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화
모니카는 낸시에게 받은 서신을 읽으며 손을 파들파들 떨었다.
“믿……을 수 없어. 에론이 죽다니.”
“찰스 대공, 그분 정말 나쁜 분이세요. 어떻게 죄 없는 사람을 그렇게 무참히 죽일 수가 있어요?”
낸시는 모니카를 향해 울분을 토해 냈다. 제 유일한 돈줄이었으며 그럴싸한 인맥이었건만, 찰스가 모두 망쳐 놓고 말았다.
“알……았어. 그만 가 보도록 해, 낸시.”
모니카는 몸을 휘청거리며 일어나 창 쪽으로 향했다. 낸시는 제 예상보다 침착한 모니카의 모습에 적잖이 당황한 터였다. 울며불며 난리를 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낸시는 억장이 무너졌다. 정말이지, 이제는 돈 나올 구멍이 완전히 사라져 버렸다. 낸시가 나가고 모니카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울었다.
“에론!”
오십 평생, 자신을 유일하게 사랑해 준 남자였는데, 그렇게 허망하게 죽어 버리다니. 제겐 남들이 다 하는 사랑이란 건 허락되지 않는 모양이다. 에론과의 추억은 곧 한여름 밤의 꿈처럼 아련한 추억으로 남을 테지. 모니카는 더 이상 살고 싶지 않을 정도로 절망했다. 에론이 없는 제 인생은 상상해 보지 못한 것을. 그와 함께했던 몇 개월이 제 인생 전체를 아우를 만큼, 그의 빈자리는 컸다. 때마침, 불난 집에 부채질이라도 하듯 찰스가 평소처럼 꽃다발을 들고 찾아왔다.
“모니카, 오늘은 기분이 어때?”
“!?”
모니카는 찰스를 경멸에 찬 눈으로 바라봤다. 참, 낯짝도 두껍지. 제 약혼자를 무참히 죽여 놓고 저렇게 태연하게 굴다니. 정말이지, 역겨워서 봐 줄 수가 없었다. 아니, 더는 말조차 섞고 싶지 않았다.
“찾아오지 말라고 했지?”
“마무리는 지어야 하니까.”
“마무리?”
“우리의 재혼 말이야.”
“자꾸 그런 개뼈다귀 같은 소리 할 거야?”
모니카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마음 같아선 에론을 죽인 것처럼 똑같이 해 주고 싶었다. 개기름으로 번질대는 얼굴로 매일 재혼을 운운하는 꼴에 욕지기가 났다.
“나는 모니카와 혼인하고 싶어 죽을 지경이야.”
“아, 저 미친!”
모니카는 더 참지 못하고 달려가 찰스의 멱살을 잡아 흔들었다. 그녀는 괴성을 지르며 그에게 따졌다. 남의 약혼자를 죽인 것도 모자라, 어디 와서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이냐고 온갖 폭언을 퍼부었다. 그러자 찰스는 모니카를 거칠게 내동댕이치며 소리쳤다.
“나라를 팔아먹은 연놈 주제에. 나는 황족으로서 마땅히 할 일을 했을 뿐이야.”
“닥쳐!”
이내 찰스는 모니카에게 성큼 다가가 그녀의 턱을 억세게 거머쥐었다.
“되도록 빨리, 나와 재혼하는 게 좋을 거야. 단두대에 서고 싶지 않다면 말이야.”
“뭐?”
‘찰스가 내 뒤를 밟았나. 인장에 대해서 아는 것 같아.’
그전에는 찰스가 지레짐작하며 자신을 찔러 보는 거라 여겼다. 한데 이제야 확실해졌다. 찰스가 제게 이토록 당당한 이유를. 그러니 재혼하자고 아무렇지도 않게 협박하는 거겠지. 모니카는 가슴이 선뜩해지며 서서히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에론은 죽었어.’
문제는 그에게 주었던 인장을 되찾을 방법이 없다는 거였다. 그렇다고 낸시한테 말할 수도 없는 노릇. 그제야 확실해졌다.
‘아! 짜증 나! 저 미친놈이 내 목숨 줄을 쥐고 있어.’
모니카는 찰스를 보며 속으로 되뇌었다.
* * *
헨리는 헬랜드의 사신이 가져온 서한을 보며 표정이 얼음장처럼 싸늘해졌다. 종이를 펼치자, 눈에 익은 글씨체가 한눈에 들어온 탓이다. 정갈하고 교양 있는 문체, 10년간 눈에 박히듯이 봐 왔던 글씨체였다. 쿵쿵! 순간 헨리의 심장이 마구 요동치기 시작했다. 왠지 처음 마리아와 연애편지를 주고받을 때로 돌아간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동시에 기분이 심하게 우울해졌다. 어째서 마리아와 이렇게 서한을 주고받는 사이가 되었는지. 그녀는 언제나 제 곁에 있었건만.
[이혼해 줘.]
[이혼은 안 됩니다. 저……. 아직 젊어요.]
그래, 마리아는 아직 젊고 아름다운 것을. 이내 헨리는 거칠게 도리질했다. 잠시 마리아의 글씨를 보곤 감정이 말랑해진 듯했다. 그는 한없이 약해진 스스로에게 넌더리를 쳤다. 이제는 되돌릴 수 없는 사이인 것을. 마침 낸시가 다과를 가지고 집무실로 들어왔다.
“폐하.”
“낸시, 그러잖아도 목이 말랐는데 잘됐네.”
낸시는 창백해진 헨리의 얼굴을 보곤 표정이 굳어졌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그가 저토록 경직되었을까. 하지만 겉으로 티는 내지 않았다. 오히려 그에게 향긋한 차를 건네며 미소를 지었다.
“헬랜드에서 답신이 왔어.”
“네……? 그랬군요.”
“마리아가 직접 써서 보냈더군.”
‘그래서 그런 애틋한 얼굴을 한 거였어?’
굳이 애틋할 이유가 있나. 제 손으로 폐위한 것도 모자라, 그녀의 가문도 멸문시켰으면서……. 마리아 스튜어트라면 지긋지긋하다고 치를 떨던 헨리 코부르크는 어디에 간 거지?
“뭐라고 쓰여 있는데요?”
“오겠대.”
“네?”
왜 오려는 거지, 대충 위자료만 주고 서로 안 보는 게 현명할 텐데. 마리아도 군터와 재혼한 마당에 헨리를 만나야 할 이유가 무에 있다고. 신하들을 시켜 이혼 절차만 마무리하면 될 것을. 무엇보다 군터가 허락했을 리가 없는데. 그사이에 마리아한테 완전히 빠져 버린 건가. 하긴 군터는 예전부터 마리아를 무슨 여신이라도 되는 양 바라보곤 했으니까.
“1000만 골드를 군터 그 작자의 얼굴에 던져 주고 내 볼모를 돌려 달라고 해야지.”
“폐하!”
낸시는 헨리의 속내를 알다가도 모르겠다. 변덕이 심한 남자라는 건 알지만, 그게 가능하다고 믿는 걸까. 군터 앞에서 절절매며 겁을 내는 주제에. 한데 낸시는 헨리의 변한 눈빛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예전에는 마리아의 얘기가 나오면 날카롭게 번뜩이던 눈동자가 이젠 아련해 보였다. 착각일까. 아니면 지나친 염려일까.
“낸시, 걱정하지 마. 보란 듯이 너를 황후로 맞이할 테니까.”
“!?”
그제야 낸시는 참고 있던 눈물을 터뜨렸다. 매일 살얼음판을 걷듯이 조마조마했다. 혹여 헨리에게 버려질까 봐. 한데 그가 이렇게 자신을 인정해 주니 그간의 설움이 단번에 날아갔다.
“1000만 골드를 아무나 구해 오진 못하니까. 너의 공이 크다는 거, 짐도 안다. 그리고 그런 너를 짐은 외면하지 않을 거다.”
헨리는 낸시의 손을 꼭 잡아 주며 그녀를 안심시켰다. 차라리 잘되었지, 뒷배가 없는 황후가 다루기는 훨씬 쉬운 법이다. 적어도 황제를 업신여기진 못할 테니까.
* * *
군터는 마리아를 자신의 무릎에서 내려놓지 않았다.
“마리아, 이젠 꽤 묵직한데?”
“정말이요? 벌써 5개월이잖아요.”
마리아가 살짝 나온 제 배를 쓰다듬으며 웃었다. 군터도 더는 마리아의 임신에 대해 불안해하지 않았다. 되레 그녀와 함께 기쁜 마음을 나누며 순간순간을 즐기는 듯했다.
“곧 라스토니아에 가야 하는데 괜찮겠나?”
군터는 마리아의 오랜 여행이 걱정됐다. 마차를 타고 아주 멀리 가야 하니까.
“당신이 곁에 있다면 지옥 길도 두렵지 않아요.”
“미치겠다, 너 때문에.”
군터는 예쁜 말만 골라 하는 마리아를 그냥 둘 수가 없어 그대로 입 맞추고 말았다. 그때 누군가가 문 쪽에서 크게 인기척을 냈다.
“험험!”
노라와 그녀의 셋째 딸, 아멜리였다. 진즉에 인사를 나누었지만, 며칠 전 노라의 딸 아멜리가 반드시 대왕 부부를 만나서 할 말이 있다고 하여 자리를 마련했다.
“어서 와요. 노라, 아멜리.”
마리아가 당혹스러워하는데도 군터는 마리아를 제 무릎에서 내려놓지 않을 태세였다.
“대왕님, 제발요?”
“노라한테는 눈치 안 봐도 된다.”
“그럼요, 그럼요 마음껏 안고 계시지요.”
노라가 넉살 좋게 웃어 주자, 군터는 자신의 무릎에 마리아를 제대로 앉혔다. 하지만 마리아는 아멜리의 눈치가 보였다. 그래도 명색이 일국의 왕과 비인데, 너무 가벼운 모습만 보여 주는 건 아닌지 신경이 쓰였다. 한데 군터의 고집을 어찌 꺾을까.
“아멜리가 내게 용건이 있다고요?”
마리아는 점잖은 목소리로 물었다. 그녀는 노라처럼 몸집이 통통한 아멜리를 흐뭇하게 바라봤다. 어쩌면 노라와 이다지도 똑같이 생겼을까. 제 아이도 그럴까. 군터나 저를 많이 닮았을 테지. 찰나였으나 온갖 상상을 다 했다.
“저는 운이 좋아서 노예로 팔려 갔어도 좋은 분을 주인으로 만났어요. 혹시 치유사 라이언 더프라는 분을 아세요? 대륙에서 아주 유명한 분이신데.”
“들어 봤어요. 한데 아멜리가 그 사람 밑에 있었던 거예요?”
“네.”
아멜리는 라이언의 밑에서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그간의 일을 상세하게 이야기했다. 더불어 그가 아주 많은 병자를 살렸다는 말을 강조했다. 어떤 지독한 병일지라도 라이언에게 가면 낫는다고 말했다. 그 말에 마리아와 군터는 크게 놀란 얼굴로 아멜리의 말에 집중했다.
“대체 그분의 의술이 어떻기에?”
“음, 그분은 늘 새로운 약과 치료 방법을 연구하세요. 그런 다음에 그분만의 치료 방식으로 병자를 치료하십니다.”
“그분만의 치료 방식? 그게 뭐죠?”
마리아는 심장이 두근거렸다. 한데 저보다 더 크게 쿵쾅거리는 군터의 심장 소리에 긴장감이 더 커졌다. 혹여 헬랜드가 획기적인 치료법을 보유하게 되는 걸까.
“사람에겐 체질이란 게 있어서 병의 원인도 발병도 사망도 제각기라고 하셨어요.”
“체질이 뭐지? 사람은 겉모습이 다를 뿐이지, 속은 다 똑같은 거 아닌가?”
군터가 대번 의구심을 나타냈다. 왠지 듣다 보니, 아멜리가 말하는 의사가 보통 사람은 아니라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끔 사람들이 상상할 수도 없는 방식으로 병을 치료하시거든요.”
“상상할 수도 없는 방식?”
아멜리의 말에 마리아를 비롯한 군터와 심지어 노라까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런 방식으로 많은 병자를 살렸다면 크게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분이 현재 곤란한 처지에 처하셨어요.”
“곤란한 처지?”
“종교재판에 넘겨지셔서 도망자 신세가 되셨어요.”
잠시 적막이 흘렀다. 종교재판이라면 교황이 내세우는 교리에 어긋나는 행위를 했다는 것인데……. 왠지 그냥 넘길 일이 아닌 듯싶었다. 리베리오가 묵인할 수 없는, 상상할 수도 없는 치료 방식이 대체 무엇이기에.
“대왕님 그리고 왕비님. 실은 라이언 더프 치유사님이 헬랜드에 숨어 계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