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헨리는 서로 반가워하는 찰스와 낯선 남자를 보곤 금세 이맛살을 찌푸렸다.
‘저런 이교도들과 포옹이라니.’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군터도 그렇고 서쪽의 검은 늑대 할라드 술탄도 제 취향과는 거리가 멀었다. 아니, 상스럽게 칼이나 휘두르는 야만적인 인간들은 지긋지긋했다. 게다가 코를 쥐게 하는 향신료 냄새에 짜증이 밀려왔다. 그런데 할라드의 입에서 아주 흥미로운 이름이 거론됐다.
“44번, 아니지 군터 뭐시기 그 노예 놈을 언제 만날 수 있는 거요.”
“자자, 흥분을 가라앉히시고.”
“내 그놈의 내장을 발라 씹어 먹어도 시원찮소.”
헨리는 그가 일전에 찰스가 말했던 군터의 옛 주인 검은 늑대 할라드 술탄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도 이곳까지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저리도 분노하는 것을 보니, 상상했던 것보다 군터에게 원한이 깊은 듯했다. 왠지 그건 꽤 마음에 들었다.
“천천히 이야기합시다. 술탄이 잠든 사이 세상이 많이 변했다오. 그 전에 폐하께 인사드리시지요.”
찰스는 흥분한 할라드를 달래며 헨리에게로 데려왔다.
“반갑수다. 라크 할라드 빈트 자아드 알라니안 압둘라 빈 술탄이오.”
“!?”
헨리는 잠시 말문이 막혀 멍하니 할라드를 보기만 했다. 대체 저토록 긴 이름을 무슨 수로 외우란 거지.
“짐은 라스토니아의 황제 헨리 코부……!”
그가 대답을 마치기도 전에 할라드는 헨리를 껴안더니 코를 비비적거렸다.
‘이런 미친, 이교도 같으니!’
무어라 화를 낼 겨를도 없이 찰스가 다가와 아주 친절하게 설명했다.
“술탄의 인사법입니다. 폐하.”
“하, 그렇군요.”
세상에 이렇게 불쾌한 인사법은 처음이었다. 나름 친근함의 표시인 것 같기는 하나, 그냥 저 할라드 술탄이라는 남자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44번 그놈이 폐하의 여자를 데리고 튀었다지요?”
“후! 찰스 대공, 짐은 피곤하니 술탄이 궁에 머무는 동안 대접 잘해 주시오.”
헨리는 더는 할라드와 말을 섞기가 싫었다. 군터나 할라드나 딱 질색. 한시도 함께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낸시의 생각은 달랐다. 왠지 할라드라는 사람과 관계를 트면 헨리에게 큰 도움이 될 듯했다. 차라리 찰스를 밀어내고 술탄과 우호적인 친분을 맺는 편이 훨씬 이득인 것을. 낸시는 곧바로 헨리의 곁으로 다가가 말했다.
“폐하, 할라드 술탄과 친해지면 헬랜드의 대왕을 대적하기에 편할 거예요.”
“대적은 무슨, 굳이 내가 저런 상스러운 인간들과 친해져야 하나.”
어차피 수중에 돈도 있겠다. 취향이 아닌 사람들과 어울리며 괜한 시간 낭비를 할 필요가 없었다. 군터와 빚 청산만 하면 끝날 것을. 거기에 위자료까지 두둑이 받아 내는 일이 더 시급했다.
* * *
마리아는 조금이라도 빨리 군터를 라이언과 떼어 놔야겠다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물론 아멜리도 같은 마음인지 연신 제 남편의 팔을 끌어당겼다.
“군터, 돌아가요.”
“아니, 저자와 좀 더 이야기해야겠어.”
군터도 기가 막히겠지. 라이언이 얼마나 궤변을 늘어놓는지 두고 보려는 것일 터.
“시간을 거스른다. 마치 네가 미래의 세상을 다녀온 것처럼 말하는구나.”
“대왕님, 마치가 아니라 저는……!”
그때 아멜리가 손으로 라이언의 입을 막아 버렸다. 더 했다간 미친 사람으로, 아니 군터에게 목이 날아갈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한데 군터는 호기심에 찬 얼굴로 라이언을 보더니 이내 소리 내 웃었다. 그 웃음에는 황당함이나 비아냥은 섞여 있지 않았다.
“그 병원이라는 거, 말이다.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 봐라.”
군터의 말에 마리아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아니, 그녀는 제 두 눈과 귀를 의심했다. 반면 라이언의 얼굴에는 화색이 돌았다. 마치 자신을 알아주는 사람을 드디어 만났구나 하는 표정이었다.
“예, 실망시켜 드리지 않겠습니다.”
“그래.”
군터는 희망에 들뜬 채 자리를 떠나는 라이언을 보며 흐뭇하게 미소 지었다. 마리아는 그런 군터가 너무 낯설었다.
“솔직히 이상한 사람 같아요. 미래가 어쩌고……! 종교재판에 왜 회부되었는지 알 것도 같고.”
마리아는 라이언이 도를 지나쳤다고 느꼈다. 저 자신도 사고가 꽉 막힌 사람은 아니지만, 라이언의 말은 황당한 구석이 매우 많았다. 특히 시간을 거스를 수 있는 능력자라니. 정령이나 마법사라도 된다는 말인가. 한데 군터가 이렇게 관대하게 나올 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마리아, 내가 헬랜드를 건립하고 매해 마녀들을 불러 겨울 제례를 지냈다. 그런 거창한 의식을 해야 나라가 발전하고 내게 운이 깃들 거라 여겼거든. 하지만 다 거짓임이 밝혀졌을 때, 내가 얼마나 우매했는지 깨달았다.”
“네?”
“정해진 운명도 인간의 무모한 용기 앞에선 속수무책일 수가 있단 말이지. 어디서 변수가 생길지는 아무도 모르는 거거든.”
군터도 라이언의 말이 전부 가슴에 와닿은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틀린 말을 하지 않았다. 병자들을 치료하는 시설이 있다면 많은 사람이 주술이나 마법에 매달리진 않을 테니까. 사람의 병은 사람의 몸을 잘 아는 사람이 고치는 게 당연했다. 무작정 미신이나 민간요법을 맹신하다 더욱 악화하는 경우도 부지기수였다.
‘너와 아이를 살릴 수만 있다면, 스톤의 예언을 뛰어넘을 수 있다면 나는 뭐든 믿어 볼 거다.’
자신이 남보다 사고가 트이거나 시야가 넓은 사람이어서가 아니라, 절박함은 무엇이든 붙들게 되어 있는 거니까.
* * *
솔샤르와 에로는 후원에서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에로, 이번에는 안 가면 안 되는 거냐?”
라스토니아로 향하는 사람 중에 에로도 속했다. 게다가 군터와 함께 움직이는 게 아니라, 라스토니아에선 따로 행동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여전히 키르탄 왕자 행세를 할 일이 남았다는 거겠지.
“걱정하지 마세요. 이번에는 저를 호위하는 군대도 있으니 안심하세요.”
“안심이 안 돼.”
찰스에게 당해 피떡이 된 광경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그 자리에서 찰스의 숨통을 꿰뚫고 싶은 충동을 간신히 다스렸다.
“같이 가 주지 못해 미안하다.”
“부관님은 대왕께서 자리를 비우시니 왕궁을 지키셔야지요.”
게다가 스톤마저 겨울잠에 들어서 언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를 터. 에로는 솔샤르의 위치와 책임을 잘 알기에 서운하지 않았다.
“그래도 내 도움이 필요하면 라모나에게 연락을 취해라.”
에로는 라모나가 준 마법 종이를 많이 챙겼다.
“그럴게요.”
에로는 솔샤르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자신도 그를 두고 가는 길이 그리 내키진 않았다. 하지만 모니카 그 여자의 파멸을 반드시 봐야 할 터. 마리아를 위해서 자신이 시작한 일이니, 마무리도 깔끔하게 해 줄 생각이다. 그런데 솔샤르의 품은 왜 이리도 따뜻한지. 떨어지기가 힘들 것 같았다.
“부관님, 제가 진짜 여자였으면 더 좋으셨겠죠?”
“아니, 난 그냥 너라서 좋은 거야.”
“알아요. 하지만 제 몸이 여자라면 남들처럼 혼인도 하고 아이도 낳고 가정도 꾸릴 수 있잖아요.”
“난 말이다. 의외로 욕심이 없는 편이다. 지금도 충분히 만족스럽고 행복하거든. 지난날에 비하면 천국이나 마찬가지지.”
할라드의 밑에서 짐승 취급을 받으며 살아 봐서 삶에 대해 크게 욕심을 갖지 않게 됐다.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사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그때 누군가가 부산스레 나타났다.
“내가 에로를 여자로 만들어 줄……. 아얏!”
쿵- 솔샤르와 에로 앞에 떨어진 사람은 라모나였다. 분명 하늘에서 떨어진 것 같은데…….
“라모나! 너 무슨 일이야! 머리는 왜 파란색이야?”
“아잇! 아파라! 그게 스톤 님이 겨울잠에 들어가셨잖아요. 그동안 마도서를 완벽하게 독파하라고 하셔서, 그만.”
“그래서 머리 색부터 바꾼 거냐?”
솔샤르는 에로와의 오붓한 시간을 깬 라모나가 얄미웠다. 라모나가 마법을 익힐수록 왠지 짓궂게 굴던 스톤의 어린 시절을 닮아 가는 것 같았다.
“네, 잘했죠? 저 날아다닐 수도 있어요. 아직 완벽한 건 아니지만요.”
“자아알! 하면 빗자루를 타고 하늘을 날겠다.”
솔샤르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 참, 마도서에 성을 전환하는 마법이 있더라고요. 제가 열심히 익혀서 에로를 진짜 여자로 만들어 줄게요.”
갈수록 가관이라더니, 아무리 마법이라도 정도와 상식이라는 게 있는 법이니까.
“제가 눈치가 없었네요. 두 분 대화 나누세요. 저는 그만……!”
라모나가 재빨리 허공을 향해 날아오르자, 솔샤르와 에로는 놀란 눈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성을 바꾸는 게 가능했다면 스톤이 벌써 해 줬겠지.’
솔샤르는 허탈하게 웃었지만 라모나의 마음은 기특하게 여겼다.
* * *
드디어 라스토니아로 향하는 행렬이 꾸려졌다. 군터와 마리아가 탄 마차 뒤로 여러 대의 마차가 뒤따르고, 앞뒤로는 그들을 호위하는 붉은 군대가 포진했다. 군터는 혼자였다면 말을 타고 갔을 테지만, 마리아와 함께하고 싶어 일부러 같은 마차에 탔다. 다만 문제는 마리아의 표정이 떨떠름하다는 것이었다.
“군터, 이렇게 당신 무릎에 앉은 채 라스토니아까지 가야 해요?”
그는 마리아를 마차에 태운 후부터 한시도 제 몸에서 떼어 놓지 않았다.
“보세요. 마차가 웬만한 침실보다 넓어요.”
둘 다 편하게 누워 있어도 될 정도로 안락한 것을.
“아, 그건 중간에 종종 해야 해서 크게 만들라고 했다.”
“뭘 해요?”
“알려 줘?”
“?”
군터는 맞은편 넓은 소파, 아니 침대라고 하는 편이 나을 듯했다. 하여튼 그곳에 마리아를 옆으로 다소곳이 눕히더니 그도 그녀의 뒤에 누웠다.
“자려고요?”
출발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피곤한 건가.
“아니, 하려고.”
그의 손이 아주 능숙하게 마리아의 드레스 자락을 걷어 올렸다.
“꺅! 뭐예요?”
“산모와 안전하게 하는 법을 완벽하게 터득하고 왔다. 이렇게 옆으로 하는 게 좋다더군.”
“엉큼해, 아주!”
“엉큼한 건 나와 거리가 멀다. 그냥 너만 보면 발정이 나지. 그러니 즐기라고.”
군터의 뜨거운 숨결이 마리아의 목덜미를 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