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황후 마리아-80화 (80/120)

80화

마리아는 에로가 가져온 라스토니아 황실의 인장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이내 그녀는 드레스 자락을 슬며시 들더니 발로 인장을 천천히 지르밟았다.

“아……!”

마리아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탄성을 질렀다. 이 통쾌함을 어떻게 말로 표현할까. 온몸을 휩쓰는 시원함.

‘헨리, 너는 나라의 열쇠를 잃어버린 줄도 모르고 있겠지?’

그녀는 어리석은 헨리를 마음껏 비웃었다. 하지만 헨리를 마지막으로 남겨 둘 참이다. 복수에도 순서가 있는 법이니까. 마리아는 인장을 들곤 밖으로 나섰다. 곧 노라가 달려와 그녀와 나란히 걸음을 옮겼다.

“왕비님, 저도 돕겠습니다.”

노라도 마리아의 결정을 전해 들었는지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고마워요. 노라처럼 강한 어머니가 제 곁에 있어서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몰라요.”

“예, 그럼요. 저는 강한 어미가 맞습니다. 참, 저녁에 우리 아이들을 왕비님께 인사시켜도 될까요?”

“아이들이 도착했나요?”

“예, 대왕께서 도움을 주셔서 안전하게 올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해요. 그런데 나와 먼저 갈 곳이 있으니 라모나도 불러 줘요. 그리고 에로는……. 아직 안 되겠군요.”

에로는 스톤에게 며칠간 치유를 받아야 해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노라는 재빨리 라모나를 데리러 갔다. 얼마 뒤, 분홍 머리카락을 나풀거리며 라모나가 뛰어왔다.

“두 사람, 나와 갈 곳이 있어요.”

“?”

마리아는 노라와 라모나를 데리고 왕궁의 외곽으로 향했다. 정확히는 궁의 후문을 빠져나가야 했다. 걷기엔 꽤 먼 거리라서 마차를 타고 이동했다. 한 시간쯤 갔을까. 마차는 냄새가 지독한 돼지 농장 앞에서 멈춰 섰다.

“여기는?”

라모나가 먼저 알은체를 했다.

“맞아요. 로랑 세라두가 있는 곳이에요.”

마리아는 인장을 아무렇게나 든 채 돼지우리 쪽으로 향했다. 왕비가 나타나자 일하던 사람들이 모두 나와 그녀를 맞이했다. 마침 농장의 책임자가 마리아 일행을 로랑이 일하는 곳으로 안내했다.

“왕비님, 저기입니다.”

책임자가 안내한 곳은 농장에서도 외진 곳으로 냄새가 아주 지독했다. 이미 라모나와 노라는 손수건으로 자신들의 코와 입을 감싸 쥔 채였다. 마리아는 차가운 표정으로 로랑이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리고 마침내 작은 돼지우리 안에서 연신 삽으로 똥을 퍼내는 한 여자와 마주했다. 세상에서 가장 매력적인 여자라고 자부하던 로랑 세라두. 하지만 그곳에는 예전의 그녀는 존재하지 않았다.

“로랑.”

마리아가 감정 없는 어조로 그녀를 부르자, 일에 열중하던 로랑의 움직임이 일순간 멎었다. 오물 범벅이 된 로랑이 조심스레 뒤돌아섰다. 그리고 그녀는 제 앞에 있는 마리아와 마주했다. 그뿐인가, 그녀의 옆에는 라모나가 있었다.

“!”

로랑은 가슴을 들썩이며 흥분하기 시작했고 마리아와 라모나를 향해 괴성을 질렀다. 혀가 잘려 말을 할 수 없으니, 자신의 울분을 소리로 발산했다. 하지만 마리아는 조금의 동요 없이 침착했다. 되레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로랑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녀 앞에 인장을 보였다.

“이게 뭔 줄 아나? 모르겠지, 너 같은 일개 정부가 봤을 리 없을 테니까.”

“으에으……!”

로랑은 마리아를 향해 삽을 겨누며 강한 경계심을 드러냈다.

“이건 라스토니아 황실의 인장이야.”

“!”

마리아의 말에 로랑은 들고 있던 삽을 떨어뜨렸다. 그 정도로 한 국가의 인장은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 한데 어째서 마리아가 라스토니아의 인장을 들고 있는 걸까. 설마? 로랑은 라모나와 마리아를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역시 제 예상이 맞았다. 마리아는 가랑비처럼 복수를 하고 있는 것이다. 힘을 키워 해일처럼 들이닥쳐 단번에 쓸어버리는 거창한 복수가 아니라, 가뭄의 단비처럼 부슬부슬 내려 어느새 사람의 옷을 흠뻑 적셔 놓고야 마는 그런 복수를 하고 있을 터.

“아으아아악!”

로랑은 괴성을 지르며 다시 마리아에게 삽을 겨눴다.

“아직 반성하지 않았구나. 너희가 무얼 잘못했는지 말이야.”

이제라도 로랑이 진정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자비를 베풀 요량이었건만. 마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 인간의 생명을 그리고 인생을 쉽게 여기고 함부로 망가뜨린 죄, 그것이 얼마나 큰 죄악인지 여전히 깨닫지 못하다니. 그저 우매한 로랑이 안타까울 따름이었다.

“로랑, 너는 그저 내가 복수하기 위해 인장을 훔쳤다고 여기겠지?”

마리아의 말에 로랑의 얼굴에 반항심이 가득했다. 복수심이 아니고서야 함부로 라스토니아의 인장을 훔쳐 올 리 없으니까. 당연한 거, 아닌가.

“처음에는 그랬다. 나를 망가뜨리고 스튜어트가를 멸문한 사람들에게 복수하고 싶었어. 그것으로 끝이 아니야. 진실을 외면한 채 자신의 황후를 욕보인 제국민에게 천 배 만 배의 고통으로 갚아 주려고 했거든.”

“…….”

“많이 분하고 아프고 힘들 때는 그랬는데, 내가 점점 강해지고 나니 마음이 바뀌었어. 복수가 아니라 저들에게 정의에 대해 알려 주고 싶어졌어. 무엇이 옳은지 그른지, 바로잡고 싶어졌다.”

‘그래서 도둑처럼 인장을 훔쳤다는 거야?’

로랑은 마리아의 손에 들린 인장을 매섭게 쏘아봤다.

“이건 원래의 자리로 되돌려 놓을 거다. 인장을 가질 자격이 있는 사람이 나타날 때까지 기다려야 하겠지만.”

마리아의 말에 로랑은 괴상한 소리를 내며 웃었고 그건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조금도 동요하지 않았다.

“로랑, 너 스스로 지옥에서 빠져나오길 바란다.”

“!?”

로랑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자신을 지옥으로 밀어 넣은 사람이 누군데, 스스로 빠져나오라니.

“네가 깨닫기까진 오래 걸리겠지만, 반드시 해냈으면 좋겠구나.”

‘너의 죄를 진심으로 속죄하는 일.’

마리아가 그대로 돌아서자, 라모나와 노라가 그녀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마리아는 몇 걸음 떼지 않고 다시 멈춰 서더니, 로랑에게로 돌아갔다.

“로랑, 내가 아이를 가져 보니 알겠다.”

“!?”

마리아가 제 입으로 임신했다고 말하자 로랑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믿기 어렵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왜 바르게 살아야 하는지 말이야. 부모의 죄악은 고스란히 그 자식에게 이어질 테니까.”

‘너도 오래 걸리지 않았으면 해.’

마리아는 더는 로랑이 밉지 않았다. 누군가를 미워하는 건 결국 스스로를 해치는 일이니까.

* * *

마리아는 슈미즈 차림으로 거울 앞에 앉아 머리를 빗었다. 임신해서 그런지 몰라도 금색 머리카락이 반이 넘게 내려왔다. 아이를 낳을 때가 되면 완전한 금발로 되돌아갈 듯했다.

‘신기한 일이야. 아니지, 우리 아기가 엄마한테 준 선물이겠지?’

왠지 제 삶이 평화를 되찾고 있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마지막 복수가 끝나면 자신이 잃었던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을 터였다. 그때 거울에 제게로 다가오는 군터가 비쳤다. 그도 막 씻고 나왔는지 침의 차림이었다. 그는 마리아가 들고 있던 빗을 가져가 조심스레 그녀의 머리를 빗겨 주었다.

“고마워요, 제 뜻을 따라 줘서…….”

“약속은 지켜야 한다.”

“반드시 지킬 거예요.”

군터와 아이만 두고 죽는 일은 절대 없을 터. 이내 군터는 마리아의 어깨에 입을 맞췄다. 그의 뜨거운 숨결이 그녀의 목덜미와 어깨를 간질이며 두 사람은 주체할 수 없는 욕정에 휩싸였다.

“어쩌죠? 초기라서 자제해야 한다던데.”

“내가 말하지 않았나? 세상에는 아주 다양한 성행위가 있다고.”

“응?”

이미 마리아의 슈미즈가 벗겨진 채였다. 그녀는 군터가 입고 있는 가운의 끈을 잡곤 그를 침대로 이끌었다. 끈이 풀리며 군터의 몸을 감싸고 있던 붉은 비단 가운이 맥없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마리아는 침대에 옆으로 누운 채 손으로 배를 감쌌다. 이건 정말이지,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러자 군터는 마리아의 귓가에 야살스럽게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 너를 아프게 하지 않을 테니.”

제 귓가를 간질이는 그의 배려가 이미 마리아의 욕망에 불을 지폈다. 제 피부로 느껴지는 그의 탄탄한 근육. 마리아는 돌아서서 군터의 완벽한 몸을 쓰다듬었다.

“입덧은 가셨나?”

“이젠 안 해요.”

“그래, 그럼 할 수 있겠군.”

“내가 마음껏 예뻐해 줄게요.”

마리아는 천천히 밑으로 내려갔다. 그녀는 부풀어 오른 그의 욕망을 서서히 달래기 시작했다. 살랑이는 봄바람처럼, 때론 촉촉하게 내리는 비처럼.

“윽.”

그의 잇새에서 달뜬 신음이 새어 나왔다. 제 몸의 모든 신경이 허공으로 붕 뜨는 느낌. 이대로 제 살점이 녹아 버릴 것만 같아서 신음이 절로 나왔다. 하지만 그녀는 내내 봄바람처럼 살랑이지만은 않았다. 여름 소나기처럼 퍼부었다가 다독이길 반복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아이가 사탕을 물고 빨 듯이 어루만져 줄 때가 쾌감이 극대화되었다. 두 사람은 침대를 뒹굴며 서로의 몸을 마음껏 사랑해 주었다. 밤이 새도록.

* * *

라모나는 인편으로 온 서신을 읽으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궁을 떠날 적, 낸시가 제게 연락을 취할 수 있도록 믿을 만한 사람을 붙여 놓은 터였다.

“선황후가 에론 왕자를 걱정하고 있대요. 제발 만나게 해 달라고요.”

그녀는 마리아와 에로, 노라에게 서신의 내용을 알려 주었다.

“어떻게 답장을 쓸까요?”

라모나를 비롯한 모든 이가 마리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북서쪽에 소문이 파다하게 났다고 전해. 에론 티크 왕자가 죽었다고.”

마리아는 모니카에게 그녀의 인생에서 겪어 보지 못한 절망감을 선사할 생각이다. 마리아는 누구보다 모니카에 대해 잘 알고 있다. 나이는 많이 먹었지만 더불어 철도 없다는 것을. 그녀의 화려한 남성 편력에 가려져서 그렇지, 모니카는 이제껏 어떤 남자한테도 제대로 사랑받아 본 적이 없는 여자였다. 그래서 늘 자신의 몸과 마음을 사랑해 줄 남자를 찾곤 했다.

“왕비님, 그러면 제 할 일은 다 끝난 거예요?”

에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마리아에게 물었다. 왠지 일을 다 끝내지 않은 것처럼 뒤가 찜찜했다.

“에로, 굳이 무리하지 않아도 돼.”

“하지만 모두에게 보여 주고 싶어요.”

“뭐를 또 보여 주려고?”

노라가 혀를 차며 타박했다.

“제가 얼마나 대단한 연기력의 소유자인지 말이에요. 저, 이번에 확실하게 깨달았잖아요.”

“극단에라도 들어가려고?”

“그건 아니고요. 아, 나는 천생 연기자구나. 내 안에 무궁무진하게 다양한 자아가 존재하는구나, 말이에요.”

노라와 에로가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마리아는 웃으며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들의 실랑이가 마무리될 즈음 모두를 향해 말했다.

“헨리에게 서한이 왔어요.”

“네?”

마리아는 얼마 전 군터에게 건네받은 헨리의 서한을 모두에게 보여 주었다.

“우리는 곧 라스토니아로 갈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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