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황후 마리아-89화 (89/120)

89화

“내가 왔어요, 에론이 왔단 말이에요. 모니카!”

연회장 문 쪽에서 들려오는 급박하고 애절한 목소리가 연회장을 발칵 뒤집었다. 귀빈들은 플로어에 난입한 낯선 남자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하지만 모니카는 단번에 그의 목소리를 알아들었다.

“에론!”

마리아의 말이 예언처럼 맞아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아니,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에론이 죽지 않고 돌아왔으니, 제 눈으로 그의 얼굴을 확인하는 게 시급했다. 모니카는 에론의 목소리를 찾아 연회장을 헤매다 플로어 한가운데에서 그와 마주쳤다.

“모니카!”

에로는 주저 없이 달려가 모니카를 끌어안았고, 그녀는 한동안 넋이 나간 사람처럼 놀라더니 이내 서러움에 북받쳐 울었다.

“내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요?”

에로는 모니카의 얼굴을 재차 확인하며 애틋하게 소리쳤다. 두 사람은 주위를 전혀 의식하지 않은 채, 감격에 겨워 격렬한 키스를 했다.

“어디 좀 봐요.”

오랜 키스가 끝난 뒤, 모니카는 에론의 얼굴을 매만지며 오열했다.

“에론이 죽은 줄 알았어요. 아니, 죽었다고 소식이 왔어요.”

“죽긴요, 제가 모니카를 두고 어떻게 죽습니까? 하루라도 빨리 당신한테 돌아오려고 얼마나 노력했는데.”

“정말이요?”

“봐요, 이렇게 돌아왔잖아요.”

“사랑해요, 에론.”

모니카는 또다시 에로를 부둥켜안았다. 하지만 두 사람의 감격스러운 만남은 오래가지 않았다. 갑자기 나타난 찰스가 에로를 가격했기 때문이다.

쿵- 찰스의 발길질에 에로가 멀리 나가떨어졌다.

“이런 철없는 애송이 같으니! 내 아내한테 뭐 하는 짓이야?”

찰스가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고함을 버럭 질렀다.

“내 아내?”

에로는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양 소매를 걷어붙였다. 더는 일방적으로 당하지만은 않겠다는 듯 눈을 부릅뜨고 소리쳤다.

“벌써, 노망이 나셨나? 나의 모니카한테 내 아내라니!”

에로의 주먹이 찰스의 얼굴을 강타했다. 곧 연회장은 두 남자가 뒤엉킨 싸움판이 돼 버렸다. 귀빈들은 두 남자를 둘러싸곤 거친 몸싸움을 구경했다. 에로는 나이 많은 찰스를 거뜬히 제압하곤 그에게 소리쳤다.

“두 번은 안 당해.”

에로는 연신 찰스를 향해 주먹을 휘둘렀다. 퍽퍽- 찰스가 에로에게 일방적으로 폭행당하더니 결국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윽!”

찰스가 나가떨어지자, 에로는 바로 달려들어 그를 향해 주먹을 추어올렸다. 그리고 솔샤르에게 받은 특훈을 상기했다.

[부관님, 저는 싸움에는 소질이 없나 봐요.]

[에로, 네 말대로 연기를 한다고 상상해 봐.]

[연기요?]

[그래, 너 자신을 극 중에서 자신의 여자를 빼앗아 간 남자를 응징하는 주인공이라고 상상해 보라고.]

‘어디선가 노라가 보고 있을 텐데. 내 연기가 어떤지 똑똑히 보시라고요.’

에로는 제 여자를 빼앗겨 분노에 휩싸인 남자 주인공에 감정이입을 했다. 그러자 제 앞에 벌어지는 모든 상황이 달리 보였다. 어리고 연약한 약골이 아닌, 제 여자를 지키려는 진짜 남자가 되어 찰스를 응징했다. 한데 솔샤르의 방법이 이렇게 먹히다니. 그냥 싸우라고 하면 두려워서 시도조차 못 했을 텐데, 연극이라 생각하니 저도 모르게 신들린 연기를 하고 있었다.

에로의 폭행이 좀처럼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자, 시종들이 달려와 말리기 시작했다.

“에론 왕자, 멈추시오!”

결국 헨리가 달려가 두 사람의 싸움을 말렸다. 한데 모니카는 어느새 에로에게 찰싹 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엄마, 아니 어머니 이리 오시죠.”

헨리는 연신 주위의 눈치를 살피며 모니카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죽은 줄 알았던 사람이 살아 돌아왔어도 현실은 변하지 않는 법. 모니카는 엄연히 찰스와 혼인한 사이였다.

“싫어. 나는 에론과 함께할 거야.”

그때였다. 찰스가 부축하던 시종들을 뿌리치곤 모니카를 향해 달려갔다. 그는 단숨에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정확히는 모니카의 손목과 허리를 움켜잡곤 놓아주지 않았다.

“이거 놔! 씨……!”

모니카가 버둥거리며 찰스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해도 그는 절대 놓아주지 않았다.

“에론 왕자, 우리 조용한 곳으로 가서 이야기 나눕시다.”

“싫습니다. 여기서 하시죠.”

“뭐요?”

‘내가 왜? 관객들이 여기 있는데.’

순간 에로는 저 멀리 자신을 보며 희미하게 웃음 짓는 노라와 눈이 마주쳤다. 그리고 그 옆에는 군터와 마리아가 흥미진진한 얼굴로 자신의 연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내 마리아는 에로를 향해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껏 연기해도 된다는 뜻일 터.

“이봐요, 에론 왕자. 선황후께선 짐의 숙부인 찰스 대공과 며칠 전에 혼인하셨소.”

“그런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은 하지 마십시오. 모니카는 나를 두고 다른 남자와 혼인할 여자가 아닙니다.”

“아니, 왕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혼인하셨소.”

찰스의 말에 귀빈들이 소란스레 소리를 냈다. 마치 한 편의 연극이라도 보는 양, 개중에는 혀를 차며 안타까워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긴 치정극만큼 재미있는 장르가 또 있으려고.

“나의 모니카는 그렇게 지조 없는 여자가 아닙니다.”

에로는 헨리의 모든 말을 부정했다. 그러자 구경하던 귀부인들이 일제히 한숨을 내쉬었다. 사랑만 믿고 찾아온 가련한 왕자의 신세가 너무 안타까워 보고 있기가 힘들 정도였다. 연회장에 모인 사람들은 진실을 다 알고 있건만, 왕자만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모습에 그들이 대신 한탄했다.

“왕자, 믿고 싶지 않겠으나, 엄연한 사실이오.”

헨리는 너무 망신스러워서 사람들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에로만 보며 조금이라도 빨리 이 혼란을 수습하려 했다. 그제야 에로의 눈동자가 혼돈으로 일렁이며 모니카를 찾았다. 여전히 헨리의 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모니카를 바라보았다.

“모니카가 말해 주십시오. 폐하의 말씀이 맞습니까?”

“에론……. 그게.”

얼굴이 하얗게 질린 모니카가 입술만 달싹거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지? 낸시는 분명히 에론 왕자가 죽었다고 했다. 해서 자신이 얼마나 절망했는데. 모니카가 갈등에 휩싸이자, 찰스가 나직한 어조로 모니카에게 속삭였다.

“어서 진실을 말해. 나의 아내 모니카.”

찰스의 목소리에 모니카는 소름이 끼쳤다. 잠시 제 눈에 뭐가 씌었나. 이런 인간과 어떻게 혼인까지 했을까. 그냥 혀라도 깨물고 뒈져 버릴 것을.

“진짜 찰스 대공과 혼인했습니까?”

에로의 목소리가 불안하게 떨렸다.

“…….”

모니카는 차마 대답할 수 없어,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에로는 성큼 모니카에게로 다가와 소리쳤다.

“우리의 사랑이 그렇게도 나약했어요? 아니면 모니카는 원래 그런 여자였습니까? 설사 내가 죽었다고 해도 그렇지. 그사이를 못 참고 다른 남자와 혼인을 하다니.”

“에론을 향한 내 마음은 진심이에요. 진짜 난 에론을 사랑한단 말이에요. 믿지 않겠지만……. 태어나서 처음으로……!”

“하!”

에로가 실소를 터뜨리는 바람에 모니카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거짓말, 내가 어리고 경험도 없으니 마음껏 가지고 놀고선……!”

“아니, 아니! 에론, 그런 거 아니에요!”

모니카는 억울하여 발을 동동 구르며 반론했지만, 이미 에로의 눈빛은 차갑게 식어 버린 뒤였다. 또한 이 광경을 지켜보던 사람들의 반응도 좋지 않았다.

“쯧쯧, 저 순진한 왕자 보소. 선황후의 남성 편력이 얼마나 화려한지도 모르고.”

“그러게요. 불나방처럼 덤볐다가 상처만 입었네요.”

“불쌍해서 어쩌나.”

“불쌍하긴요? 솔직히 수렁에서 잘 빠져나온 거죠. 저렇게 잘생기고 돈 많은 왕자인데.”

“하긴 젊고 아름다운 귀족 영애들이 줄을 서겠어요.”

에로는 참혹한 얼굴로 모니카를 바라보다 말문을 열었다.

“모니카, 앞으론 사랑이란 말로 남자들을 농락하진 말아요.”

“에론, 제발! 내 말 좀 들어 봐요. 나는 에론을 정말로 사랑한단 말이에요!”

“남편과 오래오래 행복하길 바랍니다.”

에로는 멸시와 경멸이 가득한 눈으로 모니카와 찰스를 보곤 그대로 돌아서서 주저 없이 연회장을 나갔다.

“에론! 제발 돌아와요! 내가 다 해명할 테니! 날 버리지 말아요!”

모니카는 찰스한테서 벗어나 에로에게 가려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대신 헨리가 다급하게 에로의 뒤를 쫓았다.

“에론 왕자!”

헨리의 부름에 그는 성난 걸음을 멈춰 섰다. 그 때를 낚아챈 헨리는 바로 에로의 앞으로 달려가 그에게 물었다.

“어머니와의 일은 참으로 유감이오. 짐이 대신 사과하리다.”

“이제 와 사과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제게 더 하실 말씀이 없으시면…….”

“저기, 그날 밤 말이오.”

혼사가 깨졌으니 왕자는 1000만 골드짜리 어음을 회수하려고 할 터. 하지만 헨리는 그 돈이 반드시 필요했다. 어떻게든 에로를 이해시킨 뒤, 돈을 빼앗기지 않는 게 급선무였다.

“사고가 있던 날 밤, 키르탄의 호위대장이 찰스 대공에게 파혼을 선언했다던데……. 그럼 혼인이 깨진 귀책 사유는 엄연히 에론 왕자 쪽이 아닌가 싶은데 말이오?”

“아, 그까짓 1000만 골드짜리 어음 말씀입니까?”

에로는 헨리가 다급하게 자신을 쫓은 이유를 단박에 알아차린 양 먼저 돈 얘기를 꺼냈다.

‘그까짓 1000만 골드?’

근본도 없는 변방의 졸부가 지금 라스토니아 황제를 돈으로 짓밟고 있는 건가. 헨리의 얼굴에 분노가 차올랐다. 동시에 돈 때문에 비굴하게 부탁해야 하는 제 처지에 울화가 치밀었다.

“그 정도 푼돈, 구차하게 돌려받고 싶지 않습니다. 아, 그래도 폐하의 살림에는 큰 보탬이 되겠군요.”

에로는 세상에 둘도 없는 속물을 보듯 헨리를 향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러자 헨리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자신이 어쩌다가 저런 근본도 없는 족속에게 이런 수모를 당해야 하는지. 예전 같았으면 상대조차 해 주지 않았을 터.

‘아! 어쩌다가 내 신세가 × 같아졌지?’

헨리는 주먹을 쥔 채 부르르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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