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황후 마리아-93화 (93/120)

93화

라스토니아 황실의 인장을 두고 에로는 찰스와 팽팽하게 맞섰다.

“큰 사달이 나기 전에 돌려주는 게 좋을 거야.”

“글쎄요.”

“원하는 게 뭐지?”

찰스는 에로가 이해되지 않았다. 모니카에 대한 원한을 풀었으면 굳이 인장을 쥐고 있을 이유는 없을 터. 혹여 돈인가? 아니지, 돈이라면 차고 넘칠 지경이라고 들었다. 왕자가 라스토니아 황실에 머물면서 뿌린 돈이 얼만데.

“모니카의 완전한 파멸.”

“파멸? 죽음을 말하는 건가?”

찰스의 물음에 에로가 피식 웃자, 그제야 둘 사이의 긴장감이 사그라들었다. 아직 에론 왕자의 분이 덜 풀렸던 거였다. 그렇지, 고작 사랑의 상처가 뭐라고.

“언제든 돌려드릴 겁니다. 제가 그 인장을 가지고 뭘 하겠습니다. 그러니 대공께선 저한테 잘 보이셔야 할 겁니다.”

“!?”

‘요것 봐라, 애송이가 보통이 아닌데.’

이 일을 어찌한다. 이렇게 에론 왕자를 떠나보내기엔 꺼림칙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닌 것을. 무슨 확답이나 약속 정도는 받아 내든지 아니면 동맹이라도 맺어야 할 터. 왕자가 인장을 가지고 있는 한, 적이 되어 봐야 아무런 이득이 없을 터.

“하하하- 사내라면 그 정도 배포는 있어야지. 아주 마음에 들어!”

찰스는 호탕하게 웃으며 에로를 칭찬했다.

‘어머머! 저 태도 바뀌는 거 봐. 느물거리는 게 딱 질색이야.’

에로는 겉으론 웃고 있으나 소름이 끼칠 정도로 몸서리를 쳤다.

“에론 왕자, 내 집이 지척이니 쉬었다 가지?”

“예?”

‘감금해 놓고 협박이라도 하려고? 이 아저씨 완전 웃기네, 날 바보로 아는 거야?’

“밤이 늦었으니 길을 떠나는 것도 무리지 않나? 내 집에서 며칠 푹 쉬다 가시게.”

“제가 대공을 어찌 믿습니까? 일전에 저는 대공의 손에 죽을 뻔한걸요. 그걸 알면서 적진에 들어가자고 하시는 겁니까?”

“걱정하지 말게, 신께 맹세하지. 나는 왕자를 귀빈으로 모시려는 순수한 마음뿐일세. 게다가 내 집에는 현재 다른 손님도 와 있지.”

“그럼 더더욱 초대에 응할 수 없겠습니다.”

에로는 마리아의 말을 연신 되새겼다. 찰스는 황위에 대한 오랜 갈망으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테니, 절대 꼬임에 넘어가지 말라고 당부했었다. 한데 겉모습만 봐도 사람이 신뢰라곤 눈곱만큼도 안 가게 생겼다. 아니, 찰스와 혼인한 모니카가 살짝 가여울 지경이었다.

“내가 왕자에게 좋은 친구를 소개하려고 했지. 에바논의 할라드 술탄이라고, 알아 두면 훗날 키르탄에 큰 도움이 될 텐데 말이야.”

‘!?’

에로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에바논의 할라드 술탄이라면 오래전 군터와 솔샤르의 주인이었다. 두 사람을 모질게 학대한 인간 같지 않은 작자였다. 그런데 그가 왜 대공저에 와 있는 거지? 가만, 황실에 군터가 와 있음을 알고 일부러 온 건가. 때를 봐서 군터를 공격하려고? 아무래도 확인이 필요했다. 술탄이 어찌 생겼는지 궁금한 것도 있었지만, 그가 데려온 병력이 어느 정도인지, 찰스와 무슨 이유로 연합하고 있는지에 관해서 반드시 알 필요가 있었다.

“할라드 술탄이라면? 3년 전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나셨다고 듣긴 했는데.”

“왕자도 아는가?”

“그럼요, 그 유명한 분을 왜 모르겠습니까?”

“더 잘되었구먼. 이참에 셋이 친분을 다지면 좋겠어.”

“그……렇군요.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해야겠습니다. 제가 이곳에 올 때는 만반의 준비를 다 하고 왔다는 것을요.”

“알지, 알지.”

찰스가 손사래를 치며 웃었다. 왕자가 바보가 아닌 다음에야, 여러 가지의 조처를 하고 왔을 터. 저 또한, 이번에는 왕자와 척을 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어떻게든 꼬드겨 인장을 받아 내리라 다짐했다.

“또한 제가 잘못되면 인장은 영원히 못 보실 겁니다.”

“에론 왕자, 걱정하지 말래도.”

찰스가 에로를 설득했다. 에로는 바로 제 옆에 있는 부관을 불러 나직한 어조로 속삭였다.

“우리 군대가 대공저에 들어가면 저들이 주는 건 그 어떤 것도 먹어선 안 됩니다. 물 한 모금도.”

“예, 알겠습니다.”

‘그 짐승 같은 술탄의 낯짝이 궁금하네.’

에로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 * *

침실 안이 두 사람의 열기로 후끈했다. 군터는 마리아를 옆으로 눕히곤 조심스레 그녀의 몸 안으로 들어갔다. 최대한 마리아에게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사랑을 나누기 위해 노력은 하지만, 어느새 그의 욕망은 고삐 풀린 말처럼 미쳐 날뛰기 일쑤였다. 왠지 마리아의 몸이 임신 전보다 더 부드럽고 달콤한 듯했다. 제 분신을 따뜻하게 데웠다가 아프지 않게 물었다가 마구 자극하며 옴짝달싹 못 하게 가두었다.

“으……. 윽!”

그의 잇새에서 신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그의 커다란 손이 마리아의 겨드랑이를 지나 탐스러운 가슴을 움켜잡은 채 움직였다. 마음 같아선 마리아의 깊은 곳까지 침범하여 막다른 살점에 다다르고 싶으나, 그건 과욕이었다. 이렇게 그녀를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황홀했다.

“힘들면 말해.”

“아니, 좋아요.”

마리아는 제 뒤에서 파도처럼 밀려왔다 쓸려 나가는 그가 좋았다. 군터의 움직임에 따라 그녀도 요염하게 엉덩이를 들썩였고, 그럴 때마다 그는 거친 탄성을 내질렀다. 이내 그의 손이 가슴에서 밑으로 부드럽게 내려와 그녀의 꽃밭을 헤집었다.

“아……!”

그의 손길이 닿으면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곳, 마리아는 그의 손길에 취해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이렇게 좋아도 되는 건지 겁이 날 정도로 그와의 사랑은 황홀하기만 했다. 곧 군터의 손놀림이 빨라지면서 그는 절정을 향해 빠르게 달렸다. 두 사람의 야릇한 숨소리와 침대가 요동치면서 봉에 매달린 커튼이 마구 흔들렸다. 그때 군터는 마리아의 귀에 속삭였다.

“천국은 같이 가자.”

“으……. 응.”

질척한 마찰음이 고조되며 두 사람의 응축된 욕망이 단번에 터졌다. 마리아는 숨을 헐떡거리다 고개를 뒤로 돌려 그에게 키스했다. 그러자 군터는 마리아의 배에 손을 대며 큭큭거렸다.

“눈치 없는 녀석은 아니다.”

“네?”

“엄마 아빠가 사랑할 때는 조용히 있어 주니까 말이야.”

“우리의 아이잖아요.”

“그래, 너와 나의 아이지.”

천금을 주어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존재들. 마리아와 아이. 언제 이렇게 지켜야 할 사람들이 생겨 버린 걸까. 그제야 군터는 가족이란 의미를 알 것 같았다. 마리아가 항상 가족에 대해서 말할 때면 막연하기만 했었다. 하지만 이젠 정확히 알게 되었다.

‘내가 지켜야 하는 것, 그것이 가족이야.’

“군터, 이런 말 안 믿기겠지만, 저 헬랜드가 그리워요.”

“믿는다. 나도 헬랜드를 잠시 비우게 되면 그 얄미운 스톤도 궁금하고 그렇거든.”

“저는 이곳에서 살았던 세월이 더 긴데도, 왜 이렇게 낯선지 모르겠어요.”

그건 아마도 마리아의 마음이 라스토니아 황실에서 떠났기 때문일 터. 제 마음이 머무는 곳이 고향이며 집이라고 들었다.

“내일 책봉식만 끝나면 대략 마무리가 되겠지.”

“네. 낸시가 황후가 되는 모습을 꼭 보고 싶어요. 그런데…….”

“그런데?”

“아니에요.”

마리아는 마음에 걸리는 일 몇 가지가 있긴 했으나 군터에겐 말하지 않았다. 그건 필시 자신이 찰스에 대해서 너무 잘 알기에 느끼는 노파심일 터. 어서 날이 밝아 낸시가 황후의 왕관을 쓴 모습을 보고 싶을 따름이다.

‘낸시, 독이 든 성배가 얼마나 무서운지 알게 될 거야.’

한편 낸시는 헨리의 침실에 갔다가 기겁했다. 시종장이 문 앞을 지킨 채 낸시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안에서는 남녀의 신음이 요란하게 들려왔다.

“폐하께서 누구와 계신 거죠, 시종장?”

낸시는 시종장을 무섭게 노려보며 물었다.

“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시녀입니다.”

“그렇군요.”

시종장은 낸시의 하얗게 질린 얼굴을 보곤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로랑이 헬랜드로 잡혀간 뒤, 헨리는 여러 시녀와 의미 없는 잠자리를 하곤 했었다. 그건 낸시도 이미 아는 터. 한데 오늘따라 왜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는지 모르겠다.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들어 봐야 속만 썩어 문드러질 텐데.

시종장의 바람대로 낸시는 더는 참기 어려운지 돌아섰다. 그때 안에서 황당한 소리가 들려왔다.

“마리아, 넌 내 아내라고.”

술에 흠뻑 젖은 헨리의 목소리가 매우 불쾌하게 다가왔다.

“폐하, 제 이름은 마리아가 아니…….”

“나를 원한다고 말해. 그리웠다고 말하란 말이야.”

낸시는 몸을 부르르 떨다가 자리를 피했다. 역시 제 예감이 맞았다. 마리아가 군터와 재혼했다는 소식을 들은 순간부터 헨리의 마음에는 후회의 싹이 텄으며 비로소 그녀를 마주한 후에야 자신의 감정이 명확해진 모양이었다.

‘폐하가 아무리 원하셔도 이젠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어요, 내일이면 제가 이 나라의 황후로 책봉이 될 테니까요.’

낸시는 빠르게 복도를 걷다가 끝내 벽을 짚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불안한 숨을 토해 냈다.

‘이게 거의 다 왔어. 나는 결코 마리아한테 지지 않아.’

황후가 되면 승패는 난 거니까.

* * *

마리아와 군터는 낸시의 황후 책봉식에 참석하기 위해 준비를 마쳤다. 한데 군터의 시종장이 다급한 소식을 들고 나타났다.

“대왕, 왕비님.”

상기된 그의 표정을 보니 무슨 사달이 난 모양이다.

“무슨 일이냐?”

“오늘 있을 황후 책봉식이 취소됐답니다.”

“취소요?”

마리아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어젯밤 우려했던 일이 기어이 현실이 되고 말았다.

“대신 벨루이스 대륙 법원에서 법관들이 왔답니다.”

그 소식에 마리아는 크게 소리 내 웃었다. 기가 막힌다는 듯이 한참을 웃더니 군터를 보며 말했다.

“곧 법정 싸움이 일어날 거예요.”

“예상은 했다.”

동물적인 감각의 소유자가 아니더라도, 그냥 눈만 있으면 다 알 수 있을 만큼, 어제 헨리의 행동은 그 수가 다 읽힐 정도였으니까. 예상보다 싸움이 빨라지긴 했으나 신속하게 해결하고 돌아가는 것도 나쁘진 않을 터. 하지만 마리아는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못 보는 건가. 낸시가 황후가 되는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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