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황후 마리아-86화 (86/120)

86화

문이 열리자 온통 금빛에 휩싸인 남녀가 나타났다. 귀족들이 평소 야만인이라 폄훼하던 군터는 풍성한 모피를 덧댄 망토와 곳곳에 보석을 박은 예복을 입었으며, 긴 금발을 풀어 헤친 마리아는 기존의 단아했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몸의 곡선을 그대로 드러내는 화려한 드레스. 옷 전면을 뒤덮은 보석과 황금으로 인해 숨만 쉬어도 영롱한 빛이 발산했다. 특히 예전과 다르게 마리아는 농염하면서도 기품이 넘쳤다. 남자라면 누구라도 한 번쯤은 시선을 빼앗길 만큼 미모에 물이 올랐다. 이내 연회장은 큰 충격으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저…… 여자, 폐황후 마리아 스튜어트 아닌가요?”

“맞아요. 헬랜드에 볼모로 잡혀갔다더니……!”

귀부인들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다들 마리아는 야만국의 볼모로 잡혀갔으니 지금쯤은 죽었을 거라 짐작했기 때문이다. 라스토니아 사람이라면 누구도 꺼리는 야만의 땅, 헬랜드. 뼛속까지 귀족이었으며 한때 완벽한 황후라 칭송받던 마리아가 그곳의 왕비가 되어서 돌아오다니. 비참하고 초라한 모습이 아닌, 대륙 어느 황실의 황후보다 위압적이고 빛나는 모습이었다.

“왕비가 되었네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어요.”

“라스토니아의 황후였을 때보다 더 나아 보이는데요.”

“그런데 폐황후가 저렇게 야릇하게 치장했었나요? 뭐랄까, 분위기가 확 달라져서 몰라보겠어요.”

“여러분, 저 배를 보세요.”

2차 충격의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폐황후 마리아는 아주 유명한 ‘석녀’였다. 그로 인해 헨리의 마음이 떠났으며 곁에 로랑 세라두라는 정부를 둔 이유기도 했으니까. 그런데 버젓이 임신까지 한 채로 돌아왔다.

“세상에, 폐황후, 아니지 헬랜드 왕비가 임신을 했어요.”

“그럼, 석녀가 아니라는 거잖아요?”

마리아는 군터의 손을 잡고 헨리와 낸시를 향해 걸어갔다. 또한 두 사람 뒤로 화려하게 차려입은 시녀장과 시녀, 시종들이 뒤따랐다. 두 사람은 종종 시선을 맞추며 서로에게 미소를 짓곤 했다. 여자 귀족들이 마리아를 두고 놀라는 데 반해, 남자 귀족들은 예전과 달라진 군터를 보고 크게 동요했다. 전장이나 전전하며 사람을 짐승처럼 때려잡는 야만인의 우두머리 군터 플레이슬리. 그는 노예 출신으로 비천하기가 둘째가라면 서러웠던 자였다. 한데 무슨 조홧속인지, 그에게서 근엄한 제왕의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이젠 한 왕국의 대왕이라 칭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기품 있는 모습이었다. 그에게서 더는 피 냄새가 나지 않는 건, 현실인지 환각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였다. 여자든 남자든 한 가지는 같은 생각이었다.

“두 사람이 너무 잘 어울립니다.”

“한데 저 시녀장은 어느 귀부인이시죠?”

귀부인들은 풍채가 좋은 노라를 보며 수군거렸다. 본디 황후나 왕비의 시녀장은 최고 가문의 귀부인이 맡는 법, 헬랜드에 저런 귀부인이 있었다니. 여유 있는 걸음걸이만 보아도 유서 깊은 귀족 여자가 틀림없었다.

“역시 마리아 스튜어트는 황후의 운명을 타고난 여자입니다.”

볼모로 끌려가도 그 왕국의 군주를 거머쥐었으니 말이다. 이내 귀부인들은 군터의 완벽한 모습에 찬사를 보냈다. 붉은 용 가면을 쓰고 다녀서 이제껏 그에게는 흉흉한 소문이 무성했었다. 그런데 실제로 얼굴을 보니 천생 조각 미남이 아닌가. 인정하고 싶진 않으나, 마리아와 군터는 아름다운 한 쌍이었다.

하지만 상석에 서서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광경을 보는 헨리와 낸시는 잠시 숨을 쉬지 않았다. 아니, 문이 열리자마자 저절로 숨이 멈춰 버렸다. 헨리의 시야에는 온통 마리아만 보였다. 저 자신이 너무 잘 알지만, 하나도 모르겠는 마리아였다. 같은 여자라곤 믿기지 않을 정도로 변한 모습에 넋이 나가 버렸다. 빛에 휩싸여 걸어오는 마리아는 여신처럼 아름답고 성스러워 보였다. 아무나 흉내 낼 수 없는 고결함과 우아함이 좌중을 단숨에 압도했다.

한편 낸시는 몸에 지진이 난 양 파들파들 떨었다.

‘어째서 저리도 멀쩡하게 돌아온 거지.’

대략 짐작은 했으나, 이 정도로 대단한 모습으로 나타날 줄 예상하지 못했다. 애초에 고난 따윈 겪어 보지도 못한 여자처럼, 상처 하나 받지 않은 것처럼 무구한 눈빛과 여유로운 자태에 저절로 기가 눌렸다. 게다가 마리아의 배를 보니 분명 임신이었다. 헨리도 마리아를 훑어 내리다 볼록하게 나온 배에서 시선이 멈췄다.

‘마리아가 군터, 저자의 아이를 임신한 건가?’

헨리는 마리아와 군터를 번갈아 바라봤다. 경악한 헨리와 낸시가 얼이 빠져 있는 사이 군터와 마리아는 헨리의 바로 앞에 와 있었다.

“라스토니아 황제 폐하께 인사드립니다.”

마리아는 무릎을 굽혀 정중하게 예의를 갖췄다. 그리고 군터는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으로 인사했다.

“반갑소, 황제.”

두 사람이 제게 인사하는데도 헨리는 마리아에게 넋이 빠져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보다 못한 낸시가 헨리의 팔을 세게 잡자, 그제야 정신이 났다.

“반……갑습니다, 대왕. 그리고…… 마리아.”

“이젠 헬랜드의 왕비 마리아입니다.”

‘아니지, 마리아는 아직 나와 이혼하지 않았잖아.’

헨리는 반발심에 그 말이 목구멍까지 치받쳤지만 차마 밖으론 내뱉지 못했다. 헨리는 눈앞이 어지럽고 심장이 아파 왔다. 대체 어디서부터 꼬여 버린 걸까. 어째서 자신이 제 아내인 마리아와 이렇게 마주해야 하는지 갑자기 이해가 안 됐다. 언제나 제 옆에 있던 존재였건만. 이내 마리아의 시선이 헨리를 지나 낸시에게로 향했다.

“오랜만이구나, 낸시.”

“황후님, 아니 왕비, 반……가워요.”

낸시는 절대 마리아의 기에 눌리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한데 그녀가 제 이름을 부르는 순간, 습관처럼 작아지고 말았다.

“축하한다. 곧 황후가 된다고. 아직 정식으로 황후가 된 건 아니니, 예우는 나중에 갖춰도 되겠지.”

그때였다. 날 선 목소리가 마리아의 신경을 날카롭게 찔렀다.

“이게 누구야? 폐황후 마리아잖아?”

술에 취한 모니카가 몸을 비틀거리며 마리아와 군터를 향해 걸어오며 비아냥거렸다. 그 모습에 헨리는 낸시를 책망하듯이 쏘아봤다.

‘술 깨는 약을 먹여도 저런데 나보고 어쩌라고.’

낸시도 이 순간만큼은 헨리 모자가 야속하기만 했다. 다시 음악이 흐르고 연회는 재개되었다. 사람들은 플로어에서 춤을 추고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는 바람에 모니카의 술주정은 대충 묻혀 버리긴 했다.

“오랜만입니다, 선황후 전하.”

마리아는 모니카를 향해서도 예의를 갖췄다.

“뭐지? 그 모습은?”

모니카는 마리아를 위아래로 훑으며 놀라워했다. 아니, 단번에 술이 확 깨 버렸다. 분명 마리아는 1년 전에 참혹하게 사냥당한 백조처럼 황궁에서 나갔건만, 어째서 빛을 뿜어내며 돌아왔는지 모르겠다. 아, 어렵지 않게 이유를 알았다. 모니카의 시선이 군터를 향했다.

“혼자 고상한 척은 다 하더니, 남자를 후리는 재주도 있었나 보네?”

역시 모니카는 변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안심이 된달까. 막돼먹은 말투로 체통 따윈 멀찌감치 차 버리는 꼬락서니가 그녀다웠다. 이제야 라스토니아로 돌아온 실감이 확실히 났다.

“아무렴, 전하만큼은 아니지요.”

“꼬박꼬박 말대꾸하는 버릇도 여전하고 말이야.”

두 여자 사이의 날 선 대립에 군터가 나서려 하자, 마리아는 다정하게 그를 보며 속삭였다.

“군터.”

마리아가 군터의 손등에 입 맞추자, 그는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 광경을 본 세 사람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마리아가 저리도 남자에게 나긋나긋한 여자였나. 남자를 다루는 솜씨가 보통이 아닌걸? 군터가 마리아에게 완전히 정복당해 버렸어. 각기 느끼는 건 다르지만 놀란 건 마찬가지였다.

“어머머! 세상에, 석녀 마리아가 임신을 한 거야?”

모니카는 못 볼 것을 본 양 떠들었다. 그녀는 마리아의 배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어떻게 마리아가 아이를 갖지? 헨리와 10년간의 결혼 생활에도 감감무소식이더니. 1년 만에 다른 남자의 아이를 가졌다고?

“네, 신의 은총입니다. 그러니 저는 더 이상 석녀가 아니랍니다, 선황후 전하.”

“오호라, 이제야 알겠네.”

모니카의 눈은 매서워지고 입꼬리는 심술 맞게 비틀어졌다. 마리아는 이미 모니카가 무슨 말을 지껄일지 아는 터였다.

“헨리의 아이를 갖고 싶지 않았던 거였어? 그래서 일부러?”

“일부러는 아니지만, 다행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뭐?”

“덕분에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가질 수 있게 됐으니까요.”

마리아는 군터를 애틋하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것만큼은 저들에게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순간 낸시는 헨리의 반응을 살폈다. 마리아한테서 눈을 떼지 못한 채로 굳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또한, 그의 눈동자는 혼돈과 질투로 마구 일렁이고 있었다.

‘폐하께서 흔들리고 계셔.’

역시 우려했던 일이 현실로 다가오자, 낸시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제껏 공들여 쌓은 탑이 마리아의 등장 한 번에 와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하지만 군터의 아이까지 가진 마리아한테 오랫동안 흔들리진 않겠지. 그저 예전과 달라진 그녀가 색다르게 보이니 놀라워서 그럴 터. 저 또한 충격인데 헨리는 오죽할까.

낸시는 어떻게든 이 불편한 상황을 빨리 넘기고 싶었다. 그녀는 애써 침착하게 모두에게 말했다.

“오늘은 선황후 전하와 찰스 대공의 혼인을 축하하는 연회입니다. 안부 인사는 차차 하시고 우선 연회를 즐기시지요.”

낸시는 집안의 안주인인 양 마리아와 군터에게 깍듯하게 손님 대접을 했다.

“그러시지요, 대왕 그리고 마……리아.”

헨리도 겉으론 웃고 있으나 표정은 매우 복잡해 보였다. 그가 시종장을 쳐다보자, 무도곡이 흘러나왔다.

마리아가 군터를 향해 우아하게 손을 내밀자, 그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거머쥐었다.

“첫 곡은 군터와 추고 싶어요.”

“당연하지.”

군터는 마리아를 플로어로 이끌었다. 이내 모든 이의 시선이 폐황후이자 헬랜드 왕비인 마리아와 세상의 편견을 깨 버린 대왕 군터 플레이슬리에게로 쏠렸다. 단언컨대 오늘 연회에서 가장 눈이 부시도록 아름다운 한 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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