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황후 마리아-87화 (87/120)

87화

마리아와 군터는 무도곡에 맞춰 유연하게 춤을 추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충격을 넘어 경악했다. 헬랜드의 대왕을 향한 편견이 매우 강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군터는 얼굴도 가면으로 철저하게 가린 탓에 그의 정체를 아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한데 저토록 우아하면서도 능숙하게 춤을 추다니. 누가 보아도 그는 여느 국왕과 다를 바가 없었다.

“군터, 너무 근사하게 잘 추는데요?”

마리아가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일국의 왕이라면 사교춤 정도야 기본 아닌가?”

그는 마리아에게 일부러 너스레를 떨었다. 사실 춤이라는 건, 마리아 덕분에 처음 경험한 신세계였다. 처음 배울 때는 어색했으나, 춤을 추는 방법에 대해 알게 된 후부턴 아주 열심히 임했다.

[군터, 헬랜드가 외교적인 인지도를 쌓으려면 앞으로 많은 연회를 열어야 해요. 그래야 여러 나라의 귀족과 왕족들과 교류할 수 있어요.]

[그래서 나한테 춤이라도 배우라는 건가?]

[당연하죠. 잘할 수 있죠?]

[흠, 글쎄…….]

군터조차도 의심쩍어했지만, 그는 의외로 몸 쓰는 일에 소질이 있었다. 한 번 가르쳐 준 동작은 금세 외우곤 했으니까. 그는 마리아의 노력에 역행하지 않았고, 춤을 연습하자고 하면 되레 좋아하기도 했다.

군터가 춤을 배운 이유는 단 하나였다. 마리아와 손을 잡고 눈을 맞추며 오붓한 시간을 가질 수 있어서 즐겁다는 것. 놀이처럼 반복한 연습이 이렇게 빛을 보다니. 썩 괜찮은 연습이었다.

“나 질투 안 할 테니, 군터도 절대 하면 안 돼요?”

“글쎄다. 노력은 해 보지.”

마리아는 연회의 춤 예절에 관해 우회적으로 말했다. 연회에선 여러 상대에게 춤을 신청하고 춰야 하는 것이 예의이며, 그런 과정을 통해 친분을 쌓는 것이니, 괜한 오해는 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물론 군터도 이론적으론 충분히 이해했다. 그런데 문제는 언제나 제 신경이 마리아를 쫓고 있다는 거였다. 이성과 감정은 늘 별개니까. 어느새 무도곡이 바뀌며 마리아와 군터의 파트너도 바뀌었다.

“마리아, 나와 한 곡 추지.”

당연히 헨리가 제일 먼저 마리아에게 춤을 신청했다.

“그러죠.”

마리아의 바람대로 군터는 전혀 발끈하지 않았다. 되레 배운 대로 다른 귀부인들과 충실하게 춤을 추었다. 하지만 마리아는 때맞춰 흘러나온 무도곡에 깜짝 놀랐다. 이 음악은 예전에 황실에서 연회를 열 때마다 늘 황제와 황후가 시작을 알리는 의미로 함께 추었던 곡이었기 때문이다. 몸이 기억하는지 두 사람은 아주 익숙하게 음악에 맞춰 춤을 추었다. 그러다 음악이 잦아들 때쯤 마리아와 헨리는 정면으로 서로를 응시했다.

“좋아 보여서 다행이야. 마리아.”

헨리는 애틋한 얼굴로 마리아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녀와 단둘이 있게 되면 할 말이 무척 많은 줄 알았건만, 막상 그리되니 무슨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냥 머릿속이 하얘지면서 제 시야에는 오로지 마리아만이 보였다.

“폐하도 좋아 보이십니다.”

“초대에 응해 줘서 고마워.”

“별말씀을요. 한데 귀족들이 반대하지 않았나요? 폐황후이자 반역 죄인인 저를 버젓이 궁에 들이는 일 말이에요?”

“감히, 누가 짐의 말에 토를 달아.”

말은 그리했으나 귀족들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래 봐야 제 수치로 남을 테니까.

‘센 척하기는, 창피하니까 안 한 거지.’

마리아는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헨리의 무능을 너무 잘 아는 터라, 그저 웃음만 났다. 반면 헨리는 마리와와 손을 잡고 춤을 추는 내내 기시감에 괴로우면서도 가슴이 설렜다. 예전으로 돌아간 것만 같은 느낌. 평화롭고 모든 것이 안정되었던 그 시절의 라스토니아 황실이 떠올랐다. 돌이켜 생각하면 그때가 참 좋았는데.

“그래도 내게 통보도 없이 재혼한 건 도가 지나쳤어.”

“미안해요. 미처 신경을 못 썼네요.”

‘이기적인 건 여전해.’

마리아는 헨리에게 하나도 미안하지 않았다. 말 같아야 호응을 하지, 통보 없이 자신을 폐위하고 스튜어트가를 멸문한 사람이 누군데. 뻔뻔하고 자기중심적인 건 여전했다. 마침 무도곡이 바뀌며 다른 귀족 남자가 마리아에게 춤 신청을 했으나 헨리는 양보하지 않았다. 누구보다 결례라는 것을 잘 알면서.

한편 군터는 귀부인들과 춤을 추는 내내 마리아한테서 신경을 끊을 수가 없었다. 제 파트너인 귀부인의 주책맞은 소리에 울화가 치미는 것을 간신히 참았달까.

“예전에 황실에서 연회가 열릴 때면 저렇게 폐하 부부가 먼저 춤을 추시곤 하셨죠.”

“그렇습니까? 지금은 나의 왕비입니다.”

“어머! 제가 큰 실례를 했네요. 저 그림이 너무 익숙하다 보니.”

군터는 겉으론 웃고 있으나 속으론 진저리를 쳤다. 어서 가서 마리아를 데려와야지 싶었는데 그에게 젊은 귀족 영애들이 앞다퉈 손을 내미는 바람에 꼼짝없이 발이 묶여 버리고 말았다.

마리아도 군터한테서 시선을 떼기 어려운 건 마찬가지였다. 처음에는 그가 잘해 낼지 걱정이 되어서 신경이 쓰였다. 한데 사교계의 황태자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그는 모든 면에서 완벽했다. 한데 굳이 상대의 허리를 저렇게 꼭 잡을 필요는 없는 것을. 특히 저한테만 보여 주던 미소를 다른 여자한테도 마음껏 남발하는 걸 보니 살짝 질투가 나기 시작했다. 오히려 군터보다 자신이 연회의 예절을 까먹은 게 틀림없다.

“마리아.”

“네?”

“이렇게 함께 있으니…….”

헨리가 애절한 얼굴로 마리아에게 무언가를 갈구했다. 함께 있으니……. 뭐? 한시라도 이 얄미운 면상을 제 앞에서 치우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잠시 쉴 시간이 됐는데.’

마리아는 젊은 아가씨들에게 둘러싸인 군터를 보자 슬슬 짜증이 밀려왔다.

‘젠장! 이놈의 춤은 언제까지 춰야 하는 거지.’

군터는 제 안에 존재하는 인내력을 다 발휘했다. 마리아는 느끼지 못하겠지만, 헨리의 뜨거운 시선이 시종일관 마리아를 꿰뚫어 버릴 것만 같았다. 이미 다른 남자의 여자가 되었건만, 저렇게 노골적으로 사심을 드러내는 모습이 기가 막혔다. 보통 양심이란 게 있으면 저러진 못할 텐데. 낸시는 저만치에 방치해 두곤 마리아가 제 황후인 양 플로어를 누비는 광경에 화가 치밀었다.

‘빌어먹을 무도회 같으니.’

그의 강한 바람이 이뤄진 건가. 드디어 무도회가 끝이 나고 귀빈들은 술잔을 든 채, 이곳저곳을 다니며 인맥을 트기 시작했다. 본격적인 연회의 막이 오른 셈이었다. 한데 군터를 향해 아주 많은 귀족이 모여들었다.

“헬랜드 대왕께 인사드립니다. 저는 벨루이스에서 온 몽탕 남작입니다.”

“반갑소.”

“그러잖아도 대왕을 한번 뵙고 싶었습니다. 헬랜드에는 의료용 마석이 많이 채굴된다고 하던데요?”

“맞소. 병을 치유하는 마석이 꽤 많지요.”

“그렇다면 본격적으로 벨루이스와 교역을 해 보시는 건 어떠신지요?”

이런 것이 마리아가 말했던 외교적 노력이란 걸까. 평소에는 야만인이라며 피하기 급급하더니. 교역을 하자고 먼저 제안을 하고.

“남작, 벨루이스는 수학자들이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대왕.”

“우리가 마석을 공급할 테니, 벨루이스의 남아도는 수학자들을 보내 주시죠.”

“그……렇게만 된다면야 저희로선 마다할 필요가 없지요.”

남작을 비롯한 주위에 있던 귀족들이 사뭇 놀란 얼굴을 했다. 수학자들을 보내 달라니, 소문에 의하면 헬랜드의 대왕이 학교를 세우고 왕성 건립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더니, 사실인 모양이었다. 그렇다면 헬랜드와의 교역이 그리 어렵지 않을 듯했다.

“대왕, 혹시 문학가나 예술가는 필요치 않으십니까? 저희는 국경 지역에 흉포한 마물이 출몰해서 골치를 썩이고 있습니다. 마물이 무서워하는 마석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그렇소. 마석은 종류도 많고 기능도 매우 다양합니다. 그 마물을 퇴치할 수 있는 마석을 드릴 테니 우리 헨랜드에 많은 지식인이 이주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시기 바랍니다.”

화기애애한 담화가 이어지는 가운데 군터가 제 시종장을 향해 손을 들어 올리자, 갑자기 연회장의 문이 활짝 열리며 화려한 모피를 두른 시종들이 빛나는 보석이 가득 올려진 은쟁반을 들고 연회장으로 들어왔다. 이내 귀족들의 눈은 휘둥그레졌고 연회장은 흥분으로 뜨겁게 달아올랐다.

“여기 있는 귀빈들께 하나씩 전해 드려라.”

“예, 대왕.”

군터의 명령에 시종들은 귀빈을 찾아다니며 보석을 선물했다. 순도 높은 황금 장식에 붉은빛의 마석이 박힌 브로치였다.

“건강을 지키고 액운을 막아 주는 마석입니다.”

“예? 세상에, 이렇게 귀한 것을.”

군터의 말에 귀족들은 입만을 벌린 채 웃기만 했다. 여자 귀족들은 노라가 맡았다. 그녀는 시종을 이끌고 귀부인들을 찾아가 마석 브로치를 건넸다.

“인사드립니다. 저는 헬랜드 왕비님의 시녀장입니다.”

노라는 교양 있는 말투와 우아한 미소로 귀부인들을 놀라게 했다.

“이 마석 브로치를 늘 차고 계시면 피부의 노화를 늦출 수가 있답니다.”

“노화를 늦춘다고요?”

귀부인들이 눈을 반짝이더니 한둘씩 노라에게로 몰려들었다. 그런데도 노라는 당황하지 않고 아주 침착하게 그들을 응대했다.

“이 마석, 100만 골드는 갈 텐데…….”

한 귀부인이 브로치를 만지작거리며 놀라자, 노라는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웃으며 대꾸했다.

“그리 비싼 건 아닙니다. 350만 골드 정도밖에 안 되지요.”

“350만?”

귀부인들은 체통도 내던졌는지 큰 소리를 내며 호들갑을 떨었다. 노라는 지그시 웃으며 그들을 쭉 훑어보았다.

‘고고한 척해도 비싼 선물에 눈 돌아가는 건 어쩔 수가 없네. 쯧쯧-’

군터가 푼 선물로 인해 연회의 주인인 헨리는 사람들에게 잊힌 지 오래였다. 현재 유구한 역사 하나 빼고는 딱히 내세울 것이 없는 라스토니아보다는 서로의 이득을 위해 황금과 마석이 넘쳐 나는 헬랜드와 교역하는 편이 부를 쌓는 지름길이었다. 그런 기회를 노린 귀족들은 군터와 교역에 관해 끊임없는 제안을 했다. 그때 멀찌감치에서 주고받는 귀족들의 대화가 하나씩 귀에 들어왔다.

“헬랜드가 기회의 땅인 거지. 이렇게 질 좋은 마석이 많이 매장되어 있다니.”

“대왕이 그간 노력을 많이 한 모양입니다.”

“아무래도 왕비 덕분이 아니겠습니까?”

군터는 피식 웃으며 모른 체했다. 그러나 헨리가 마리아에게 계속 추근대는 꼴을 더 이상 봐주긴 힘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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