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마리아는 아멜리에게 무어라 말해야 할지 난감했다. 리베리오는 살아 있는 현자라 칭할 정도로 관대한 존재였다. 사적으론 스튜어트 가문 사람이기도 했다. 한데 성품 좋은 리베리오가 종교재판에 회부할 정도였다면 라이언 더프에게 큰 문제가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허무맹랑하거나 괴기스러운 치료법으로 교리를 거스르려 했을 터.
“그 치유사가 나의 땅에 숨어 있다?”
고뇌하는 마리아 대신 군터가 아멜리에게 재확인했다. 이내 그는 아주 명쾌하게 해답을 찾아 주었다.
“우선 내 허락이 있을 때까지, 그자의 모든 치료 행위를 금한다. 그것만 잘 지켜 주면 헬랜드에서 쫓겨나는 일은 없을 거다.”
군터는 라이언 더프를 내쫓지 않을 생각이다. 사실 저조차 대륙 전체가 신봉하는 종교를 섬기지 않는다. 물론 리베리오라는 교황을 좋아하긴 해도 그들의 종교를 헬랜드로 가져와 국교로 삼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세상에 어떤 종교도 옳다고만은 할 수 없으니까. 하지만 교황 리베리오를 존경한다. 그리고 존중한다. 그렇기에 그가 행하는 일은 어느 정도 이해하려 노력하는 편이다.
“정말이세요, 대왕님?”
아멜리는 반색하며 대답했다. 그리고 마리아도 군터의 그런 결정이 옳다고 여겼다. 에이든을 비롯한 여러 사람의 도움으로 근래에 지식인들이 대거 헬랜드로 이주해 오는 상황. 사실 라이언 더프는 한때 천재 치유사로 이름을 날린 사람이었다. 종교재판에 회부된 속사정은 알 수 없으나 매몰차게 내치고 싶진 않았다.
“단, 나의 명을 어기고 마음대로 치료 행위를 했다간, 종교재판에 넘겨지기도 전에 내 손에 목이 달아날 거다.”
“!?”
내내 인자하기만 하던 군터가 으름장을 놓자 아멜리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뒷걸음질 쳤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심하게 겁을 먹었는지 사시나무처럼 떨며 노라한테 착 달라붙었다.
“군터.”
마리아는 무슨 말이든 무섭게 하는 그의 어법을 질책했다. 그때 아멜리가 울면서 군터 앞에 조금 더 다가오며 말했다.
“실은 라이언 더프 치유사님은 제 남편이에요.”
“남편이요?”
“아, 남……편.”
미리 말을 하지. 군터가 멋쩍은 얼굴로 시선을 먼 곳으로 돌렸다. 노예로 끌려가 주인과 사랑하여 혼인까지 하다니. 그런 경우는 정말 드문 편인데.
“왕비님, 염려 마세요. 제가 먼저 만나 봤는데 그렇게 경솔한 사람은 아니었어요.”
보다 못한 노라가 군터와 마리아의 우려를 잠재우려 노력했다.
“알겠어요. 그건 그렇고, 라스토니아로 떠날 채비는 다 했나요?”
“예, 챙겨 갈 짐과 동행할 시종과 시녀는 제가 선별해 놨습니다.”
“노라, 시종장과 협의해서 가장 화려하게 준비해.”
군터는 마리아가 헬랜드의 왕비임을 저들에게 제대로 인식시켜 주고 싶었다. 왜냐하면 자신들의 방문 시기에 헨리가 낸시와의 국혼식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뿐인가, 여봐란듯이 연회도 열겠지. 그쪽에서도 자신들이 건재함을 과시하고 싶다는 것일 터. 그리되면 대륙 모든 나라의 귀빈들이 참석할 테니, 이참에 마리아와 헨리의 이혼을 마무리한 뒤, 헬랜드의 존엄을 보여 줄 계획이다. 그때였다. 라모나가 뜻밖의 소식을 가지고 찾아왔다.
“낸시, 그 여자한테 인편으로 서신이 또 도착했어요.”
“그래요?”
낸시라는 이름만 들어도 마리아의 표정이 바짝 굳어졌다. 지난번에는 모니카의 성화에 에로에 관한 소식을 물어 오더니, 이번에는 무슨 일이지? 굳이 낸시가 쓴 글자를 보고 싶지 않아서 라모나에게 내용을 물었다.
“모니카 선황후가 찰스 대공과 재혼한대요.”
“!?”
“그 전에 에로 왕자가 진짜 죽었는지 한 번만 더 확인해 달래요.”
마리아는 환호성을 지를 뻔했으나 간신히 참았다. 모니카가 찰스와 재혼한다?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복수의 반은 성공한 셈이었다. 모니카가 평소 찰스를 얼마나 싫어했는지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또한 이 혼인이 얼마나 불행해질지 눈에 훤했다. 그때 군터가 마리아의 귓가에 속삭였다.
“죽은 줄 알았던 에론 왕자가 갑자기 나타나면 다들 얼마나 놀랄까?”
마리아는 대답 대신 우아한 미소로 갈음했다. 그러나 그녀의 미소 끝에는 모니카를 향한 날 선 복수심이 스며 있었다.
[그러고 보면 황후는 참 염치도 없어. 애도 못 낳는 석녀 주제에 제 아비의 권세만 믿고 기세등등하니 말이야. ……저런 독종 같으니라고, 황실의 유일한 후손이 사생아가 되든 말든 제 집안의 권세만 탐하는 꼴이라니. 이제 이 병신이 말도 못 하는 거야? 아주 쓸데가 없어.]
마리아는 모니카의 말로가 정말이지 기대됐다. 모니카가 절망할 때는 어떤 표정을 지을지……. 마리아의 꽉 쥔 주먹 위로 심줄이 도드라졌다.
* * *
군터와 마리아가 라스토니아로 떠나기 전, 스톤은 겨울잠 준비를 시작했다. 짧으면 석 달, 길면 다섯 달간 기나긴 잠을 자게 된다.
“스톤, 이번에 다시 애가 되면 곤란하다. 아니, 여기서 더 늙으면 수발들기 곤란해.”
군터와 솔샤르가 스톤을 보며 웃었다.
“그거야 모르지, 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라서.”
스톤은 라모나가 건넨 차를 호호 불어 가며 마셨다. 주름진 입으로 차 한 모금 마시는 것조차 힘겨워 보였다. 하지만 몇 달 후에는 그가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지 궁금했다.
“모습이 변해요?”
라모나가 신기하다는 얼굴로 모두에게 물었다. 하긴 그녀는 스톤이 노인이 된 모습만 보았으니까.
“그래, 정령은 겨울잠을 잘 때마다 모습이 달라져.”
솔샤르가 매우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스톤 님, 저는 안 자요?”
“정령이라고 해서 다 같은 건 아니다. 그리고 넌 혼혈이잖아. 내가 겨울잠을 자는 동안 내 준 숙제나 착실히 해 놔라.”
스톤은 탁자 위에 탑처럼 쌓인 마도서를 눈으로 가리켰다.
“대왕, 설마 스톤이 이번에는 여자로 변하는 거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겠다. 흠, 스톤이 여자라……. 상상만 해도.”
군터가 일그러진 얼굴로 도리질했다.
“버르장머리 없는 것들! 어른을 놀려?”
스톤은 짓궂게 농담하는 군터와 솔샤르에게 버럭 화를 내곤 목에 사레가 들렸는지 심하게 기침했다. 이내 군터가 주위를 살피더니 정색했다.
“모두 나가라. 스톤과 따로 할 이야기가 있거든.”
“예.”
솔샤르와 라모나는 재빨리 자리를 피해 주었다. 그리고 어느새 군터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사라진 뒤였다. 자칫 스톤은 마리아의 출산을 지켜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러니 군터의 불안감이 커졌을 터.
그는 스톤에게 천천히 다가가선 털썩 무릎을 꿇었다. 스톤은 군터답지 않은 행동이 당혹스럽기만 했다.
“뭐…… 하는 게야?”
스톤은 군터와 오랜 세월을 보내 왔지만, 이런 모습을 처음 접했다. 오만한 군터 플레이슬리가 제게 무릎을 꿇다니. 처음 이 땅의 주인인 자신과 마주했을 때도 마치 자신이 주인인 양 당당했던 그였건만.
“스톤, 부탁한다.”
“!?”
“내 수명을 잘라서라도 마리아에게 주고 싶다. 그러니 방법을 찾아 다오.”
군터의 말에 스톤은 한동안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그러더니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마리아가 죽으면 따라 죽기라도 하겠다는 게야?”
“…….”
그는 딱히 대꾸하진 않았으나, 마리아의 간절한 부탁을 허락한 데는 그만한 결심이 있었던 듯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가 정해진 시간을 기다리며 태연할 수는 없을 터.
“이렇게 무릎 꿇지 않아도 찾아볼 거야.”
“고맙다.”
“하지만 무슨 일이든 변수는 있기 마련이야. 나도 예언을 하긴 했지만 그게 정확하다고 보장은 못 해. 그러니 너무 절망하지 마라. 누차 말하지만, 정령은 신이 아니야. 인간보다 좀 더 영적인 존재일 뿐이지.”
“변수라…….”
사람들은 그걸 기적이라고 한다지. 그 기적이 마리아에게도 일어났으면 좋으련만.
“군터, 한 가지는 확실해. 모든 일이 정해진 운명대로 흘러가지만은 않아. 그리고 그 운명을 거스르는 존재들이 인간이지. 어느 때는 인간의 의지와 무모함이 운명을 바꾸기도 해. 버려진 땅, 헬랜드를 군터가 일군 것처럼 말이지.”
* * *
마리아는 슈미즈 차림으로 전신 거울 앞에 섰다. 마침 노라가 시녀들을 이끌고 안으로 들어섰다.
“완성된 건가요?”
“예, 왕비님.”
노라는 몇 날 며칠 시녀들을 데리고 드레스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그녀는 마리아가 어느 황실의 여자들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만큼 아름답기를 바랐다. 하지만 몸을 억세게 조이거나 불편한 드레스는 안 되기에 단순하면서도 화려한 드레스를 만들려 노력했다. 해서 코르셋을 없애고 치마도 과하게 부풀리지 않았다. 혹여 배 속의 아이가 힘들어할까 봐.
시녀들은 마리아에게 몸의 곡선을 타고 흐르는 드레스를 입혀 주었다. 이제껏 누구도 입지 않은 파격적인 드레스였다. 어찌 보면 노골적으로 몸의 선을 드러내 상스러워 보일 수도 있으나, 노라는 최고급의 원단과 장신구를 써서 고급스럽고 우아한 드레스를 만들어 냈다.
“노라, 드레스가 너무 예뻐요.”
마리아는 드레스를 보곤 황홀한 표정을 지었다.
“아이구, 다행입니다. 혹여나 마음에 안 드실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그럴 리가요. 마음에 쏙 들어요. 몸도 편하고요.”
“그건 그렇고, 겨우 5개월인데 배가 작지 않네요.”
“그래요?”
마리아는 붉은 양단에 황금색 장식을 덧댄 드레스를 흡족하게 바라봤다. 누가 보아도 이건 황후의 색이었다. 게다가 머리카락도 완전하게 금발로 돌아와서, 예전의 마리아 스튜어트의 모습 그대로였다.
“노라도 시녀장에 맞도록 갖춰 입으세요.”
마리아는 매일 노라에게 황실의 예법에 관해 가르쳤다. 아주 작은 예절부터 소소하게는 차를 마실 때 약지를 살짝 올려 주는 것까지.
“예, 실은 저도 어릴 적에는 큰 극단에 들어가 배우가 되고 싶었지요.”
“어머머! 나한테는 그렇게 타박을 하더니?”
곁에서 보고 있던 에로가 크게 한 건 잡은 양 노라를 놀렸다.
“두고 봐. 이번엔 내 차례니까. 내가 귀부인 역할을 얼마나 잘해 내는지……!”
노라는 에로를 향해 으쓱댔다. 때마침 마리아는 노라를 향해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귀부인 역할이 아니라, 노라는 이제부턴 진짜 귀부인이에요. 헬랜드 왕비의 시녀장이잖아요.”
“예? 제……가 귀부인이라고요?”
“연기가 아닌 실제로 헬랜드의 귀부인이 되어야 해요.”
“예, 예. 그렇죠.”
노라는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로 마리아와 환하게 웃는 에로를 번갈아 보다가 끝내 눈물을 보였다. 그때였다. 마리아는 갑자기 사색이 되어 허리를 굽혔다.
“아!”
마리아는 제 배를 움켜쥔 채 크게 소리를 냈다.
“왕비님!”
에로와 노라가 화들짝 놀라 소리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