 사물이 일렁이는 느낌과 함께 몸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마리아를 찾으려 그녀의 감정 색을 쫓아 이곳으로 오면서부터 갑자기 심장이 터질 듯이 답답하고 식은땀이 났다. 초조함을 넘어 검은 공포에 휩싸여 숨쉬기조차 힘들었다.
‘이곳은? 왜 너는 여기에 와 있는 거지?’
마리아가 알랑 세라두에 의해 죽을 뻔한 곳, 그녀를 구하지 못하는 바람에 절벽으로 떨어지는 그 참혹한 광경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당시에 느꼈던 절망과 고통이 고스란히 느껴지며 제 영혼을 아프게 난도질하는 것만 같았다. 군터는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못한 채 식은땀을 흘리며 괴로워했다.
“군터, 왜…… 그래요?”
절벽 끝에서 군터를 바라보던 마리아는 그의 이상 행동에 가슴이 내려앉았다. 평소 그는 무쇠처럼 강한 남자이건만, 어째서 저러는 걸까. 그녀는 한달음에 군터를 향해 뛰어갔다.
“허……억!”
군터가 식은땀을 흘리며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얼굴에 핏기라곤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창백했으며 오한이라도 느끼는 양 몸을 바들바들 떨었다. 마리아는 그 모습을 보며 사색이 되었다.
“내 얼굴을 봐요! 군터.”
아무리 그에게 말을 하며 안정시키려고 해도 군터는 아무 말도 들리지 않는 듯했다. 저 혼자 다른 세상에 있는 양 고통스러워했다. 그는 제 영혼의 지옥으로 남았던 그때로 돌아가 있었다. 두 번 다시 경험하고 싶지 않았던 그 순간이 자신에게 또 일어난 것이다.
지직! 군터가 잡은 레이스 옷깃이 찢어지기 시작했다. 군터는 그녀를 제대로 움켜잡으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위에서 받쳐 주는 힘이 여의치 않은지 몸을 움직이기 어려웠다.
지지직- 레이스는 더 거의 다 찢어져 떨어지기 직전까지 몰렸다.
[걱정하지 마. 나 너 안 놔.]
마리아는 울면서 고개를 격하게 끄덕였다. 순간 그의 이름을 불러 주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 지금이라면 왠지 말을 할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마리아는 어렵게 입을 뗐다. 한데 군터가 잡고 있던 레이스 옷깃이 다 찢어지며 두 사람의 운명이 완전히 갈렸다.
[……!]
소스라치게 놀라는 군터와 달리, 마리아는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한 듯 덤덤해 보였다.
[나를 놔요. 당신은 살아야 해요.]
이젠 자신을 포기하라는 마리아의 눈빛이 너무 슬펐다.
[마리아!]
자신을 부르는 군터에게 마리아는 화사하게 웃으며 소리쳤다.
[군터 플……레이슬리!]
[……!]
마리아가 아득히 멀어지기 전, 그녀의 얼굴이 말해 주었다. 드디어 모든 기억이 떠올랐노라고. 죽음을 앞둔 여자가 왜 그리도 예쁘게 웃던지.
[아…… 안 돼! 마리아!]
군터는 절규하며 손을 허우적거렸다. 어떻게든 그녀를 쫓아가려 발버둥을 쳤지만, 밧줄은 점점 위로 당겨졌다.
[놔! 이 새끼들아!]
그는 아이처럼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마리아를 불렀다. 제발, 그녀가 다시 제게 닿기를 원하며 오열했다.
“마리아, 죽으면 안 돼! 날 두고 가면 안 된단 말이다!”
군터의 광기는 점점 심해졌고, 마리아는 그제야 그가 왜 이렇게 고통스러워하는지 알게 되었다. 그에겐 이 절벽이 크나큰 상흔으로 남아서 다시는 상기하고 싶지 않은 곳인 모양이었다. 한데 자신이 그때와 같이 절벽 끝에 서 있으니, 마음 깊이 숨겨 놓았던 그날의 통증이 고스란히 되살아나 버린 것이다. 결국 제 행동이 그의 상처를 칼로 헤집은 꼴밖에는 안 됐다.
“군터, 우리 궁으로 가요.”
우선은 이곳에서 벗어나는 것이 시급했다. 그래야 군터가 숨이라도 제대로 쉴 터. 마리아는 말도 내버려 둔 채, 오로지 군터만 부축하여 절벽 밑으로 내려갔다. 내려가는 도중에도 군터는 두려움에 휩싸인 채 몸을 떨었으며 숨 쉬는 것도 힘들어 보였다. 마리아도 울부짖으며 있는 힘을 다해 그를 부축했다. 어서 그의 고통을 덜어 줘야지, 그러려면 이곳에서 아주 멀어지는 수밖에는 없다는 생각만 했다.
* * *
“꺄아악! 에론!”
모니카는 황궁으로 돌아온 후에도 매일 에로를 찾으며 괴로워했다. 그뿐인가, 졸지에 파혼까지 당했다. 평생 바라던 남자를 느지막이 만나 얼마나 행복했는데. 그가 사라진 자리가 너무 커서 버티기가 힘이 들었다. 아니, 사랑 때문에 죽는다는 사람들의 말이 이제야 이해가 됐다. 마침 찰스 대공이 꽃을 들고 모니카를 찾아왔다.
“모니카, 몸은 좀 어때?”
“나가, 이 불한당 새끼야!”
그녀는 찰스를 향해 손에 집히는 대로 던졌다. 저런 뻔뻔한 인간을 다 봤나. 제 약혼자를 그리해 놓고 어떻게 자신을 찾아와. 탐욕으로 번질대는 얼굴만 봐도 당장 욕지기가 날 것처럼 속이 좋지 않았다.
“애초에 그런 애송이랑 어울리지도 않았다고. 그러니 포기해. 그 가짜 왕자는 지금쯤 죽었을 거라고.”
“뭐? 죽……어? 에론이?”
모니카는 황망한 얼굴로 찰스를 바라보았다. 하긴 찰스의 사병들한테 심하게 폭행을 당하긴 했다.
“아아악!”
모니카는 비명을 지르며 찰스의 머리끄덩이를 잡았다.
“이거 놔! 얼마 안 되는 머리 다 빠진다고!”
두 사람은 우당탕 실랑이하다 찰스가 모니카를 겨우 제압했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모니카에게 소리쳤다.
“모니카, 나한테 잘 보여. 당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나는 다 알고 있으니까.”
“뭐?”
그제야 모니카의 머릿속에 황제의 인장이 떠올랐다. 자신이 인장을 밖으로 빼돌린 게 세상에 알려지면 선황후라고 해도 교수형을 면치 못할 텐데. 이런 중대한 사항은 헨리가 황제라도 막아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당장 귀족들이 가만있지 않을 터. 그래도 찰스의 여자가 되는 건 죽는 것보다 싫은데. 보기만 해도 혐오스러워서 소름이 끼치는 것을.
“그러니 나와 손잡는 게 좋을 거야. 막말로 낸시 아크만이 황후가 되어도 출신이 미천해서 그 아들이 황위를 잇기는 힘들다는 거, 잘 알잖아? 귀족들이 정통성을 걸고 넘어갈 거라고. 그러니 모니카와 내가 라스토니아를 지켜야지 않나?”
“지랄하고 있네.”
“뭐?”
“두고 봐, 에론은 반드시 살아서 돌아올 테니까. 우리가 얼마나 서로를 사랑하는지 당신은 몰라.”
모니카는 찰스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에론과 혼인하지 못하느니, 차라리 죽고 말지. 아니, 살 의미가 없었다.
* * *
마리아는 진정 약을 먹고 잠든 군터를 보고 나서야 안도했다. 정말이지, 어떻게 왕궁까지 왔는지……. 평지에 내려오니 마침 그가 타고 온 말이 있었다. 힘겹게 궁까지 도착하긴 했으나 군터의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마리아는 시종에게 군터를 맡기곤 스톤에게로 향했다. 이제 제게 진실을 이야기해 줄 사람은 낙태를 종용한 스톤밖에 없으니까.
“스톤.”
“기다렸어, 마리아.”
두 사람은 미리 약속이나 한 것처럼 마주 앉았다. 마리아는 그사이 더 늙어 버린 스톤의 모습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 그도 마음고생을 많이 한 것 같았다.
“진실을 말해 줘요.”
궁으로 오는 내내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군터는 어쩔 수 없이 제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애초에 군터는 우리의 아이를 방해꾼이라 여길 사람이 아니었다.
“감당할 수 있겠어?”
“제가 감당할 수 없는 건, 거짓과 기만이에요.”
마리아는 단호했다. 스톤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와도 어른답게 받아들이자 재차 마음먹었기에 놀라지 않을 준비가 되었다고 자신했다.
“마리아는 단명할 거야.”
“!?”
마리아는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마음의 준비를 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닌 것을.
“아기를 낳다가 죽을 운명이라고.”
스톤은 자신이 본 미래에 대해 상세하게 이야기해 주었다. 그리고 군터와 자신이 마리아에게 낙태를 권할 수밖에 없는 이유에 관해서도 말했다. 한데 마리아는 의외로 침착했다. 처음에는 놀라는가 싶더니, 이후부터는 스톤의 말에 별다른 감정의 동요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면 제가 아이를 포기하면 단명할 운명에서 벗어난다는 거군요?”
“그렇지.”
“그럴게요.”
“뭐?”
“아이를 포기할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