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황후 마리아-78화 (78/120)

78화

마리아는 석탑에 올라 동이 틀 때까지 서 있었다. 말을 못 할 적, 노라가 자신을 이곳으로 데려와 마음에 쌓인 울분을 터뜨리게 해 주었는데. 그런 날이 또 오게 될 줄은 몰랐다. 마리아는 아이를 포기하기로 했다. 저 자신이 죽으면 군터가 받게 될 상처가 얼마나 큰지 잘 알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도 일찍 죽고 싶지 않았다. 죽음은 두려운 거니까.

애초에 제겐 어머니의 삶은 허락되지 않은 것을. 제 부모님들이 베풀어 준 사랑을 저 자신도 자식에게 마음껏 해 주고 싶었건만. 한데 아이한테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 마리아는 두 손을 자신의 배 위에 댔다.

“미안하다, 아가야.”

말을 함과 동시에 감정이 북받쳤다. 기어이 눈물이 터져서 한동안 말을 잇기가 어려웠다. 임신했다는 것을 안 순간부터 언제쯤 품에 안아 볼 수 있을지 기다렸는데, 이렇게 작별 인사를 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엄마를 용서하지 마. 너를 만들어 놓고 세상에 나와 보지도 못하게 해서 미안해.”

마리아의 눈에서 눈물이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때 다시 엄마한테 찾아와 줄래?”

너무 염치없는 바람이라는 것을 알지만, 마리아는 간절하게 부탁했다. 그때는 많이 사랑하고 아껴 주는 엄마가 되어 주겠노라 약속했다.

“미안해, 정말 미안해.”

마리아는 와르르 무너져 버렸다. 그녀는 난간을 붙잡은 채 통곡했다. 어째서 제겐 평범한 삶이 허락되지 않는지 원망스러웠다. 정말 이 방법밖에는 없는 건지……. 그때 노라가 마리아의 어깨를 감싸 주었다. 마리아는 노라의 품에 기대어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노라는 어떠한 말로도 마리아를 위로하지 못했다. 그저 슬퍼하는 마리아를 곁에서 지켜 주는 것밖에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군터는요?”

마리아가 눈물을 닦으며 노라에게 물었다.

“깨어나셨습니다.”

“가 봐야겠어요.”

“예. 그러셔야죠.”

노라는 마리아를 부축하여 석탑을 내려갔다. 마리아는 계단을 하나씩 내려갈 때마다 다짐했다. 더는 울지 말자고, 제게 주어진 운명이라면 받아들이자고. 아직은 제게 소중한 사람이 있으니 그를 지켜야 했다.

군터도 얼마나 괴로울까. 항상 제 감정을 우선시한 탓에 그도 슬퍼하며 괴로워할 줄 아는 사람이란 것을 간과했다. 이제 보니 자신은 군터에게 무엇이든 받기만 했다. 그가 겪었을 고뇌에 대해선 진지하게 고민하지 못한 것에 자책감이 들었다.

“대왕님도 많이 괴로우실 겝니다.”

“그런데 나만 힘들다고 투정만 부렸어요.”

“투정이 아니죠. 왕비님은 모르셨잖아요.”

한데 마리아가 갑자기 계단에 멈춰 섰다. 그녀는 말없이 노라를 바라보며 상념에 젖었다.

“왕비님, 왜 저를 그리 빤히……?”

“노라의 아이들은 어떻게 됐어요?”

“예……? 아, 드디어 제가 몸값을 다 치렀습니다. 곧 헬랜드에 도착할 겝니다.”

“세 명 모두요?”

“예. 세 명 모두 살아 있어 줘서, 그 힘든 시간을 잘 버텨 줘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마리아는 노라한테서 이제껏 보지 못한 강인함을 느꼈다. 이게 바로 모정의 힘이란 것인가. 어떤 열악한 상황에서도 제 아이들을 지켜 내는 힘. 자신은 절대 할 수 없는 일을 노라는 기어이 해내고 말았다.

“노라는 강한 어머니예요.”

세상의 어머니는 다 강하다는 말은 틀렸다. 그렇지 못한 예도 있으니까.

* * *

헨리는 찰스의 말을 듣고 크게 놀랐다. 키르탄이라는 왕국이 없다니. 에론이 준 어음은 키르탄 왕국에서 발행했고 벨루이스에 있는 대륙 법원에서 공증을 한 것이다.

“지들끼리 왕국이라 하는 겁니다. 그러니 폐하께선 감쪽같이 속으신 거지요.”

“그래서 엄마를, 아니 어머니를 다시 황궁으로 데려다 놓으셨다는 겁니까?”

“예, 더는 라스토니아 황족이 비천한 것들에게 농락당해선 안 됩니다. 저는 황족으로서 두고 볼 수만은 없었습니다.”

찰스의 매서운 눈초리가 낸시에게로 향했다.

“그……럴 리가 없어요. 키르탄 왕자님께서 우리한테 피해를 준 건 없잖아요?”

낸시도 열심히 변명했다. 사실 왕자가 황실에 뿌린 돈이 얼만데, 만일 그가 사기꾼이었다면 목적이 있었을 터.

“왜 없습니까? 감히 선황후를 넘보지 않았습니까?”

“그건……!”

낸시가 반박하려다가 멈췄다. 역시 헨리도 어처구니없어하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아무래도 제 숙부가 자신을 바보 천지로 아는 모양이다. 키르탄에서 왕자가 왔다고 했을 때, 저라고 그의 뒷조사를 안 했을까. 부족에서 왕국이 된 지 얼마 안 되어 인지도가 낮아서 그런 거지, 틀림없이 존재하는 나라가 분명했다. 당장 제 손에도 1000만 골드의 어음이 있는 것을. 그것이 곧 증거였다. 그러나저러나 이참에 모니카 좀 멀리 보내려고 했더니……. 찰스 탓에 괜찮은 돈줄이 막혀 버렸다.

‘숙부께선 대체 왜 그러시는 거지?’

정말이지 알다가도 모를 노릇이었다.

‘왜 그러긴요? 황위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린 거지요.’

낸시는 말간 얼굴로 찰스를 보는 헨리가 답답했다. 저 같은 것도 찰스가 모니카를 도로 데려왔다는 말을 듣곤 바로 눈치를 챘건만. 앞으로 찰스 대공이 큰 걸림돌이 될 것이다.

‘스튜어트 공작가가 없으니 활개를 치는 거야.’

그동안은 재상이었던 제임스의 눈치를 봤었지만, 그를 따르는 세력이 없으니 찰스가 스멀스멀 야망을 드러내는 것이다. 그렇다면……!

‘설마 선황후와 혼인하고 싶은 건가?’

시녀들 말로는 찰스가 매일 모니카에게 꽃과 선물을 보낸다고 했다. 그제야 낸시는 정신이 퍼뜩 났다. 왜 잊고 있었을까. 자신이 황후가 되어 후손을 잇지 못하면 헨리와 자신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워진다는 것을. 아니 그 전에 찰스의 손에 반정이 일어나거나 헨리가 독살이라도 당한다면? 낸시의 심장에 감당하기 어려운 두려움이 밀어닥쳤다.

“저……는 이만 나가 볼게요. 선황후 전하께 가 봐야 할 것 같아요.”

“그렇게 해. 엄마, 아니 모후의 상심이 크실 테니, 낸시가 위로해 드려.”

“예, 폐하.”

낸시는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그런데 찰스가 왜 저렇게 당당한 걸까. 대체 무슨 큰 패를 쥐고 있길래. 왠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어떻게든 찰스 대공과 선황후가 이어지지 못하도록 해야 해.’

낸시는 모니카의 궁으로 향했다. 한데 그녀의 침실 문을 열기도 전에 안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마침내 낸시가 모습을 드러내자, 모니카가 슈미즈 차림으로 침대에서 뛰쳐나와 낸시의 손을 잡았다.

“낸시, 찰스 그 불한당이 에론을 반쯤 죽여 놨지 뭐야!”

“예? 에론 왕자님을요?”

‘젠장맞을, 일이 아주 더럽게 꼬여 가잖아.’

“낸시가 좀 연락을 취해 봐. 에론이 어떤지 말이야. 아니, 나랑 연락이 닿도록 해 줘. 응?”

“걱정하지 마세요, 선황후 전하. 제가 휴가 간 라모나한테 서신을 보낼게요.”

“정말? 고마워, 낸시.”

“그런데 말이에요. 혹시 찰스 대공에게 무슨 잘못 하신 일 같은 거, 있으세요? 약점을 잡혔다든지.”

낸시는 모니카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한데 모니카는 낸시의 질문에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아……니! 없어.”

제 입으로 어떻게 말해. 황제의 인장을 에론에게 주었노라고. 그랬다간 선황후고 뭐고 바로 교수형에 처해질 터. 그뿐인가? 헨리의 황위도 보장할 수가 없었다.

* * *

마리아는 긴장된 얼굴로 침실 안을 서성였다. 오늘이 군터와 약속한 그날이기 때문이다. 저 문이 열리면 군터가 모습을 드러내겠지만, 그의 손에는 낙태 약이 들려 있을 터. 사랑하는 남자가 주는 약을 먹고 사랑의 결정체를 죽여야 한다니. 그 괴로운 마음은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었다. 어디라도 도망칠 곳이 있다면 한순간에 사라지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문소리가 나고 군터가 나타났다.

“마리아.”

그의 얼굴도 어둡기는 마찬가지.

“군터.”

마리아는 심하게 긴장한 나머지 두 손을 맞잡은 채 그에게로 다가갔다. 그는 아무런 말 없이 그녀를 먼저 품에 안아 주었다. 굳이 구구절절 이야기하지 않아도 자신들에게 닥친 혹독한 운명은 되돌릴 길이 없기에 더는 말하지 않기로 했다.

“고통은 거의 없을 거라고 했다.”

임신 초기라서 약을 먹어도 월경하는 수준에서 끝날 터. 고통스러운 일은 조금이라도 빨리 끝내는 게 현명했다. 군터는 주저 없이 품에서 작은 약병을 꺼내 마리아에게 건넸다. 약병을 건네는 군터의 손도 받는 마리아의 손도 떨리기는 마찬가지.

마리아는 제 손에 들린 약병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 약을 먹으면 난 살 수 있어. 하지만 우리 아기는 영원히 볼 수 없겠지?’

이것이 정말 옳은 일인가. 그때 마리아의 귓가에 노라의 말이 환청처럼 들렸다.

[세 명 모두 살아 있어 줘서, 그 힘든 시간을 잘 버텨 줘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세상의 누구보다 강한 여자, 진짜 어머니의 모습 그 자체였다.

“마리아, 어서 마셔라.”

군터는 쓴 신음을 뱉어 내듯 말했다. 군터는 약병을 건네받고도 바라보기만 하는 마리아의 모습에 조바심이 났다. 이내 마리아는 약병의 뚜껑을 열었다.

많은 시간은 필요치 않다. 단 1초면 자신과 군터를 괴롭히는 혼란과 갈등을 잠재울 수 있다. 세상에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은 없으니 저 또한 그런 거라고 여기면 된다. 마리아는 줄곧 마음을 다졌다. 자신이 약을 먹는 것에 많은 의미를 부여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마리아는 마침내 약병을 입에 가져다 댔다. 한데 갑자기 스스로에게 의문이 생겼다. 군터가 노예라는 운명에 수긍했다면 지금 이런 사람이 되지 못했을 테지. 자신이 폐황후가 되고 계속 죽음을 고집했다면 삶에 대한 희망도 되찾지 못했을 터였다.

그럼 자신은 아이를 위해서 무얼 했지? 운명이라고 받아들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한 게 없었다. 순간 마리아는 불안한 마음이 가시고 봄바람 같은 안도감에 휩싸였다.

“군터.”

“응?”

“저, 약 못 먹어요. 아니, 안 먹어요.”

“뭐?”

마리아는 약병을 저 멀리 집어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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