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군터는 헨리를 많이 봐줬다 여겼다. 이 정도 참아 줬으면 손님으로서 예의는 다한 거니까. 더구나 무도회도 끝이 났는데, 굳이 저렇게 마리아를 독점하게끔 놔둘 필요가 있나 싶었다.
“황제, 내 아내를 데려가겠소.”
군터는 지그시 미소 지으며 최대한 예의를 차렸다. 때맞춰 낸시도 가까이 다가오는 바람에 헨리는 마리아를 더는 붙잡아 둘 수가 없었다.
“폐하, 장차 황후가 되실 분인데, 지금이라도 함께 춤을 추셔야죠.”
마리아는 낸시를 무시하는 헨리를 향해 타박 아닌 타박을 했다. 저렇게 하나에 꽂히면 어린애처럼 물불을 안 가리지. 역시 천성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하지만 헨리는 군터가 마리아를 ‘내 아내’라고 칭하는 순간, 눈앞이 번쩍였다.
‘왜 내가 저자한테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지.’
마리아는 원래 제 아내였으며 아직 정식으로 이혼도 하지 않은 상태였다. 그제야 오랜 혼란 끝에 답을 찾은 듯했다. 일이 대단히 잘못되었노라고. 대체 자신은 이제껏 무엇에 빠져 있었으며 어디를 헤매고 다닌 건지 이해가 안 됐다.
헨리는 가슴이 답답하여 그대로 발코니로 나갔다. 헨리의 그런 혼란을 알아차린 낸시는 온몸의 피가 차갑게 식었다. 자신이 예상했던 것보다 헨리가 더 크게 흔들리는 것이 불길했다. 아니, 가슴에 서늘한 바람이 무섭게 소용돌이쳤다.
‘이제 와서 후회하는 거야?’
분명 헨리의 눈빛은 후회와 절망으로 가득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한때 사랑했던 로랑은 사라졌으며, 조금도 마음에 없는 여자가 곁에 있는 상황. 그뿐인가? 마리아에 대한 감정을 뒤늦게 깨닫곤 제 발등을 찍었노라 자책하겠지. 자신의 진짜 아내는 마리아밖에 없다고.
‘모든 책임은 폐하가 지셔야 해요.’
낸시는 두 눈이 빨갛게 충혈이 되도록 헨리가 나간 발코니를 쏘아봤다. ‘사랑밖에 난 몰라’라고 외치며 황후를 폐위하고 나라를 뒤집은 사람이 누군데.
‘내가 물러설 것 같아?’
헨리만큼 저 자신도 잃은 것이 매우 많았다. 애초에 가진 것도 없는데 무얼 잃었느냐 하겠지만, 가장 중요한 마리아를 잃은 건 헨리나 저나 마찬가지였다. 제겐 마리아와 스튜어트가는 가족이나 마찬가지였다. 한데 사랑 하나 믿고 그들을 사지로 몰았다. 그러니 이젠 후회도 부질없는 일.
‘제발 정신 좀 차리세요. 나의 폐하.’
낸시는 그대로 돌아섰다.
* * *
마리아와 군터는 다정하게 손을 잡고 발코니로 향했다. 짧은 시간 안에 많은 사람을 상대했더니 벌써 지치기 시작했다. 하지만 마리아는 군터에게 따질 일이 많아서 매우 흥분한 상태였다.
“군터, 영애들과 춤출 때 그렇게 허리를 바짝 끌어당길 필요가 있었어요?”
“뭐?”
대체 이건 무슨 경우지? 자신은 마리아가 헨리와 부부처럼 보여서 열불이 나서 죽겠는데.
“배운 대로 한 거다.”
“제가 언제 그렇게 바짝 끌어안으라고 했는데요?”
“나는 그냥 마리아랑 춤출 때처럼 한 것뿐인데.”
“그리고 잘 웃지도 않는 사람이 왜 그렇게 헤프게 실실거려요?”
“헤프게 실실?”
태어나서 그런 말 처음 들어 봤다. 살면서 크게 웃은 적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세상의 모든 신에게 맹세컨대 절대 다른 여자한테 실실댄 적은 없었다. 그런 자신에게 헤프게 웃는다고 타박을 주다니.
“마리아, 말과 행동이 너무 다른 거, 아닌가?”
“네?”
“질투하지 말고 예의 바르게 모든 귀부인과 기꺼이 춤추라고 했던 사람이 누구지?”
“그건……?”
마리아는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더는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고 보니 군터는 제게 배운 대로 했을 뿐인데, 어째서 그가 젊은 영애들과 춤추는 광경에 눈이 돌아갔을까. 그건 아마도.
“속상했나 봐요.”
10여 분의 침묵 끝에 마리아가 꺼낸 말이었다.
“응?”
“내 남자가 다른 여자와 함께 있는 모습이, 이론적으론 이해가 됐는데 막상 눈으로 보니 질투가 났어요.”
“질투?”
군터의 심장이 전장의 북처럼 둥둥 울렸다. 마리아가 저 예쁜 입으로 무어라 한 거지? ‘질투’라고 했나. 제 귀로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 그녀는 언제나 어른다워서, 혹은 왕비라는 소임 때문에 자신의 감정을 나름 자제할 줄 안다고 여겼다. 그런데 지금 제 앞에서 투덜대는 마리아는 천생 보통 여자였다. 더는 쓸데없는 실랑이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을.
군터는 그대로 마리아를 대리석 기둥 쪽으로 몰아넣은 뒤, 격렬하게 키스했다. 이내 그녀의 가는 두 팔이 군터의 목을 감쌌다. 뜨거운 숨결이 서로의 입술을 데웠다. 그의 혀가 집요하게 안까지 파고 들어와 그녀의 것과 엮이며 입맞춤은 깊어졌다. 하지만 너무 흥분한 걸까. 군터는 마리아의 한쪽 다리를 들어 올리곤 손으로 그녀의 속옷 안을 헤집었다.
“아……!”
마리아의 잇새에서 야릇한 신음이 새어 나오고 살짝 뜬 시야로 많은 것이 보였다. 물론 그녀의 시야를 꽉 채운 건 관능적인 군터의 얼굴이었다. 그런데 사람의 시야는 생각보다 넓어서 바로 옆, 발코니에 서 있는 남자와도 눈이 마주치고 말았다.
‘헨리.’
언제부터 보고 있던 걸까. 얼굴이 하얗게 질린 것을 보니 꽤 놀란 듯한데. 하긴 그와는 이런 적이 한 번도 없었으니까. 격식과 체면을 중요하게 여긴다며, 서로에게 일정한 거리를 두곤 했었다. 한데 돌이켜 보면 헨리에겐 군터한테 느끼는 불같은 감정이 애초에 없던 게 문제였다. 헨리는 금기를 깨고 일탈을 꿈꾼 적조차 없었다.
헨리는 격렬하게 키스하는 연인을 보고 놀랐다. 그들이 설마 마리아와 군터일 거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귀족과 왕족이 모인 연회에서 밀회를 즐기다니. 전혀 마리아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하지만 놀란 건, 비단 그것뿐만은 아니었다.
‘마리아도 여자였어.’
제게 마리아는 정숙한 아내였고 품격 있는 황후였다. 하지만 군터 앞에서 마리아는 아내라기보다는 연인, 아주 매혹적인 여자였다. 일부러 본 건 아니나, 자신이 멀리서 보기에도 마리아의 자태는 남자를 유혹하기에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더구나 임신하여 배가 나온 상태임에도 묘하게 사람을 자극하는 배덕감마저 느끼게 했다.
헨리는 그대로 돌아서서 두 사람을 외면했다. 그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무작정 걸었다. 어째서 이토록 화가 나는 걸까. 마리아에겐 느껴 보지 못한 질투심이 불길처럼 저 자신을 삼켜 버렸다. 헨리는 거칠게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등신처럼 무의식중에도 마리아를 쫓는 자신이 한심해서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 * *
군터와 마리아는 여러 귀족들과 교역에 관해 본격적으로 이야기했다. 한데 귀부인들은 눈치가 빨라서 마리아를 이젠 폐황후라기보다는 헬랜드의 안주인이라 인정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리아와 노라가 입은 드레스를 감상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드레스를 장식한 오묘한 보석을 어디서 구한 것인지 궁금해하는 눈치였다. 귀부인들이 입은 천편일률적인 드레스와는 확실히 차이를 보이기 때문일 터.
“쓸모없는 마석도 버리지 않습니다. 보석처럼 가공하면 이렇게 영롱한 빛을 뿜어내지요.”
노라가 조곤조곤한 어조로 그들의 궁금증을 풀어 주었다.
“그럼, 외국에 그 마석을 팔 의향은 있으신 건가요?”
후작 부인이 가장 큰 관심을 보였다.
“물론입니다. 인편으로 의뢰서를 보내 주시면 가공한 마석을 보내 드릴 수 있습니다.”
노라는 귀부인들을 상대하는 데 아주 능수능란했다. 중간에 거친 말투도 튀어나오지 않았고 크게 당황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노라의 흔쾌한 대답에 귀부인들은 너나없이 의뢰하겠노라 말했다.
그때였다. 흥건하게 취한 모니카가 마리아를 향해 다가왔고, 그녀는 일부러 인적이 드문 곳으로 향했다. 귀부인들이 있는 자리에서 모니카와 날 선 대립을 할 순 없으니까.
“로랑은 어떻게 했지?”
“이제야 로랑 걱정을 하시는 건가요?”
“죽였어?”
“아뇨. 죗값을 치르고 있어요.”
“죗값? 하, 웃기네. 자기가 부족해서 남편을 빼앗기고 왜 죄를 로랑한테 뒤집어씌워?”
“하!”
마리아는 한숨이 나왔다. 술에 취하더니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다. 모니카의 뇌리에는 로랑은 잘못한 게 없는 모양이다. 여전히 자신을 보면 남편을 빼앗긴 모질이 취급이니. 로랑이 얼마나 큰 죄악을 저질렀는지 알면서도 모른 척을 하니까. 이쯤 하면 많이 참아 주었지. 모니카가 정신을 차릴 수 있도록 극약 처방을 해야 할 터.
“소문으로 듣자 하니, 키르탄 왕자와 약혼까지 하셨다고 하던데요?”
“!?”
“찰스 대공의 방해로 무산이 됐다지요?”
마리아가 모니카의 아픈 곳을 건드리자,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그 광경을 코앞에서 목도한 마리아는 경악했다.
‘에로를 진짜 좋아했나 보네.’
마리아는 모니카가 누군가를 진심으로 좋아하고 슬퍼하는 모습에 이질감이 느껴졌다. 저 자신만 소중해서 자식인 헨리마저도 늘 뒷전인 여자였다. 그런데 눈물을 보여? 하긴 그랬으니 황실의 인장을 겁도 없이 에로에게 넘겼을 터. 그래도 막상 두 눈으로 확인하니 놀랍긴 했다.
“라스토니아로 오다가 키르탄 왕자에 대한 소식을 들었어요.”
“죽었다는 소식? 그런 거라면 일부러 확인시켜 주지 않아도 돼.”
“아뇨. 키르탄 왕자님은 죽지 않았다고 들었어요.”
“!?”
술에 취해 흐물거리던 모니카가 갑자기 정신을 바짝 차렸다. 그녀는 두 눈을 크게 뜬 채 마리아를 쳐다보았다. 그때였다. 연회장 입구 쪽이 매우 소란했다. 아직 도착하지 않은 귀빈이 있는 건가. 누군가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것 같은데.
“모니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