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군터는 제 예상대로 행동하는 헨리의 모습에 헛웃음이 났다. 그래서인지 그다지 화도 나지 않았다. 다만 마리아의 성화에 못 이겨서 이 법정 심의를 받는 게 번거로울 뿐이다. 솔직히 자신은 저들의 법을 인정하지 않으니까.
마리아는 천천히 일어나 법관들을 향해 말했다.
“폐하의 말씀이 다 옳습니다.”
그녀의 발언에 장내가 술렁였다. 또한 헨리의 얼굴에도 나름 만족스러운 미소가 드리웠다.
“하지만 저는 폐위됐으며 반역 죄인입니다. 그뿐입니까, 폐하께서 헬랜드 대왕의 빚을 갚지 못해 볼모로 보냈습니다. 그 사실만으로도 폐하께선 저에 대한 남편의 자격을 포기하신 거지요.”
“마리아, 그런 게 아니야!”
그런 게 아니면 뭐지? 한심한 인간 같으니. 한 치 앞도 내다보지 못한 채 순간의 감정에 빠져 제멋대로 행동하는 철없는 인간이 헨리 코부르크인 것을.
“무엇보다 폐하께선 이미 낸시 아크만 양, 아니 부인을 차기 황후로 책봉한다 선언하셨다고 들었습니다. 한데 인제 와서 저와의 이혼 여부가 큰 상관이 있을까요?”
마리아의 말에 법관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낸시의 황후 책봉은 취소됐습니다. 선황후 능욕죄로.”
헨리는 급박해진 상황을 타개하고자 크게 소리쳤고, 그 광경을 보고 있는 낸시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그럼, 그렇지. 처음부터 비천한 시녀 출신의 여자를 황후로 책봉한다고 할 때부터 마땅치 않았어.”
“예, 실현 가능성이 없었습니다.”
“그건 그렇고, 선황후 능욕죄는 혹시 선황후 전하와 에론 왕자의 혼인이 깨진 일을 말하는 걸까요?”
“들리는 말에 의하면 낸시 아크만 저 여자가, 선황후와 에론 왕자를 이어 준답시고 중간에서 장난질을 쳤던 모양입니다.”
정무대신들이 낸시를 보며 수군거렸다. 낸시는 제게 쏟아지는 비난의 화살을 정면으로 감당하기 힘든지 고개를 숙였다. 역시 사람들은 과정은 중요치 않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결과가 이 모양이니, 그 책임은 오롯이 제 차지가 되었다.
“짐은 저 두 사람의 혼인에 이의를 제기합니다.”
헨리는 상기된 얼굴로 법관들을 향해 다가갔다.
“황제, 이의를 제기한다는 뜻이 무언지 구체적으로 말씀하시지요.”
법관의 물음에 헨리가 군터를 흘깃 바라보자, 여지없이 잘 벼린 검날처럼 날카로운 청록빛 눈동자가 자신을 겨누고 있었다. 군터는 시종일관 헨리한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처음에는 헨리의 재롱이 재밌어서 가볍게 봐주려 했건만, 그가 점점 내면의 헛된 욕심을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 훤히 보였다. 그러다가 죽을 수 있다는 것을 모르는 건가.
“짐은 마리아와 이혼 안 합니다. 아니, 되찾고 싶습니다.”
헨리가 격앙된 어조로 장내의 소음을 사그라뜨렸다. 일순간 법정 안에 서늘한 냉기가 감돌며 동시에 언제 깨질지 모르는 살얼음판처럼 아슬아슬하기만 했다. 그때 한 귀족이 일어나 헨리에게 쓴소리를 던졌다.
“폐하, 마리아 스튜어트는 반역 죄인입니다. 잊으신 겁니까?”
“그건, 차차 짐이 설명할 거요.”
아주 구질구질한 것이 헨리다웠다. 반면 법관들은 자기네들끼리 상의를 하더니 바로 결정을 내렸다.
“황제, 이혼하고 싶지 않다면 헬랜드 대왕에게 진 빚부터 청산하는 게 순서입니다.”
법관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헨리는 어음을 꺼내 법관에게 제출했다.
“1000만 골드 어음입니다.”
이제야 헨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당당하게 군터 앞까지 걸어와 그에게 말했다.
“대왕, 우리 부부끼리 할 이야기가 있소.”
헨리는 마리아에게 손을 내민 채 군터를 무섭게 노려보았다.
“마리아, 내가 빚을 갚았으니 이젠 저자 옆에 앉아 있을 이유가 없어. 그러니 내 손 잡아.”
“!?”
마리아는 황당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이지 헨리의 계산법은 참으로 단순하고 편협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내 마리아가 헨리의 손을 잡지 않자, 그가 덥석 그녀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그 손 놔.”
때마침 군터가 헨리를 노려보며 경고했다.
“대왕, 짐은 그대에게 진 빚이 없으니 짐의 아내를 데려가지 못할 이유가 없소이다.”
헨리도 이번만큼은 물러나지 않았다. 지금이 아니면 잘못된 퍼즐을 바로 맞출 기회가 없음을 너무 잘 알기 때문이다. 그때 군터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헨리에게로 가까이 다가갔다. 한데 그의 얼굴은 어떠한 감정의 동요도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평온했다.
“황제, 다시 말해 보지?”
“!?”
감정을 알 수 없는 저음의 목소리가 어째서 더 고압적으로 느껴지는지. 하지만 자신은 라스토니아의 황제였다. 군터에게 주눅 들 이유가 없었다.
“군터 플레이슬리, 이제는 당신한테 빚진 거 없소. 그러니 짐과 마리아 사이에서 빠져 주시오. 우리 부부가 해결해야 할 일이니.”
“우리 부부라…….”
군터는 헨리의 말을 읊조리더니 단번에 그의 멱살을 잡았다. 곧 분위기는 험악해졌고 모니카는 군터를 향해 온갖 욕을 해 댔다. 하지만 군터는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이내 근위대가 달려와 군터 앞에 벽을 세우며 그를 막아 세웠다.
“비켜라. 너희도 내 손에 죽기 싫으면.”
군터의 시선은 다시 헨리에게로 돌아갔다.
“다시 말해 봐.”
“마……리아는 짐의 아내다. 이 야만인 새끼야!”
헨리도 더는 군터를 겁내지 않았다. 되레 악에 받쳐 있는 힘껏 소리쳤다. 하지만 군터의 분노는 거대한 불길처럼 솟구쳤다.
“너는 오늘 내 손에 죽을 거다!”
군터가 무섭게 으름장을 놓자, 객석에서 야유가 쏟아졌다. 탕탕탕- 보다 못한 법관이 군터의 행동을 저지했다.
“대왕, 심의는 끝나지 않았습니다. 자중해 주시지요.”
군터는 헨리의 멱살을 잡은 채로 가까스로 화를 삭였다.
“그럼, 그렇지. 시궁창에서 썩던 짐승이 왕 행세를 얼마나 하나 했지. 그래서 출신은 못 속이는 법이야. 돈 좀 있다고 저렇게 미친개처럼 날뛰는 꼴이 아주 상스럽다니까!”
모니카는 군터가 아닌 마리아를 보며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마리아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모니카를 응시했다.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지껄일 때는 무시가 최선의 공격이었다.
군터는 어느 정도 흥분을 가라앉혔는지 헨리의 멱살을 놓아 버리곤 자리로 돌아왔다.
그때였다. 법관들은 더는 심의를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했는지 진행을 멈췄다.
“라스토니아 황제께서 제출한 어음의 진위를 확인해야 하기에 본 심의는 이틀 뒤에 재개하겠습니다.”
그들은 제 할 말만 하곤 그대로 퇴장해 버렸다. 마리아는 제 옆에 앉은 군터의 손을 토닥였다.
“잘 참으셨어요.”
그녀의 다정한 목소리에 군터를 휘감았던 불길이 일순간 전소되는 것만 같았다.
* * *
할라드의 무리한 요구는 계속되었다. 그러자 찰스는 난감하여 진땀을 뺐다. 사실 할라드와 친분을 맺으면 제게 도움이 될까 해서 초대한 것뿐인데, 그가 오천이나 되는 군대를 이끌고 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더구나 자신이 국경을 열어 준다? 그러면 자신에게 어떤 이득이 있을까. 찰스는 고민하고 또 했다.
“대공, 국경만 열어 주면 그대를 라스토니아의 황제로 만들어 드리리다. 나는 44번 그놈만 때려죽이면 한이 없는 사람이오.”
‘나를 라스토니아의 황제로 만들어 준다.’
아주 틀린 말도 아닌 게 자신이 가진 사병의 수와 할라드의 군대가 합세하면 단번에 반정을 일으킬 수 있었다. 게다가 모니카가 저지른 엄청난 일이 있으니 명분도 확실했다. 그러니 할라드의 제안은 매우 구미가 당길 만했다. 사실 그가 원하는 건, 라스토니아가 아니라 군터 플레이슬리이니까. 그때였다. 식당을 울릴 만큼 신경질적인 발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소란스레 열렸다. 이내 모두의 시선이 갑자기 나타난 한 남자에게로 쏠렸다.
“할라드 술탄, 그 제안 거절합니다!”
“앤드류!”
에로도 방에서 놀란 감정을 추스른 후 막 식당으로 돌아온 차였다.
‘앤드류? 찰스 대공의 아들인가?’
에로는 갑자기 나타난 남자를 빠르게 살폈다. 할라드에게 불편한 심기를 내비친 남자는 단정한 갈색 머리에 마른 체형, 완고한 표정을 가진 남자였다.
“아버지,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찰스에게 호통을 치는 걸 보니 아들이 분명했다. 한데 부자라고 하기에는 너무 닮지 않아서 놀랐다. 에로는 앤드류를 찬찬히 뜯어보았다. 도수가 높은 안경에 손에 묻은 잉크, 키는 크지만 심하게 마른 몸. 신경질적인 표정, 대단한 미남은 아닌데, 한 가지가 에로를 사로잡았다. 의뭉스럽고 매사 모략을 짜는 찰스의 눈동자는 항시 탐욕으로 가득하여 혼탁했다. 하지만 앤드류는 눈동자에서 빛이 났다. 아주 맑고 깨끗한 빛.
“그저 손님맞이를 하는 게다.”
“할라드 술탄, 당신은 아주 오래전에도 도망친 노예들을 잡아야 한다는 명분으로 이웃 나라에 들어갔다가 그 나라 사람들을 도륙하고 왕을 죽여 나라를 빼앗지 않았습니까?”
앤드류는 술탄에게 매섭게 쏘아붙였다.
“그건……!”
“개인적인 원한 때문에 오천의 군사를 국경에 배치한다는 것이 상식적인 일입니까? 당장 돌아가 주십시오!”
‘그렇지. 비상식적이지. 아비보다 아들이 낫네.’
찰스는 황위에 대한 욕심으로 인해 잠시 정상적인 사고가 멈춘 상태. 그것을 바로잡아 줄 아들이 있었다니.
“아버지, 라스토니아의 대공으로서 부끄럽지도 않으십니까?”
앤드류의 호통이 계속되자, 에로는 지금이 기회라고 여겼다. 저로서는 군터와 솔샤르의 원수를 조금이라도 빨리, 라스토니아에서 쫓아내야 했다. 그래야 자신이 무리하게 대공저에 온 것이 무색해지지 않을 것이다.
“대공께 국정을 휘어잡을 수 있는 명분을 드리겠습니다.”
“명분?”
“누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누구에게, 인장을 주었는지를 문서로 만들어 드리겠습니다. 그것만 있다면 귀족들은 찰스 대공을 따를 겁니다. 그러니 아드님의 조언을 귀담아들으시지요.”
마침 할라드는 아들뻘 되는 앤드류에게 당한 수모로 얼굴을 붉히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술탄, 아무래도 부탁을 들어드리지 못하겠습니다. 그러니 돌아가 주시오.”
찰스도 그제야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에험! 이런 지랄 같은 경우를 봤나. 두고 보쇼! 당신들 반드시 후회할 터이니.”
“후회는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바로 이 나라를 떠나시기 바랍니다. 아, 혹여 옆길로 새지는 마십시오. 대공가의 군대가 술탄을 국경까지 뒤쫓을 테니.”
앤드류는 술탄에게 엄포를 놨다.
‘어머머! 완전 멋져!’
에로는 앤드류에게서 뿜어 나오는 밝은 빛에 완전히 매료당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