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황후 마리아-85화 (85/120)

85화

오랜만에 라스토니아 황실에 큰 연회가 열렸다. 모니카의 혼인에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찰스 대공과 재혼했으며 식이 조촐했던 만큼 연회는 성대하게 열렸다. 밤이 되자 샹들리에의 불빛이 영롱하게 반짝이고 악공들의 흥겨운 연주가 연회장에 울려 퍼졌다. 헨리와 낸시는 속속 도착하는 귀빈들을 맞이하느라 바빴다. 오늘 참석한 이들은 귀빈 중의 귀빈으로 귀족과 외국 황족들이 대부분이었다.

‘오늘 연회에 마리아도 올까.’

헨리는 내심 그녀를 기다렸다. 물론 마리아 곁에는 무도한 군터 플레이슬리도 함께 있을 터. 그 작자를 다시 볼 생각을 하니 속이 좋지 못했다.

“할라드 술탄은 안 왔지?”

헨리는 낸시에게 지그시 물었다. 군터도 감당하기 힘든데 할라드 술탄마저 연회에 초대하면 감당하기 버거울 테니까.

“네, 제가 대공께 말씀드렸더니, 술탄께서도 대공저에서 쉬셔야 한다고 하셨대요. 다만…….”

“군터가 오면 바로 연락을 취해 달라, 뭐 그런 소리를 지껄였나?”

“그……렇죠.”

“둘이 물고 뜯고 싸우는 건 상관없다. 하지만 라스토니아에선 절대 안 돼.”

“제가 대공께 미리 말씀을 드렸어요.”

그들이 제 말을 잘 들을지는 모르겠다. 그나저나 낸시는 모니카가 더 걱정됐다. 연회가 시작하기도 전에 술을 퍼마시고 있으니. 오늘 연회에 누가 와도 그다지 흥미를 보이진 않을 터. 죽은 키르탄 왕자가 되살아오지 않는 한, 그녀는 밤새도록 술만 마실 테지. 그런데 죽은 왕자가 살아서 돌아온들 이제는 다 소용없는 것을.

낸시는 크게 한숨을 내쉬며 도리질했다. 낸시는 얼핏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다. 혹시나 해서 최대한 황후답게 꾸몄다. 마리아는 황후였을 적, 연회가 열리면 고고한 백조처럼 우아한 드레스에 절제된 화장과 고급스러운 장신구를 걸쳐 고혹적인 분위기를 살렸다. 그에 반해 로랑은 만개한 장미처럼 짙은 화장과 노출이 심한 드레스 차림으로 나타나 남자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곤 했었다. 그래도 로랑을 닮고 싶다는 생각은 추호도 하지 않았다.

‘난 곧 황후가 될 거야. 그러니 품위를 지켜야지.’

마리아를 완벽하게 따라갈 순 없으나 적어도 사람들의 눈에 황후처럼 보이고 싶은 열망이 컸다. 더불어 마리아에게 똑똑히 보여 주고 싶었다. 결국 헨리의 여자는 바로 저라는 것을. 또한 라스토니아 제국민이 선택한 황후도 마리아나 로랑이 아닌 저 자신이었다.

“어머, 축하드려요, 아크만 부인.”

“감사합니다, 후작 부인.”

귀부인들이 낸시를 보며 인사를 건넸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낸시의 차림새부터 살폈다. 폐황후의 시녀였던 비천한 여자가 어찌하여 황후 자리까지 넘보게 됐는지. 게다가 농노 출신이라는 소문이 파다했다. 아무래도 머리가 비상한 게 틀림없을 터. 헨리가 그렇게 총애하던 로랑 세라두도 쫓아낸 것을 보면 보통 여자는 아니었다.

“정말이지 인간 승리가 따로 없네요. 시녀에서 황후가 되셨다니.”

후작 부인이 덥석 낸시의 손을 잡으며 감격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제 일인 양 기뻐하는 듯싶어도 말속에 은근한 무시와 조롱이 섞여 있었다.

“네…….”

낸시는 겉으론 웃고 있으나 이미 속이 울렁대기 시작했다. 얼마 전까진 수도의 귀부인들은 제게 줄을 대려 앞다퉈 궁으로 찾아오곤 했었다. 한데 찰스와 모니카의 혼인으로 권력의 판세가 바뀌는 바람에 슬슬 저울질하는 듯했다.

낸시는 칭찬을 앞세운 조롱도 웃으며 넘겨야 했다.

“그만큼 아크만 부인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거죠. 사실 로랑 세라두 그 여자는 허영심만 컸잖아요.”

“맞아요, 남작 부인. 우리 아크만 부인은 몸뚱어리 하나로 그 모진 고난을 다 헤치고 황후가 되셨으니, 진정한 능력자이시죠.”

“그러고 보면 가문이나 미모만 가지고 황후가 되는 건 아니에요.”

“그러니까요. 아크만 부인이 스튜어트 공녀와 세라두 백작 영애를 다 이긴 셈이니까요.”

두 귀부인의 비아냥에도 낸시는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속으론 이를 바득바득 갈며 훗날을 도모했다. 자신이 진정한 황후로 거듭나게 되는 날, 저들은 제 발아래 엎드려 머리를 조아리게 될 테니까. 낸시는 분한 마음을 간신히 삭이며 드레스 자락을 움켜잡았다. 그때였다. 헨리가 난감한 얼굴로 낸시의 곁으로 다가와 귓가에 속삭였다.

“엄마 좀 말려 봐. 벌써 흥건하게 취했다고.”

낸시의 시선이 저 멀리, 한쪽 벽에 기대어 술을 마시는 모니카에게로 향했다.

“염려 마세요. 제가 다 해결해요.”

낸시는 헨리의 손등을 토닥이며 그를 안심시켰다. 그녀는 다급하게 시종 하나를 불러 조용하게 명령했다.

“가서 술 깨는 약을 가져와라.”

“예.”

모니카를 그냥 두었다간 연회 도중에 깽판을 치고도 남을 터. 지금이라도 막아야지 싶었다. 얼마 뒤, 시종이 약병 하나를 가져오자, 낸시는 거칠게 약병을 움켜쥐곤 모니카를 향해 다가갔다.

* * *

에로는 군터 일행과 헤어져 라스토니아 황궁의 반대쪽에 와 있었다. 그녀는 키르탄 왕자 에론의 모습을 한 채였다. 솔샤르의 염려 때문에 그녀를 호위할 군대도 데려왔다. 물론 헬랜드인이라는 정체는 철저하게 숨겼다.

‘시간 차를 두고 연회장에 들어가야지.’

마리아와 이미 계획을 맞춘 상태. 가장 효과적이고 잔혹하게 저들의 연회를 짓밟아 줄 생각이다. 그리고 꼭 잊지 말아야 할 일이 있었다. 헬랜드를 떠나기 전, 라모나가 제게 했던 말이다.

[낸시한테 두 장의 서신이 왔었어요. 두 장 다 에론 왕자님은 죽었노라 답신을 보냈고요. 하지만 에로가 라스토니아에 도착할 때쯤엔 제가 손을 써 놓을 거예요.]

[라모나, 그게 가능해?]

[하늘을 날 수도 있는데 그 정도야 뭐.]

귀여운 라모나, 절망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던 그 비참한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항상 빛으로 반짝이는 미소가 얼마나 예쁜지. 이내 에로는 거칠게 도리질했다.

‘나만 잘하면 되는 거잖아.’

모두 각자 맡은 역할을 척척 잘해 내고 있으니, 자신도 실수 없이 완수해야 할 터. 한데 어느새 두 뺨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아잉, 짜증 나. 부관님이 벌써 보고 싶잖아.’

에로는 손등으로 눈물을 훔쳤다. 여전히 그가 제게 했던 말이 여운으로 남아서 이곳으로 오는 내내 가슴을 후벼 팠다. 아팠더라면 괴로울 텐데, 가슴이 벅차게 좋았다.

[아니, 난 그냥 너라서 좋은 거야.]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는 남자. 솔샤르만 떠올리면 가슴 한편에 온기가 돌았다. 결국 자신이 돌아갈 곳은 그의 품이었다.

‘얼마 안 남았어요. 이 일만 잘 마무리하면 제 할 일은 다 끝나요.’

에로는 앞으로 자신이 해내야 할 일을 앞두곤 긴장감에 휩싸였다. 실수 없이 잘해 내기 위해서 연신 솔샤르를 떠올리며 마음을 다졌다.

‘그나저나 찰스 그 작자는 어떻게 조져 놓지.’

그의 수하들에게 죽도록 맞았던 것만 떠올리면 뼈가 뒤틀리고 내장이 떨렸다. 이제 와 말이지만, 때맞춰 솔샤르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자신은 그들에게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싸움이라도 잘했다면 그 개기름이 번지르르한 얼굴이라도 한 대 갈겨 줄 텐데. 오기 전에 솔샤르에게 주먹 휘두르는 방법을 조금 배우긴 했는데, 잘 써먹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생전 누군가를 때려 봤어야지. 벌레 한 마리도 제대로 못 잡는 주제인 것을. 하지만 오늘 더 큰 버러지를 잡을 참이다.

* * *

연회가 무르익어 갔다. 국내외 귀빈들이 거의 다 도착하고 연회장 플로어에는 짝을 지어 춤을 추는 귀빈들로 붐볐다. 헨리와 낸시는 곳곳을 다니며 인사했다. 귀빈들은 모니카와 찰스의 재혼을 축하했지만, 정작 주인공인 모니카는 심드렁한 얼굴로 한편에 앉아 연회를 지켜보기만 했다. 전혀 모니카답지 않은 행동. 반면 찰스는 귀빈마다 찾아다니며 자신의 영향력을 과시하려 애를 썼다.

“아크만 부인이 황손을 낳아도 정통성에 문제가 있으니, 정무대신들이 인정할지…….”

찰스의 말에 귀빈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라스토니아 건립 이래, 농노 출신의 황후는 없었다.

“우매하고 천한 것들이야 반기겠지만 라스토니아는 엄연히 귀족들의 나라입니다. 출신이 비천한 황후를 받들 귀족은 없다는 거지요.”

찰스는 자신의 의견을 강하게 내비쳤다.

“대공께서 이렇게 건재하시니 큰 걱정은 덜었습니다.”

“저는 라스토니아가 점점 약소국이 되어 가는 것을 황실 어른으로서 두고 볼 수만은 없었습니다.”

찰스가 비통한 어조로 말하자, 귀빈들은 한마디씩 그를 거들었다.

“그러시겠지요. 선황후와의 혼인은 현명한 선택이셨습니다.”

“나라가 어려울 때는 정치 경험이 많은 황실 어른이 나서야죠.”

그때였다. 시종장이 미처 도착하지 못한 귀빈이 있음을 큰 소리로 알렸다. 이내 장내의 모든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헬랜드 대왕과 왕비님께서 도착하셨습니다.”

귀빈들은 웅성거렸다. 헬랜드의 대왕이라면 야만적인 군터 플레이슬리를 이르는 것일 터. 한데 왕비와 같이 연회에 참석했다고? 대체 그 왕비가 누군지 모든 귀빈이 촉각을 곤두세운 채 두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물론 헨리와 낸시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마리아가 도착했단 말이지.’

거의 1여 년 만의 만남이었다. 마리아가 황궁을 떠날 때는 반역 죄인의 신분이었으며 스튜어트 가문이 멸문하는 바람에 큰 충격을 받아 말을 하지 못했었다. 한데 좀 신경이 쓰이는 부분은 그녀가 헬랜드의 왕비가 되었다는 사실이다. 자신은 소식을 들어 진즉에 알고 있었으나 연회에 참석한 귀빈 중에는 모르는 사람이 더 많을 터. 마리아가 나타나면 연회장은 곧 충격의 소용돌이에 휘말릴 게 불 보듯 뻔했다.

‘젠장. 오늘 연회에는 참석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시간이 지나도 소식이 없길래 내일쯤이나 나타날 줄 알았다. 해서 내심 속으론 잘되었노라 여겼건만. 기어이 껄끄러운 자리를 만들어 버리고 말다니. 낸시도 긴장하기는 마찬가지. 그녀는 상기된 얼굴로 곧 군터와 마리아가 등장할 문 쪽에 시선을 고정했다.

잠시 연회장에 흐르던 음악이 멈추었다. 그 많은 귀빈이 모였는데도 아무도 없는 양 적막감이 맴돌았다. 마침내 연회장의 문이 활짝 열리며 군터와 마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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