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화
‘내 할 일은 이것으로 끝난 거 맞아?’
에로는 연회장을 한껏 들쑤셔 놓곤 바로 황궁을 빠져나왔다. 에로가 선두에서 말을 달리자 붉은 군대가 뒤따랐다. 물론 사람들은 그들이 헬랜드의 전사들임을 알아채지 못했다. 한데 음산한 기운이 밤공기를 타고 와 에로의 뒷덜미를 오싹하게 했다.
“미행당하고 있습니다.”
에로를 바로 곁에서 호위하는 병사가 다가와 조용히 말해 주었다. 제 예상대로라면 미행하는 자들의 정체는 아마 찰스 대공일 터. 연회장에서 개망신을 당했으니 보복이라도 하려는 거겠지.
“몇 명이나 돼요?”
“우리보다 수는 적습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찰스가 연회에 온답시고 많은 사병을 이끌고 오진 않은 모양이다. 하지만 도망친다고 대수가 아닌 것을.
“멈추세요!”
에로는 찰스에게 당당히 맞서기로 했다. 막연하긴 하나, 찰스에게 무언가 큰 소득을 얻어 낼 수도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니면 좀 더 놀려 먹어도 좋겠지. 아직 제 연극은 끝이 나지 않았으니까.
에로가 멈춰 서자 붉은 군대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그녀를 둥그렇게 감쌌다. 얼마 뒤, 찰스가 병사들을 이끌고 에로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저를 뒤쫓으신 겁니까, 대공?”
에로는 무심한 어조로 물었다. 그에 반해 다급하게 달려온 찰스는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아들뻘에게 당했으니 분하기도 하겠지. 더구나 라스토니아의 대공 체면은 복구할 수 없을 정도로 땅에 떨어졌을 테고.
‘뭐야, 여기서 2차전이라도 하자는 거야? 그럼 나는 또다시 싸움 연기에 몰입해야 해?’
에로는 골치가 아팠다. 사실 연회장에선 자신이 어떻게 싸웠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솔샤르의 조언대로 연극이라 상상하고 심하게 몰입했을 뿐이지. 또한 노라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어서 아주 대단한 열연을 펼친 터였다. 하지만 지금은 굳이 감정이입까지 하며 싸우고 싶진 않았다.
‘싸우는 연기는 그만하고 싶은데, 대화로 하지.’
“물어보고 싶은 게 있다.”
“!?”
에로는 찰스의 뜻밖의 말에 놀랐다. 그와 저 사이에 할 이야기가 더 남았나. 한데 저 능구렁이 같은 늙은 사내의 말을 순진하게 믿을 자신이 아니었다. 언제 돌변할지 모르니까.
“분해서 오신 게 아닙니까?”
“어험.”
그 부분에 관해선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는 듯했다.
“모니카를 진짜 사랑한 건가?”
찰스는 격앙된 어조로 물었다.
“내 보기엔 아닌 것 같은데, 모니카한테 무슨 원한이 있는 것 같단 말이지.”
사랑에는 나이도 국경도 없다곤 하지만, 앞날이 창창한 부유한 왕국의 젊은 꽃미남 왕자가 어머니뻘 되는 여자를 사랑한다? 그럴 수도 있겠지. 세상에는 별종도 많고 변수도 종종 일어나니까. 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한 가지가 있었다.
에론 왕자가 진심으로 모니카를 사랑했다면 이토록 쉽게 물러서면 안 되는 거였다. 어떻게든 제 여자를 되찾으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았어야지. 한데 너무 뻔한 전개에 빠져나갈 구멍이 심하게 타당해서 오히려 더 이상했다. 더구나 모니카가 빼낸 그 물건이 에론 왕자의 수중에 있을 터. 이대로 그냥 관계를 정리하는 건 다분히 의도적이란 생각밖에는 안 들었다. 무엇보다 모니카가 에론 왕자에게 그 물건을 돌려 달라고 쉽사리 말할 수도 없게 돼 버렸다.
“역시……!”
에로는 찰스의 의구심에 동조한다는 듯한 표정을 짓곤 말에서 내려 그에게로 다가갔다.
“라스토니아의 황제가 되실 분은 다르시군요.”
“!?”
“황권이 바로 서야 나라가 번영하는 법. 저는 진즉에 알고 있었습니다. 대공께서 진짜 이 나라의 황제가 되셔야 한다는 것을요.”
“뭐?”
붉으락푸르락했던 찰스의 얼굴이 서서히 평온을 되찾으며 그의 입가가 미세하게 떨렸다. 처음에는 잡아죽일 심산으로 쫓아왔는데, 언제 그랬냐는 듯이 에로가 하는 말이 마음에 쏙 들었다.
“예, 대공의 말씀이 옳습니다. 저는 모니카 선황후에게 원한이 있어 일부러 접근했습니다.”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네.’
에로는 자기가 말하면서도 앞뒤를 어떻게 맞춰 나가야 할지 암담했다. 그저 되도록 찰스를 적으로 두지 말라는 마리아의 조언이 생각나 충동적으로 내지른 말이었다. 또한 여기서 찰스와 싸워 봐야 제 상황만 피곤해질 뿐.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
“저의 어머니는 젊은 시절 모니카의 시녀였습니다.”
“시녀였다고?”
“모니카의 모진 핍박과 괴롭힘으로 인해 무척 힘들어하셨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다 추운 겨울밤에 궁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더군요. 물론 지금이야 아버님과 혼인하여 키르탄의 왕족이 되셨지만, 모니카에게 당한 일은 평생 상처로 남아 지금도 괴로워하십니다.”
‘그러면 그렇지. 사랑은 무슨? 하긴 모니카가 보통 지독했어야지.’
한데 시녀 중의 누구였는지에 대해선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모니카를 거쳐 간 시녀가 한두 명이어야지. 웃음소리가 마음에 안 든다고 쫓아낸 시녀도 있고, 황제를 오래 쳐다봤다는 이유로 심하게 벌을 준 나머지 죽어 버린 시녀도 있는 것을. 모니카가 여기저기에 원한 살 일을 많이 했다. 그래서 모니카에게 영원히 씻을 수 없는 사랑의 상처를 주고 싶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대공께서도 모니카를 사랑하지 않으시잖습니까?”
이번에는 에로가 찰스의 정곡을 찔렀다.
“어험-”
그는 헛기침하는 것으로 대답을 갈음했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아주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가 있었다.
“그 물건은 가져와.”
“그 물건이 없어야 대공께 유리하실 텐데요?”
“뭐라고?”
“행방이 묘연해야 대공께 명분이 생기지 않겠는지요.”
에로는 절제된 미소를 지으며 찰스를 응시했다.
* * *
마리아와 군터는 산책을 마치고 목욕을 한 뒤, 잠자리에 들기 위해 침대에 누웠다. 물론 두 사람의 시중은 헬랜드에서 데려온 궁인들이 직접 들었다. 지금은 손님으로 왔으나, 본격적인 이혼 협상에 들어가게 되면 라스토니아 황궁은 곧 적진이 될 테니까.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를 터. 그러니 매사 조심해야 했다. 그러나 오늘 밤만큼은 편히 잠들고 싶었다.
“그래도 마리아에겐 이곳이 더욱 익숙할 거다.”
환경적으론 낯설지 않으니 그런 면이 없잖아 있긴 했다. 한데 갑자기 마리아의 말수가 줄더니, 큰 고민에 빠진 양 얼굴이 심각했다.
“헬랜드로 돌아가기 전에, 스튜어트가에 들러도 될까요?”
오래전부터 가 보고 싶었다. 그날의 참혹했던 일들을 전해 들었지만, 왠지 제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혹여 부모님의 물건이라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보면 마음 아플 텐데.”
“그래도…….”
군터는 마리아가 처절하게 무너진 공작저를 안 봤으면 했다. 단언컨대 마리아는 그곳의 참상을 직접 목도하면 아주 오랫동안 괴로워할 것이다. 헨리의 군대와 랑데스의 용병들이 얼마나 무자비했는지, 풀 한 포기 남기지 않고 전부 태워 버렸으니까. 그러나 마리아를 위로할 무언가가 필요한 시점이긴 했다.
“마리아, 나도 너의 부모님이 반드시 살아 계실 거라고 믿는다.”
“고마워요. 힘이 돼 줘서.”
군터는 안타까웠다. 그녀의 부모님이 살아 계신다고 확신을 주고 싶으나, 저 자신조차 아직 그들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참혹했던 그날 밤, 저 나름대로 병사들을 보내 그들을 살리려 했으나 상황이 아주 복잡하게 얽히는 바람에 무어라 단정 지을 수가 없었다. 그저 마리아에게 미안할 따름이었다. 좀 더 빨리 움직여 그녀의 부모님을 구해 냈어야 했는데.
“나도 여기저기에 사람을 보내 놨으니, 곧 소식이 올 거다.”
“정말이요? 고마워요, 군터.”
마리아는 두 뺨에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훑어 냈다. 지금으로선 제발 스톤의 예언이 옳기를 간절히 바랄밖에.
“미안하다.”
“군터가 미안해할 일은 아니에요.”
정작 자식이며 황후였던 저 자신은 가족을 제대로 지키지 못한 것을. 군터가 애써 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또한 그는 헨리의 손에서 자신을 구해 냈다.
“하지만 나는 믿는다. 마리아의 부모님은 그리 쉽게 죽을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너처럼 강하실 테니까.”
그의 말이 큰 위로가 되었다. 군터는 곱씹을수록 그날 밤이 후회로 남았다. 참극이 일어나기 전에 리베리오에게 부탁을 받았다. 계획대로 붉은 군대 일부를 그쪽으로 보냈는데 황실 근위대와 랑데스의 용병까지 얽혀서 사람들을 구하기도 전에 그들과 싸워야 하는 상황이 벌어졌다고 했다.
붉은 군대가 공작가 사람들을 구하려 했을 때는 바람처럼 빠른 용병들의 손에 이미 공작가의 가신들이 죽어 나간 상태였다고. 그 이후로 들어온 소식은 공작 부부의 행방이 묘연하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헨리가 죽인 사람들이 진짜 공작 부부인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다고 했다.
“그날, 성문만 열지 않았어도…….”
마리아는 낸시가 서신만 바꿔치기하지 않았어도 제 친정 사람들은 그런 참변을 당하지 않았을 거라 믿었다. 그래도 희망은 남아 있었다. 일전에 에이든이 말하길, 죽은 부모님의 시신은 가짜라고 했었다. 그러니 어딘가에 살아 계실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고 해도 낸시를 용서할 수가 없었다.
마리아의 눈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떨어졌다. 자신이 느끼는 분노의 크기대로 분풀이를 하자면 복수의 끝은 보이지 않을 터. 하지만 그러지 않기로 했다. 제 부모님이었다면 상대의 죄악을 되돌려주기보다는 바로잡으려 하셨을 테니까.
“저희 아버지는 진심으로 라스토니아를 사랑하셨어요. 그래서 더 가슴이 아파요.”
“그래서 마리아가 바로잡으려 이곳에 와 있는 거다.”
“군터.”
마리아는 그의 품에 와락 안겼다. 그녀는 군터의 품에서 아주 오랫동안 서럽게 울었다.
“저는 그들과 같지 않아요. 절대 그들이 저지른 죄악을 복수로 갚진 않을 거예요. 뼈아픈 후회와 참회를 하도록 만들 거예요.”
“그래야 왕비 마리아답지.”
군터의 입술이 마리아의 눈물을 남김없이 닦아 주었다.
“그러니 부모님의 걱정은 하지 마라. 반드시 마리아의 바람대로 이뤄질 테니까.”
“맞아요. 이뤄질 거예요, 반드시.”
“그래.”
군터는 마리아를 아련하게 바라보았다. 그는 마리아도 희망이 주는 힘을 알길 바랐다. 자신도 지독한 고난을 겪으면서도 마리아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은 덕분에, 이렇게 꿈을 이루었으니까. 이내 군터는 다소 침울한 분위기를 바꾸려 했다.
“마리아,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또 있다.”
“뭔데요?”
마리의 표정이 사뭇 비장했다. 이곳에 왔으니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고 싶었다. 그때 군터는 마리아의 손을 가져가 이불 속으로 넣었다.
“!”
“아, 정말!”
제 아내가 울고 있는데 그는 여지없이…….
“널 만지면 발정하는 건, 지극히 정상이거든.”
“그럼, 제가 마음껏 예뻐해 줘야겠네요?”
마리아가 고개를 살짝 옆으로 갸웃거리며 붉은 혀로 제 입술을 핥았다. 이내 군터는 야릇한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왕비께서 원하시는 만큼 나를 가져도 좋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