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마리아가 놀라서 고개를 드는 찰나, 군터와 정면으로 마주쳤다. 그는 창백해진 얼굴로 한달음에 마리아를 향해 걸어왔다.
“아픈가?”
“아……뇨. 움직였어요.”
“뭐가 움직여?”
“아이요. 제 배 속의 아이.”
“태동이네요!”
노라가 반색하며 소리치자, 에로는 감격에 겨워 합장했다.
사실 4개월 후반부터 아주 미세한 느낌이 있긴 했는데 저조차 그것이 태동인지 알지 못했다. 솔직히 긴가민가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깜짝 놀랄 정도로 태동이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소리를 낼 만큼.
“대왕님, 왕비님의 배에 손을 대 보세요.”
노라의 재촉에 군터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천천히 마리아의 배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때 배 속의 아이도 누군가의 기척을 느꼈는지 발길질을 했다.
“움직였다!”
군터는 세상 신기한 얼굴로 마리아를 바라봤다. 이제야 그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이 제대로 실감이 났다. 저 작은 배 속에 제 아이가 있음을 알게 되니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신기해하는 부부를 두고 노라와 에로는 눈치껏 자리를 비워 주었다.
“봐요, 우리 아이는 이렇게 살아 있어요. 제 배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단 말이에요.”
마리아는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흘렸다. 낙태 약을 먹어 아이를 포기했다면 이런 희열을 느껴 보지 못했을 터. 그랬다면 살면서 얼마나 아쉬웠을까.
“그러게.”
“군터한테 알려 주고 싶었어요.”
“내게?”
“가족이 얼마나 큰 의미인지 말이에요.”
부모에게 사랑받으며 자라, 고스란히 돌려주는 것. 가족이라는 울타리 내의 끈끈한 연대와 소속감. 무한한 사랑과 무엇이든 버텨 낼 수 있는 힘. 태어나 가족의 보살핌을 제대로 받아 보지 못한 군터에게 반드시 느끼게 해 주고 싶었다. 자식으로 인해 삶이 얼마나 충만해질 수 있는지 말이다. 때론 힘들지만 세상에 혼자가 아님을 아는 것. 어려운 일이 닥쳐도 가족이 주는 힘으로 헤쳐 나갈 수 있음을 그가 알았으면 했다.
“이미 마리아가 내 가족이다.”
군터는 마리아가 제게 무얼 알려 주려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그녀라는 존재가 이미 제겐 충만한 행복이었다. 한데 마리아만큼 소중한 존재가 한 명 더 생겼다니. 자신이 지켜야 할 사람이 늘어났다. 이런 일거리라면 기꺼이 나서서 할 터. 군터는 마리아의 배에 연신 입 맞추곤 조심스레 얼굴을 가져다 댔다. 누군가가 제게 살면서 언제가 가장 행복했느냐 묻는다면, 현재까지는 바로 이 순간이라 바로 답할 수 있었다. 마리아는 그대로 주저앉아 군터의 붉은 머리에 얼굴을 묻었다.
* * *
모니카와 찰스는 간략하게 혼인식을 치렀다. 굳이 내빈은 필요 없다고 해서 혼인 서약을 증명할 주교와 헨리, 낸시만 자리했다. 모니카는 영혼이 반쯤 나간 양 무표정이었고, 찰스의 눈에는 총기가 가득했다.
“어차피 저렇게 될 거였다면 진즉에 이어 드릴 걸 그랬어.”
헨리가 흡족한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 모습에 낸시는 잠시 상념에 잠겼다.
‘모르는 건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거야.’
선황후의 재혼에 헨리가 이토록 천진무구한 얼굴로 좋아할 일이 아니었다. 자신이 황후가 되어 후손을 잇지 못하면 찰스는 황위에 좀 더 가까워지는 것을. 정적이 바로 숙부임을 왜 인지하지 못하는 걸까.
“우리 숙부님은 엄마를 잘 보살펴 줄 거야.”
헨리의 말에 낸시는 왠지 불길함을 느꼈다. 자신이 아는 한 모니카가 쉽사리 찰스 대공과 재혼할 리 없었다. 아무리 에론 왕자가 죽었다 해도 그렇지, 차라리 다른 젊은 남자를 곁에 둘 여자인 것을.
‘약점이라도 잡혔나.’
왜 이렇게도 가슴이 시끄러운지 모르겠다. 곧 자신은 황후에 책봉되어 그토록 바라던 헨리와 국혼도 치르는데, 어째서 불안함이 더 큰지……. 낸시는 그 근본적인 이유를 어렵지 않게 찾았다.
‘마리아가 돌아올 거니까.’
한때는 제 윗전이었고 라스토니아의 황후였던 마리아 스튜어트가 헨리를 만나러 올 거란 사실이 내내 제 속을 불편하게 한 것이다. 낸시는 흘깃 헨리를 바라봤다.
‘설마 마리아한테 흔들리진 않겠지.’
그토록 아꼈던 로랑이 헬랜드로 잡혀가는데도 제 목숨 보전이 먼저라고 몸을 사렸던 남자였다. 그 이후에도 로랑의 소식조차 물어보지 않았다. 그러니 마리아도 마찬가지겠지. 제 손으로 그 지경을 만들어 놓은 여자한테 흔들린다면 그건 정상이 아닐 터.
‘낸시, 불안해할 필요 없어. 당당하게 굴어. 너는 곧 라스토니아의 황후가 될 거라고.’
낸시는 연신 스스로를 다독였다. 더는 마리아의 시녀가 아닌,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동등한 관계였다. 아니, 어찌 보면 자신은 제국의 황후이니 작은 왕국의 왕비보다는 신분이 높은 것일지도 모른다. 물론 경제적인 면에선 한참 떨어지지만, 텅 빈 금고야 차차 채워 나가면 될 터.
식이 거의 끝날 무렵, 식장 문 앞이 소란했다. 진한 향신료 냄새와 메마른 모래 냄새, 그리고 공기를 무겁게 가라앉히는 살기가 느껴졌다. 헨리의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감히 누가 성스러운 혼인식에 함부로 난입한단 말인가.
하지만 문 앞을 가득 채운 검은 남자들을 보곤 말문이 막혀 버렸다. 검은 터번을 쓴 자들로 구릿빛 피부에 짙은 눈썹, 그에 반해 눈동자는 천생 늑대였다. 그중 나이는 지긋하나 보는 것만으로도 겁에 질리게 하는 무서운 얼굴의 남자가 눈에 띄었다.
“오셨나?”
찰스가 뒤늦게 찾아온 손님을 반갑게 맞이해 주었다.
“찰스 대공.”
두 사람은 오래된 형제라도 만난 양, 반갑게 인사했다.
* * *
대낮임에도 불구하고 군터와 마리아는 사랑을 나누었다. 임신 초기를 지났으니 억지로 참을 일은 적어진 셈이었다.
“하, 군터……. 이제 그만요. 궁을 떠나기 전에 우리 할 일이 많잖아요.”
마리아가 먼저 일어나 옷을 챙겨 입었다. 마음 같아선 온종일 마리아와 침대에서 뒹굴고 싶으나 그녀의 말대로 둘러볼 곳이 많았다.
“공사장에 갈 건데 같이 가지?”
“그럴까요? 왕국민들이 살 집들이 얼마나 지어졌는지 궁금해요.”
어느새 두 사람은 왕과 비에게 주어진 소임을 당연한 듯 맡아 진척시켜 나갔다. 특히 마리아는 제 할 일을 아주 잘 찾아서 하는 편이라, 군터의 일거리가 많이 줄었다. 덕분에 내궁의 체계는 이른 시일 내에 아주 잘 잡힌 상태였다.
두 사람은 마차를 타고 왕성을 돌아보았다. 이곳저곳 공사 중이라서 어수선하지만, 한쪽에는 이미 정착하여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을 보니 가슴이 뿌듯했다.
“저기, 아멜리예요.”
마리아는 창문 너머를 가리켰다. 이내 마차가 멈추고 군터가 먼저 내려 마리아를 부축했다.
“아멜리.”
“왕비님? 대왕님도 오셨네요?”
노라의 말로는 아멜리와 라이언 더프는 아직 거처가 없어 궁에서 기거한다고 했다. 해서 얼마 전 군터가 마땅한 집을 골라 보라고 한 터였다.
“집을 보러 나왔어요?”
“네, 대왕님의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참, 인사해요, 라이언.”
아멜리는 제 남편에게 마리아와 군터를 소개했다.
“라이언 더프입니다. 대왕님과 왕비님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리고 제 사정을 살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반가워요. 라이언.”
겉으로 봐선 그리 모난 구석이 없는 남자였다. 오히려 점잖은 학자에 가까워 보였다. 말투나 행동도 경박하지 않으며, 눈동자도 매우 선해 보였다. 그런데 어쩌다가 종교재판에 휘말리게 되었는지 의아할 지경이었다.
어느새 네 사람은 같이 다니게 되었고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라이언이 이상한 말을 하기 전까지는.
“대왕님, 왕성에 가장 먼저 지어야 할 건 따로 있습니다.”
“뭐지?”
“병원입니다.”
“병원? 그게 무엇이냐?”
“병자를 진료하고 상태가 나빠지면 수술한 뒤 입원하여 치료할 수 있는 기관입니다.”
라이언의 말에 마리아와 군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난색을 보였다. 도통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플 때 치유사를 찾아가면 병을 고쳐 주는데, 수술이나 입원이란 말은 처음 들었다. 물론 라이언은 이후에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했다.
“여보, 그만하세요.”
내내 불안한 얼굴로 눈치를 보던 아멜리가 라이언을 말렸다. 라이언은 평소에는 말을 아끼는 편인데, 누군가가 자신의 말을 경청하면 흥분하여서 하지 말아야 할 소리까지 해 버리곤 만다. 그러다가 또 이상한 소리를 하려고. 저야 그의 말을 믿지만, 남들은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터.
“아멜리, 이 나라는 대륙의 어떤 나라보다 크게 발전할 거야. 그건 정해진 일이라고. 그러니 내가 여기에 왔지.”
“그게 무슨 소리냐?”
군터는 라이언이 수상했다. 눈동자에 사특한 기운은 보이지 않는데, 이상하게 총기가 도는 것도 그렇고. 보아하니 그가 마법이나 주술을 쓰지는 못하는 것 같았다. 그런데도 앞일을 예견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마치 헬랜드의 미래를 훤히 아는 것처럼.
“아……니에요! 이 사람이 워낙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
아멜리는 필사적으로 군터와 라이언의 대화를 막았다. 하지만 벌써 군터의 얼굴에는 라이언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다. 뭐랄까, 라이언에게 묘하지만 강렬한 느낌이 전해진달까.
“수천 년 뒤에 헬랜드는 대륙에서 가장 번성한 나라가 될 겁니다.”
“덕담 고마워요.”
마리아도 이쯤에서 대화를 마무리할 셈이었다. 자칫 군터의 손에 라이언이 험한 꼴을 당할세라 염려스러웠다. 한데 군터는 이미 무서운 얼굴로 라이언에게 성큼 다가갔다.
“네가 그걸 어떻게 알지?”
“그건, 저는 시간을 거스를 수 있는 능력자이기 때문입니다.”
멀쩡한 얼굴로 헛소리를 하는 남자.
‘미친 건가. 시간을 거스르다니, 그럼 자기가 미래에서 왔다는 소리야?’
마리아는 어색하게 웃으며 라이언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