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황후 마리아-90화 (90/120)

90화

추문과 막장으로 얼룩진 연회는 일찍 파투가 나 버렸다. 사람들은 돌아가고 남은 귀빈이라곤 마리아 일행뿐이었다. 노라는 에로의 신들린 연기의 여운에서 빠져나오지 못했다. 정말이지 에로는 자신이 알던 사람이 아닌, 천생 키르탄 왕국의 왕자였다. 특히 찰스를 무자비하게 폭행할 때는 멋있기까지 했다.

“아아아악!”

모니카의 괴성에 노라는 화들짝 놀라 몸을 움찔거렸다. 그렇지, 아직 연극이 끝나지 않은 것을. 치정극 2부 관람이 여전히 남아 있었다. 모니카는 낸시의 멱살을 잡아 흔들며 비명을 질렀다.

“다 너 때문이야. 네년이 나와 에론을 이간질해서 이 사달이 난 거라고.”

“진정하세요. 저는 틀림없이 에론 왕자가 죽었다는 서신을 받았어요. 지금이라도 보여 드릴까요?”

낸시도 억울해서 같이 소리를 높였다.

“그래, 보여 줘 봐.”

헨리가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대체 일이 어디서 어떻게 꼬인 건지 하나씩 풀어 봐야겠다. 마리아는 그런 헨리를 보며 실소를 터트렸다. 그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무슨 일이 터지면 늘 남의 탓을 했다. 근본적인 원인은 따로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다른 이를 탓할 구실을 찾는 버릇, 그것만은 개 못 주지.

‘변한 게 없네. 헨리.’

마침 낸시가 제 시녀를 시켜서 서신을 가져오게끔 했다. 마리아는 곧 무슨 일이 일어날지 불 보듯이 훤하기에 굳이 자리를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군터, 저 피곤해요.”

마리아는 군터의 가슴에 머리를 기댄 채 봄바람처럼 속삭였다. 이내 군터가 헨리를 향해 눈치를 주었다.

“헬랜드 대왕과 왕……비, 아니 그 일행분들을 별궁으로 모셔라.”

헨리는 시종들에게 명령하면서도 차마 마리아를 헬랜드의 왕비라 칭할 수가 없었다. 엄연히 아직은 아니니까.

“황제, 내일은 새 황후의 책봉식이 있지 않나?”

“그렇소. 정무대신과 주교만 참석하여 약식으로 진행할 생각이오.”

“그러면 우리가 유일한 내빈이 되겠군.”

“!”

헨리는 놀란 얼굴로 마리아와 군터를 바라봤다. 굳이 낸시의 황후 책봉식까지 챙겨서 보겠다는 건가. 그럴 필요까진 없는 것을. 저들과는 따로 날을 잡아 일을 마무리하면 되는데. 참석하지 말라고 할 수도 없고. 헨리는 고민했지만, 어차피 낸시를 황후로 책봉하는 건 정해진 절차기에 감출 필요는 없었다. 다만 마리아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아서 그럴 뿐이지.

마리아와 군터는 시종들을 따라 별궁으로 향했다.

‘헨리, 너는 내일 울면서 낸시를 황후로 책봉하게 될 거야.’

마리아는 미소를 머금은 채 헨리와 인사하곤 돌아선 후에는 싸늘한 얼굴로 그의 우매함을 되뇌었다. 마리아는 막 연회장을 나갈 무렵, 서신을 가지고 돌아온 시녀와 스쳐 지났다. 저 시녀의 손에 들린 서신으로 다시 한번 이곳은 비명이 난무하는 아수라장이 될 터.

“마리아, 안아 줄까?”

“그럴래요? 별궁까지 꽤 먼데.”

이미 군터는 마리아를 번쩍 안은 뒤 성큼성큼 연회장을 빠져나갔다. 헨리는 그들의 뒷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어째서 마리아한테서 신경이 떨어지지 않는지 모르겠다. 마리아가 돌아온 순간부터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크게 보였다. 예전에는 미처 몰랐던 미세한 표정까지 다시금 발견하게 되었다.

“꺄아아악!”

또다시 모니카의 비명이 헨리의 상념을 무참히 깨뜨렸다. 모니카는 서신을 읽곤 치를 떨었다. 아니, 그대로 낸시의 얼굴에 따귀를 날렸다.

“이 나쁜 년! 네가 내 인생을 망쳤어!”

모니카의 두 손이 정신없이 낸시를 때리고 헨리는 구겨진 서신을 주워 내용을 확인했다. 일전에 낸시가 시녀 라모나에게 에론 왕자의 생존에 관해 묻자 그녀가 보내 온 답신이었다.

<에론 왕자님이 크게 다치셨지만, 목숨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곧 선황후 전하를 찾아가실 예정이라고 하셨습니다.>

한 장도 아니고 두 장 모두 같은 내용이었다. 에론 왕자는 무사하며 모니카를 그리워한다는……. 헨리는 허망한 얼굴로 모니카와 낸시를 응시했다.

“그럴 리가 없는데. 틀림없이 왕자가 죽었다고 했단 말이에요!”

낸시는 정신이 반쯤 나간 여자처럼 같은 말만 중얼거렸다. 그럴 리 없다고, 분명히 왕자가 죽었노라 답신이 왔었다고. 무언가 일이 크게 잘못되었노라고. 낸시는 같은 말을 여러 번 반복했다. 하지만 그녀의 결백을 증명할 만한 마땅한 증거는 없었다.

‘뭐지? 왜 일이 복잡하게 꼬여만 가는 걸까.’

헨리는 허공을 바라보며 한탄했다. 왠지 자신이 줄 달린 인형처럼 누군가에게 조종당하는 것만 같았다. 그는 광기에 사로잡혀 미친 여자처럼 날뛰는 모니카를 뒤로한 채 연회장을 나왔다. 오늘 밤, 그 광기의 희생양은 낸시가 될 터. 하지만 그녀를 구해 줄 만큼 제 마음도 그리 녹록지는 않았다.

‘처음부터 낸시한테 놀아난 건가.’

그녀가 하자는 대로 했으니, 그 책임은 오롯이 낸시 아크만이 져야 할 터. 우선은 이 지옥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제 머리가 터져 버리고 말 테니까.

* * *

마리아와 군터는 별궁의 작은 후원으로 밤 산책을 나왔다. 하얀 대리석 파고라에 달빛이 쏟아지는 광경은 예전과 똑같았다. 두 사람은 의자에 앉아 밤 풍경을 감상했다.

“돌아오니까 어때?”

군터는 마리아의 심경이 궁금했다. 그녀가 10년간 살았던 곳. 아무래도 만감이 교차하겠지.

“낯설어요.”

“낯설다고?”

의외의 대답이었다. 마리아가 헬랜드에서 산 건 고작 1년 정도밖에 안 됐다. 한데 이곳이 낯설다는 말은 뜻밖의 대답이었다.

“이젠 헬랜드 왕궁이 우리 집 같아요.”

“그런가.”

군터는 꼬물대는 입꼬리를 감출 길이 없었다. 눈 감고서도 어디에 무엇이 있는지 훤히 아는 황궁임에도 낯설다니. 그만큼 정을 뗐다는 소리겠지.

“저도 놀랐어요. 전혀 낯설지 않은 곳인데, 생전 처음 오는 것처럼 생경하달까? 말이 좀 이상하죠?”

“듣기 싫은 말은 아니다.”

반대로 너무 좋아 죽겠지만, 속내를 다 드러내는 건 경박한 짓이라고 마리아한테 배웠다. 일국의 군주는 감정을 다 드러내선 안 되며 왕이라는 위치에 걸맞게 체통을 지켜야 한다고 말이다.

“솔직히 처음에는 복수심에 치받쳐 이곳을 참혹하게 짓밟을 계획이었어요. 그런데 지금은 아니에요.”

“왜 아니지?”

“복수보다는 바로잡고 싶어요. 무능한 황족 때문에 라스토니아 사람들이 고통받을 이유는 없는 거니까. 그리고 제 복수심에 그들까지 희생시키고 싶지 않아요.”

오히려 조금이라도 빨리 일을 마친 뒤 라스토니아 황궁에서 떠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데 10년간 황궁 곳곳에 제 손길이 닿은 곳들이 보여 마음이 아팠다. 이 복잡한 심경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손님 아닌 손님처럼 아주 불편한 마음이랄까.

“예뻤다.”

“응?”

뜬금없이 예뻤다니? 마리아가 의아한 얼굴로 군터를 보자, 그의 손이 마리아의 얼굴을 감쌌다. 사실 마리아가 복수의 화신이 되어 독기를 철철 뿜어낼 거라 여겼다. 한데 제 손을 잡고 의연하게 연회장으로 들어설 때, 새삼스레 그녀가 미치도록 아름답다고 느꼈다. 뭐랄까, 외적인 아름다움이 아니라, 그녀 안에서 뿜어져 나오는 여유와 제 앞에 벌어진 일을 당황하지 않고 관망하는 자세, 마리아가 보여 주는 모든 행동이 경이로웠다.

“강해진 것 같다는 말인데, 내가 표현력이 없다 보니.”

“예쁘다만큼 최고의 표현은 없는 것 같은데요? 저는 할머니가 되어도 군터가 예쁘다고 해 줬으면 좋겠어요.”

“후!”

군터는 울 것 같은 표정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좋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가슴이 뛰었다. 사람이 사람을 좌지우지하는 건 권력뿐이라고 생각했는데, 보이지 않는 사랑이 이토록 큰 힘을 가졌을 줄이야.

“왜요? 기……분 나빴어요?”

“아니, 반대였어.”

무어라 더 물을 사이도 없이 그의 숨결이 밀려왔다. 맞물린 입술 사이로 끈적한 애정이 오고 갔다.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운 밤, 적진에서 서로의 깊은 감정을 들여다보게 될 줄은 몰랐다.

하지만 먼 곳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던 헨리는 허망하게 돌아섰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세상에서 마리아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저 자신이었다. 그녀는 태어날 때부터 고귀했다. 그러니 저와 같은 부류는 쉽사리 변하지 않는 법이다. 스튜어트가와 코부르크 황가는 수백 년을 이어 온 가문으로서 명예를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긴다. 게다가 마리아는 어릴 때부터 황후 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한데 그런 여자가 야만인의 아내가 되었다니. 이미 알고는 있으나 둘이 달빛 아래에서 키스하는 광경에 확신이 들었다. 모든 게 의도적으로 계산된 행동이라고. 하지만 이성은 그렇게 판단을 내렸으면서도 감정은 반대로 흘렀다. 발끝부터 자글자글한 열기가 타고 올라와 뇌 속까지 태우는 불쾌함, 심장이 쿵쾅대다 못해 아팠다.

‘일부러 나한테 보여 주려는 거지? 지금도, 발코니에서도.’

아무리 고민해도 마리아가 의도적으로 제게 보여 주려는 것일 터. 어떻게 사람이 짐승과 감정을 교류할 수 있지. 그건 말이 안 됐다. 천하의 마리아 스튜어트가 명예를 내려놓는다고. 아니, 이건 쓸데없는 핑계일 뿐. 현재 제 감정을 집어삼킨 건 명백한 질투였다. 그리고 강한 부정과 깨달음이었다.

‘내가 어리석었어. 마리아는 완벽했는데…….’

어째서 사람은 두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몸소 겪어야만 잘못됐음을 깨닫는 걸까. 군터 곁의 마리아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것을. 아니, 그녀의 자리는 군터의 옆자리가 아니었다.

헨리는 제 감정에 솔직해지기로 했다. 사실 마리아가 1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을 때, 충격도 컸지만, 한편으론 마땅히 돌아올 사람이 왔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비로소 그녀가 제자리를 찾은 것만 같달까. 무엇보다 마리아는 라스토니아를 포기할 여자가 아니었다. 가문과 제국에 대한 자부심이 누구보다 강했기에, 모든 것을 되찾고 싶을 터. 한데 그건 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되돌리고 싶어. 전부 다.’

그러려면 마리아가 먼저 제자리로 돌아오는 게 순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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