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화
“다 끝난 얘기 아니었나?”
군터는 마리아가 던진 약병을 보며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백 번을 물어도 제겐 마리아가 가장 소중했다. 아이? 왜 원하지 않을까. 그녀의 말대로 사랑의 결정체인 것을. 그러나 마리아의 목숨과 맞바꿀 의향은 자신이 다시 태어나도 없을 것이다.
“우린 아이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지 않았어요.”
“뭐?”
“스톤이 신은 아니잖아요? 그 예언이 틀릴 수도 있어요. 아니, 설사 맞는다고 해도 지레 겁먹은 채 도망치고 싶지 않아요.”
“목숨이 걸린 문제야. 겁먹고 도망쳐야 옳다.”
그는 견고한 장벽처럼 마리아의 반론을 원천 봉쇄했다. 제 목에 칼이 들어와도 절대 양보하지 않겠다는 굳건한 표정을 지었다. 어떻게 그를 이해시켜야 할까. 이제 와서 스톤의 예언은 신빙성 없는 논리라며 반박하면 되레 역효과가 날 터.
마리아는 애달픈 얼굴로 군터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는 두 손으로 군터의 얼굴을 부드럽게 감싸며 속삭였다.
“붉은 머리에 청록빛 눈동자를 가진 아들일 수도 있어요. 아니면 저처럼 고지식해도 당신만 좋아하는 예쁜 딸일 수도 있단 말이에요.”
“!?”
“군터, 당신을 많이 사랑해요. 그래서 제겐 이 아이가 더 소중해서 포기가 안 돼요.”
기어이 마리아의 눈에서 굵은 눈물방울이 쉴 새 없이 흘렀다.
“세상에는 예정된 일도 있지만, 변수도 많아요. 사람들은 그걸 기적이라고 해요.”
“기적?”
“제가, 아니 우리가 아이를 함께 지켜야 해요. 네?”
“후!”
군터는 오열하는 마리아를 바라보며 비통하게 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기적만 믿고 목숨을 건다는 건, 무모한 짓이다.
“대륙을 다 뒤져서라도 실력 좋은 치유사, 약제사, 마법사, 산파를 구하는 거예요. 최선을 다해 저와 아이를 지키고 싶어요.”
아직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사실 마리아는 제 목숨을 걸고서라도 아이를 낳고 싶은 심정이었다. 차마 군터에게 그 말까진 하지 못할 뿐이지.
“군터, 저 자신 있어요.”
마리아는 울며 애원했다. 제발 우리의 아이를 포기하지 말아 달라고. 하지만 그의 얼굴은 점점 어두워질 뿐, 선뜻 마리아의 뜻에 동조하지 않았다. 그녀가 간절하게 매달릴수록 오히려 군터의 슬픔은 짙어졌다.
‘마리아, 너는 모른다. 내 인생에서 너를 빼면 나는 빈껍데기거든.’
죽어도 제 곁에 마리아가 없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마리아가 죽으면 이제까지 자신이 일군 인생이 통째로 부정당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우린 약한 부모가 아니에요.”
마리아는 격렬하게 도리질하며 울었다. 순간 군터는 마리아의 강한 의지에 제 마음을 억세게 죄고 있던 끈이 탁 풀리는 것만 같았다. 저 자신은 부모의 얼굴을 알지 못한다. 어렴풋이 기억은 나지만, 선명하진 않았다. 그렇게 어린 자식을 노예로 판 부모도 있건만, 아직 형태도 불분명한 태아를 위해 제 목숨을 바치려는 어미가 제 앞에 있으며, 그녀가 곧 자신의 아내였다. 이건 필시 신의 농간일 것이다.
“눈곱만큼의 가능성만 있다면 나도 포기하지 않아. 하지만…….”
마리아는 갑자기 손으로 군터의 입을 막았다. 그녀는 울면서 더는 말하지 말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내 마리아는 더 이상 울지 않았다. 되레 결연한 얼굴로 군터를 응시했다.
“군터 플레이슬리, 마리아가 죽으면 어떻게 할 거죠?”
그녀는 마치 남 이야기인 양 물으며 그의 입을 막았던 제 손을 치웠다.
“당신 곁에 마리아가 없다면 어떻게 할 거냔 말이에요?”
“가야지.”
“?”
“마리아 곁으로.”
“무슨 수로요?”
“세상의 모든 신, 아니 악마에게 내 영혼을 팔아서라도 마리아를 찾으러 갈 거다. 천국이든 지옥이든 상관없어.”
“믿어요.”
“뭐?”
남들은 허황하다 비웃는 말을, 마리아는 주저 없이 믿는다고 말했다. 그녀는 실제로 저보다 군터를 믿었다. 그렇기에 이번에는 자신이 그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군터, 마리아를 믿어 봐요. 마리아는 절대 사랑하는 남자를 두고 죽지 않아요. 설사 죽는다고 해도 다시 당신 곁으로 돌아오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거예요.”
결국 예언이나 정해진 운명에 따르지 말고 서로를 믿자는 말이었다. 또다시 원점, 아니 같이 도박을 해 보자는 무모함이었다. 한데 마리아의 결심이 왜 이렇게 미더운지 모르겠다. 반드시 이뤄질 것만 같은 느낌에 사로잡혔다. 위험한 유혹임을 뻔히 아는데도 어둡기만 했던 가슴 한편에 희망의 태양이 뜨는 양 밝아졌다.
마리아는 두 팔로 군터의 목을 감싸곤 말했다.
“나…… 당신 두고 절대 안 죽어요. 아니, 못 죽어요.”
흔들리는 청록빛 눈동자, 그는 아무런 말도 못 한 채 입술만 달싹거리다 그대로 마리아의 입술을 덮쳤다. 정말이지, 이제는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해졌다.
‘나도 너 죽게 안 놔둬.’
다 살거나, 죽더라도 갈 데까지 가 봐야지. 어쩌면 마리아가 임신했을 때부터 이런 결론이 정해진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고집이 아주 센 욕심쟁이니까.
* * *
스톤과 라모나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저 연신 눈을 끔뻑이며 군터와 마리아를 응시할 뿐. 그러다 스톤이 실소를 터뜨렸다.
“왜 웃지?”
되레 군터가 삐딱한 얼굴로 스톤을 노려봤다. 자신과 마리아의 결정이 우스운 건가? 아니면 철없다, 기막혀하는 걸까. 여하튼 신경이 예민해서 그런지 모든 게 거슬렸다.
“하긴, 그래야 마리아답지.”
스톤의 표정이 모호했다. 이미 이런 결과를 예상한 듯 보였으나 한편으론 씁쓸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스톤, 예언을 다시 해라.”
“뭐?”
“예언을 바꿔 보라고.”
‘무식한 놈 같으니.’
스톤은 차마 입 밖으로 말할 수 없어 고개만 저었다. 그때 마리아가 다가와 스톤의 손을 꼭 잡으며 부탁했다.
“스톤, 도와주세요. 저와 군터는 아이를 위해서 최선을 다하지 못했어요. 이렇게 저만 살겠다고 포기해 버리면 평생 괴로워할 거예요. 살아도 사는 게 아닌 삶, 죽어도 싫어요.”
스톤은 마리아의 간절함에 감동하여, 아니 질렸는지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다. 사실 마리아가 이렇게 나올 줄 예상은 했었다. 죽더라도 제 아이를 포기하지 않을 여자. 하지만 남겨질 군터는 어쩌라고…….
“염려 마세요. 스톤 님이 못 하시면 제가 반드시 왕비님을 살려 드릴게요.”
어느새 라모나가 분홍빛 머리를 나풀거리며 곁에 다가와 있었다. 그녀는 아주 말간 얼굴로 마리아를 보며 말했다.
“그러면 되겠네. 스톤이 못 하면 라모나가 하면 되겠어.”
군터는 큰 빌미라도 잡은 양 라모나 편을 들었다. 스톤은 군터와 라모나를 보며 황당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비로소 두 사람의 공통점을 찾아냈다.
‘무식하고 단순한 게 똑같아.’
그런데 라모나가 뜻밖의 말로 스톤을 놀라게 했다.
“이 땅의 정령이라면 지켜 주셔야죠.”
“!?”
순간 라모나의 보랏빛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이내 라모나와 스톤은 마치 눈싸움이라도 하는 양 서로를 노려보았다. 한데 두 사람에게 범접할 수 없는 강한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마치 정령들만의 대화를 하는 것 같달까.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라모나는 더 이상 예전의 약하고 가련한 존재가 아니었다. 그녀는 하루가 다르게 변화했다. 제 안에 있는 정령의 힘을 꺼내 단련한다더니, 가끔 사람을 볼 때 속을 훤히 꿰뚫는 것만 같았다.
‘스톤 님, 저를 쓰세요.’
‘라모나, 그런 말 함부로 하지 마라.’
‘진심이에요. 이분들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다 드릴 수 있어요.’
‘너를 쓴다고 해서 마리아의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보장은 없어.’
‘있을걸요? 스톤 님의 의지에 달려 있어요.’
라모나와 스톤은 둘만의 대화를 했다. 마리아와 군터의 눈에는 두 사람이 서로를 무섭게 노려보는 형세로 보일 터.
‘라모나, 네가 모르는 게 있다. 나는 그리 대단한 정령이 아니야. 인간의 수명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는 능력이 없어. 창피하지만 그게 진실이다.’
‘그럼, 지금부터 방법을 찾아봐요. 헤헤-’
감정의 정령이라서 그런지, 라모나는 하루에도 수많은 감정을 드러내며 상대를 혼란스럽게 한다. 인간보다 더 변화무쌍한 감정의 색을 보여 주는 건 놀랍지만, 앞으론 정령답게 조절할 수 있어야 할 텐데. 때마침 시종장이 찾아와 기쁜 소식을 전했다.
“대왕, 솔샤르 님께서 돌아오셨습니다.”
“!?”
모두 약속이나 한 것처럼 한달음에 방을 뛰쳐나갔다. 드디어 솔샤르와 에로가 헬랜드로 돌아오다니. 마리아도 한껏 웃고 있지만 서두르진 않았다. 막 나가려던 마리아의 팔을 스톤이 뒤에서 잡으며 걱정스러운 어조로 물었다.
“몸은 좀 어때? 불편한 데는 없고?”
“없어요. 걱정해 줘서 고마워요, 스톤.”
마침내 저 멀리 말을 타고 오는 두 사람이 보였다. 에로를 본 마리아는 감격에 겨워 잠시 신께 기도했다. 에로가 무사히 귀환할 수 있게 보살펴 주어서 감사하노라고. 에로도 마리아를 보았는지 환하게 웃었다. 마리아는 에로가 가까이 다가올수록 심장이 터질 듯이 기뻤다.
“에로!”
“왕비님!”
마리아는 에로가 말에서 내려 저를 향해 달려오는 모습을 보며 환하게 웃다가 점점 표정이 어두워졌다. 에로의 아름다운 얼굴이 엉망진창으로 망가졌기 때문이다.
“이게 무슨 일이야?”
마리아는 에로의 얼굴을 감싸며 놀라서 물었다.
“괜찮아요. 죽지 않고 살아서 돌아온 것만으로도 저는 만족해요.”
“그래도……. 이건.”
“왕비님, 제가 가져왔어요.”
“?”
에로는 품 안에서 벨벳 주머니를 꺼내더니 갑자기 마리아 앞에 부복했다.
“왕비님께 바칩니다.”
마리아는 에로의 두 손에 올려진 벨벳 주머니를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저 주머니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너무 잘 아는데, 갑자기 명치에서 뜨거운 불덩어리가 올라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것을 감동이라고 하는 건가.
“제가 가져왔어요. 라스토니아 황제의 인장.”
에로는 비장한 얼굴로 마리아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