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1화
마리아와 군터가 밤 산책을 마치곤 별궁으로 돌아가려던 차였다. 그런데 한 남자가 두 사람이 지나는 길목을 막아섰다. 군터는 본능적으로 마리아를 자신의 등 뒤로 숨긴 뒤였다.
“누구냐?”
낯선 남자는 군터의 물음에도 아무런 대답 없이 두 사람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왔다. 이내 후원을 밝히는 석등에 비친 남자의 정체가 드러났다.
“황후님.”
군터의 등 뒤에 있던 마리아는 깜짝 놀랐다. 자신을 황후라 부르는 목소리가 귀에 익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곧바로 앞으로 나와 남자를 확인했다.
“앤드류?”
“예, 저 앤드류입니다.”
그제야 남자는 제 이름을 말하곤, 군터에게도 공손하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저는 앤드류 코부르크라고 합니다.”
“군터, 황실 사람이에요.”
마리아가 재빨리 앤드류를 군터에게 소개했다.
“그런가.”
군터는 앤드류를 빠르게 살폈다. 황족이라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몰랐을 정도로 검소한 차림새에 외모도 평범했다. 익히 알고 있는 황족과는 거리가 멀달까. 게다가 막 소년티를 벗은 어린애였다. 눈이 나쁜지 안경을 쓴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제 주위에는 머나먼 들판의 개미도 알아볼 만큼 시력이 좋은 사람들만 존재하니까. 예고도 없이 불쑥 나타난 앤드류는 마리아의 손을 덥석 잡곤 고개를 숙인 채 오열했다.
“황후님, 송구합니다. 그 모진 고난을 겪으시는데도 제가 아무런 도움이 되어 드리지 못했습니다.”
“앤드류가 미안해할 필요 없어요.”
“제가 아버지를 설득해서라도 폐하의 폭정을 막았어야 했습니다.”
‘아버지?’
군터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마리아는 그에게 나직하게 읊조렸다.
“찰스 대공의 외동아들이에요.”
“!?”
그의 두 눈이 커다래졌다. 이게 뭔 일이지, 그 능구렁이 같은 인간과 앞에 있는 젊은이가 부자 관계라니. 어떻게 저렇게 다를 수가 있는지 모르겠다. 정말이지, 조물주의 심보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탐욕과 권모술수를 마다하지 않는 찰스의 아들이라고 하기에는 앤드류는 심하게 선하고 강직해 보였다. 거기에 안경까지 써서 그렇게 보이는 것인진 몰라도 무척 똑똑해 보였다.
“앤드류, 황실 연회에 잘 참석하지 않는데 오늘은 나 때문에 왔어요?”
“네, 그렇습니다. 정말이지, 황족의 일원으로서 황후님께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앤드류는 헨리의 무능한 정치와 부패한 귀족들의 폭정에 대해 한바탕 분노를 터뜨렸다. 제임스 공작이 재상일 시절에는 민주적이며 제국민을 위한 정치가 이뤄졌는데, 이젠 나라의 형태만 갖췄을 뿐, 망하기 직전이라며 한탄했다. 그런데도 정작 황족인 자신은 무기력하고 아버지라는 사람은 호시탐탐 황위만 노린다는 말을 서슴지 않았다.
“1년 만에 나라를 등진 제국민만 해도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그는 헨리가 세금을 높이며 횡포를 부리는 바람에 제국민들이 얼마나 고통받고 있는지 모른다며 눈물을 흘렸다. 마리아는 그런 앤드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왠지 그를 만난 건, 우연이 아니라 기회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앤드류, 지금이라도 나를 돕겠다는 소리로 들리는데요? 맞나요?”
“예? 그렇습니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대답은 했으나 앤드류의 눈동자가 매우 복잡했다. 혹여 마리아가 헨리에게 사사로이 복수라도 하고 싶은 건가. 해서 제게 도와 달라는 거고?
“맞아요. 하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에요.”
마리아는 앤드류의 기우를 읽곤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죄악이 죄악인 줄 모르는 사람들을 일깨워 주려는 것뿐이에요. 무엇보다 나는 라스토니아 사람들을 원망하지 않아요.”
“황후님을 믿습니다.”
“왜 믿지?”
두 사람의 대화에 군터가 불쑥 끼어들었다. 굳이 알지도 못하는 남자에 대해서 신경 쓸 필요는 없지만, 그가 마리아를 믿는다는 말이, 그녀를 좋아한다는 말로 들렸다. 과잉 반응인 거 아는데도 이곳은 헬랜드가 아니니 매사 신경이 곤두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예?”
“무얼 보고 믿느냐고?”
군터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막고는 앤드류를 향해 고압적으로 물었다. 사전에 약속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 마리아와의 시간을 방해하는 앤드류의 행동이 거슬렸다. 마리아에게 이런 제 속내를 말하면 속이 좁다 여기겠지. 하지만 그녀와의 시간은 눈곱만큼도 타인에게 침해받고 싶지 않았다.
“군터, 겁주지 말아요.”
앤드류는 이제 겨우 스무 살이 되었을 터. 자신이 알기론 앤드류는 다른 황족과 다르게 공부만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승마나 검술, 기본적인 무예에는 아예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대왕과 같은 이유입니다.”
앤드류는 고개를 꼿꼿이 세우곤 군터를 정면으로 응시했다. 한데 그의 얼굴에는 일말의 두려움도 묻어나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은 군터를 보면 두 가지의 반응을 보였다. 남성미가 물씬 풍기는 완벽한 외모에 놀라고, 사람을 압도하는 강한 기운에 기가 질렸다. 하지만 앤드류와 같은 반응을 보인 사람은 없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와 같은 이유?”
“대왕께선 황후님의 무얼 보고 믿으십니까?”
되레 역공을 당했다.
“나? 너와 같은 이유다. 그러면 너는 마리아의 무얼 보고 믿느냐?”
“대왕과 같은 이유입니다.”
“나도 그렇다.”
“제 이유를 아십니까?”
“너는 내 이유를 아느냐?”
“예, 황후님이시니까요.”
“마리아니까.”
두 남자의 어이없는 말싸움에 마리아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한데 그들도 현 상황이 우습다고 느꼈는지 서로를 보며 실소를 터뜨렸다. 되레 마리아는 그 상황이 놀라웠다. 자신이 아는 군터나 앤드류는 그리 웃음이 많은 사람이 아니었다. 군터는 우직하고 무뚝뚝한 편이며, 앤드류는 매사 분석적이고 예민한 편이었다. 상극인 사람이 말싸움하다가 허무하게 웃어 버릴 수 있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군터는 앤드류가 마음에 들었다. 자신이 인생을 아주 오래 산 건 아니어도 누구보다 굴곡지게 살아 봐서 사람을 보면 대략 성향을 알 수 있었다. 단언컨대 앤드류는 정직하고 고지식하며 마음이 강한 남자였다. 역시…….
‘신들이 농간을 부린 거야.’
군터가 거칠게 도리질했다. 무슨 조홧속인지 앤드류가 궁금해졌다.
“나에 대해서 알고 있나?”
그에게 뜬금없이 이런 질문을 한 데에는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노예 출신으로 10년 만에 북부의 버려진 땅, 헬랜드에 왕국을 세우신 분이죠. 몸과 마음이 강한 분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앤드류의 대답이 군터가 질문한 이유였다. 황족 혹은 귀족들은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한결같이 똑같았다. 하지만 그들과 다른 사람이 딱 두 명 있었다. 한 명은 당연히 마리아였고, 나머지 한 명은 앤드류였다. 그와 말싸움을 하는 동안 열다섯 살의 마리아의 얼굴이 얼핏 스쳤기 때문이다.
“내가 훌륭하다 여기겠군.”
군터는 팔짱을 끼며 으쓱거렸다.
“대단한 건 알겠지만, 인품이 훌륭하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째서지?”
“모르십니까?”
“그래, 모르겠다.”
“그야 대왕과 저는 초면이니까요.”
“아, 그렇군.”
마리아는 두 사람의 시답잖은 대화를 지켜보다가 기어이 크게 소리 내 웃었다. 오래간만에 유치한 군터도 어이없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받아 주는 앤드류도 놀라웠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대화는 어느 정도 지속이 되었다. 이내 마리아가 앤드류에게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
“앤드류의 신념에 어긋나는 일일 수도 있는데 할 수 있겠어요?”
“황후님만 도울 수 있다면 뭐든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그러면 나 좀 도와줘요.”
일순간 마리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 * *
낸시는 제 궁으로 돌아와서도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로 오랫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대체 서신의 내용이 어떻게 바뀐 거지. 누군가가 주술을 쓴 건인가. 라모나의 언니가 점성술사라고 했으니, 혹여 장난질을 한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무슨 이유로? 저와 라모나는 아무런 원한이 없는데. 그렇다고 라모나가 헬랜드 사람도 아니었다. 랑데스의 시골 출신인 것을 진즉에 확인했다. 그러니 마리아와 연관되었을 리 만무했다.
‘너무 허무맹랑한 일이잖아. 라모나는 고향에 있는데, 무슨 수로?’
아주 잠깐 라모나한테 속은 건 아닌지 의심도 해 보았으나, 그건 억측이었다. 그나저나 이젠 앞일을 걱정할 때였다. 더는 헨리를 압박할 만한 패를 가지고 있지 않은데……. 그러다 불현듯 옛일이 떠올랐다.
‘그렇지. 제임스 스튜어트 공작님을 모함하기 위해 내가 필사하는 사람에게 의뢰했잖아.’
마리아가 황후 시절 공작가와 주고받은 서신을 자신이 보관하고 있었고, 제임스 공작의 필체를 마리아만큼 잘 아는 사람이 바로 저 자신이었다. 그래서 제임스가 반역을 꾀한 것처럼 완벽한 거짓 문서를 만들 수가 있었다. 그것으로 스튜어트 공작가를 멸문시키는 데 성공한 것이다.
‘그 필사가는 나만 알고 있어.’
그나마 천만다행이었다. 그것으로 만에 하나 있을 일에 대비할 심산이었다. 낸시는 불안하게 방을 서성거리다 밖으로 나왔다. 이렇게 괴로운데도 헨리에게 확인받고 싶은 마음. 이건 필시 집착이었다. 진즉에 오롯이 사랑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집착 내지는 자신이 저지른 죄악에 대한 합리화를 위해선 사랑이란 구실이 필요했다.
때론 헨리한테서 벗어나고 싶지만, 끝내 그의 눈길, 손길, 숨결을 거부할 수 없었다. 이 지긋지긋한 애증과 집착이 저 자신을 좀먹고 결국에는 파멸시킬까 두려웠다.
‘폐하는 지금 어디에 계시지?’
낸시는 그가 궁금했다. 마리아의 곁을 서성이고 있을까? 그녀 앞에 무릎을 꿇은 채 미안하다, 자신이 잘못했으니 돌아와 달라 용서를 구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안 돼, 마리아한테 헨리를 빼앗길 순 없어.’
낸시는 그대로 헨리를 찾아 침실을 뛰쳐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