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화
할라드가 대공저를 떠난 후에야 앤드류는 에로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고개를 살짝 숙이는 것으로 최소한의 예의만 갖췄다.
‘그런데 어떻게 다 알고 있지?’
앤드류는 분명 이 자리에 함께하지 않았는데도 상황 파악을 완벽하게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시중드는 시종 중에서 그의 소식통이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슬슬 황궁으로 가 봐야겠다.”
찰스가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앤드류가 그를 붙잡았다.
“아버지, 황위를 찬탈하시려는 겁니까?”
“찬탈이라니? 아비한테 말하는 버르장머리하고는?”
이젠 찰스가 버럭 화를 내다 에로의 눈치를 보곤 다급하게 목소리를 낮췄다.
“아버지께서 무얼 하시든 상관하지 않습니다. 다만……!”
앤드류가 쓰고 있던 안경을 벗으며 진지한 얼굴로 찰스를 보았다. 하지만 쉽사리 말을 꺼내지 않았고 불편한 적막감은 계속되었다.
‘다만, 뭐지?’
되레 에로가 궁금해서 미칠 지경. 황위를 찬탈하려는 아버지를 막지 않는 부분은 솔직히 별로였다. 그래도 나름의 이유는 있을 터. 한데 왜 이렇게 심장이 뛰는지, 앤드류는 자신이 이제껏 본 남자 중에서 솔샤르 다음으로 멋진 남자였다. 그 사람이 풍기는 태도나 가치관이 잘난 외모를 무색하게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계기였다. 미남이 아니어도 저렇게 멋질 수 있다니. 그러나 끝까지 그 환상이 지속할지는 모르겠다.
“라스토니아 제국을 혼돈에 빠뜨리지 마십시오. 또한 제국민들이 이 나라의 주인이니, 항상 우선시하십시오.”
“또 그 지랄 맞은 소리! 라스토니아의 주인은 황제야!”
부자는 첨예하게 대립했다. 하긴 헨리가 정치를 등한시하긴 했지. 그러니 앤드류도 황제가 좋게 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에로는 앤드류가 마음에 쏙 들어서 당분간 대공저에 머물러야겠다고 마음먹었다. 또한 술탄이 어찌 나올지 모르는 상황에 마리아와 군터를 두고 먼저 갈 순 없으니까. 이미 대공저에 들어오기 전, 병사 하나를 황궁으로 보낸 터였다. 군터에게 술탄에 관해 언질을 주어야 할 것 같아서. 그리고 오늘 밤에는 솔샤르에게도 소식을 전해야지. 마법 종이는 충분하니까. 이내 찰스의 시선이 앤드류가 아닌 에로를 향했다.
“에론 왕자, 약속 지키시오. 모니카가 교수형에 처해지면 인장을 주겠다는 약속 말이오.”
찰스는 에로가 써 준 문서를 흔들며 재차 약속을 확인했다.
“물론입니다.”
모니카가 완전하게 파멸하기 전까진 인장을 주지 않겠다고 했으니, 찰스는 어떻게든 일을 도모하려 할 터. 하지만 찰스는 모르고 있다.
‘나 믿으면 안 되는데, 인장은 내 소관이 아니라서.’
마리아가 복수를 끝내고 인장을 어찌 처리할지는 전적으로 그녀에게 달린 문제였다. 마침 앤드류는 성기사 단장을 부르더니, 그에게 명령을 내렸다.
“할라드 술탄의 뒤를 쫓으세요. 라스토니아에서 완전히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하세요.”
“예, 알겠습니다.”
찰스마저 대공저를 나간 뒤, 에로는 앤드류와 단둘이 남게 되었다. 에로는 앤드류를 향해 화사하게 웃으며 물었다.
“진정이십니까?”
“뭐가 말입니까?”
“나라의 주인이 제국민이라는 거, 말입니다.”
에로가 그의 발언 중에서 가장 충격을 받은 부분이었다. 대륙 어느 나라 황실에서도 앤드류와 같은 생각을 하는 황족 내지는 귀족은 없을 테니까. 아니, 통치를 당하는 제국민들조차 자신들이 나라의 주인이라고 믿지 않는다.
“진심입니다.”
“그렇군요.”
에로는 아직 앤드류에 관해선 잘 모르나 그가 제 아비를 닮지 않았으니 천만다행이라 여겼다.
* * *
모니카는 헨리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마리아와 이혼하지 않겠다니?”
“위자료 같은 거, 다 필요 없어요. 마리아만 돌아와 준다면 돈은 포기할 수 있어요.”
“쯧쯧, 또 변덕이 도졌지?”
“엄마, 변덕 아니에요. 사랑이지.”
“사랑? 개똥 같은 소리 하고 있네.”
아무리 제 아들이라고 해도 차마 들어 줄 수가 없었다. 이제 와서 마리아를 사랑한다니. 그래서 그렇게 내쫓았나. 아니, 백번 양보해서 사랑이라고 쳐도 헨리와 마리아는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넌 사이였다. 깨진 화병이라서 도로 붙일 수도 없는 것을.
“마리아 배 속에 그 짐승의 자식이 있어. 정신 차려!”
“그런 건 상관없어요. 오히려 잘됐어요. 석녀가 아니니까. 나중에 내 아이도 낳을 수 있단 말이에요.”
“뭐?”
모니카는 헨리를 보며 망연자실했다. 매번 군터에게 흠씬 당하기만 하는 주제에 말은 주절주절 잘했다. 무엇보다 군터가 마리아를 죽어도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사실을 모르는 듯했다. 자신이 보아도 군터는 법에 굴복하는 인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라스토니아 황실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놓을 위인이지. 하, 이 철딱서니 없는 아들을 어떻게 해야 하지. 사람을 너무 놀라게 해서 에론에 대한 그리움도 잠시 잊어버릴 정도였다.
“낸시는 어찌할 건데? 그 어음, 낸시가 구해 온 거잖아.”
“나한테 생각이 있어요.”
“생각?”
설마? ……아니지, 낸시가 자신과 에론 사이를 농간질하는 천하의 못된 년인 것을 상기하면 제 눈앞에서 영원히 치워 버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엄마, 내가 실수하는 바람에 일이 이 지경이 된 거예요. 마리아만 제자리로 돌아오면 우리는 예전처럼 살 수 있어요.”
“하!”
“마리아의 반역죄도 풀어 줄 거고, 가문도 복권해 줄 거예요. 내가 정성을 다하면 돼요.”
헨리는 마리아의 마음을 제게로 돌려놓을 자신이 있었다. 물론 시간과 노력이 많이 필요하긴 하겠지. 그러나 저와 마리아의 인연이 한두 해인가. 지금은 군터에게 빠져서 정신 못 차리지만, 그녀도 헬랜드의 야만인들에게 질려서 황궁다운 황궁을 그리워할 것이다. 그뿐인가, 죽은 제임스 공작 부부의 명예도 되살려 놓으면 될 터.
“엄마, 기억 안 나요? 마리아는 어릴 때부터 내가 하자는 대로 다 해 줬잖아요?”
“그거야……!”
황후 교육을 받고 있으니, 그게 옳다고 판단한 거지. 사랑이 아니었다. 저도 오래전에 황후 교육을 받아 봐서 안다. 황후는 무조건 황제의 뜻에 따라 주어야 한다고 거의 세뇌를 당하다시피 했다. 한데 헨리는 이 부분을 사랑이라 착각하는 모양이다.
‘왠지 불안해.’
모니카는 커다란 숄로 몸을 감쌌다. 왠지 황궁에 불길한 일이 벌어질 것 같은, 강한 예감이 엄습하며 오한이 났다.
* * *
군터는 에로가 보낸 병사에게 놀랄 만한 소식을 접했다.
‘할라드, 그자가 나타났다?’
7년 만에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는 소문은 들었다. 한데 그 고약한 성질머리는 죽지 않은 모양이다. 할라드가 복수하고 싶다 해서 순순히 당해 줄 자신이 아닌 것을. 그에겐 약하고 어린 제 모습으로만 남아 있을 터. 군터는 주먹을 거세게 거머쥐었다.
“군터.”
마리아가 뒤에서 그를 껴안았다. 그런데도 군터는 뒤돌아보지 않은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왜 그래요?”
끝내 마리아가 그의 앞으로 돌아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마리아, 당장 돌아가자. 헬랜드로.”
“네? 아직 일이 끝나지 않았어요.”
“저들의 사정 따위 신경 쓰고 싶지 않아.”
“제 사정이기도 해요.”
어째서 군터가 이렇게 돌변했는지 모르겠다. 이곳까지 온 이유도 가장 잘 아는 사람이. 처음부터 자신은 아무것도 몰랐던 사람처럼 낯설게 굴었다.
“내가 황제를 죽일 것 같아서 그런다.”
순간 마리아의 눈에 부르르 떨리는 군터의 주먹이 보였다.
“군터, 헨리는 원래 그런 인간이에요. 그리고 내일이면 마무리가 되잖아요.”
“후!”
군터는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헨리가 제게 마리아가 제 아내라며 도발했을 적, 오랜만에 제대로 살기를 느꼈다. 저 자신이 이 말도 안 되는 법정에 와 있다는 자체가 용납이 안 될 정도였다.
“그래, 내일이면 끝나지.”
알면서도 짜증이 나서 저답지 않게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다. 게다가 할라드와 같은 하늘에 있다는 게 싫었다. 혹여 그에게 제 소중한 마리아를 보일까 봐. 물론 할라드가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당장이라도 놈을 찾아가 10년 전에 못 한 일을 마저 하고 싶었다. 그는 제 영혼을 더럽히고 날카롭게 도려낸 인간으로, 제겐 10년간 악몽으로 남아 있었다.
당시 척추가 아니라 목을 찔렀어야 했다. 그랬다면 그 악마가 다시 깨어나 활개 치는 일은 없었을 터. 마리아 앞에서 할라드와 흉포하게 싸우는 광경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그리되면 사람으로 살지 못했던 제 비참한 과거를 그녀가 알게 될 테니까. 그것만은 정말 싫었다.
* * *
낸시는 헨리의 망상이 안타까웠다. 정상적인 사고라고 할 수 없으니까. 흔들리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으나, 마리아를 되찾을 계획을 세우다니. 군터가 순순히 마리아를 빼앗길 것 같은가?
이로써 저 자신은 헨리에게 버려졌다. 하지만 자신은 죽어도 그의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 끝까지 그의 곁에 남아서 제 존재를 인식시켜 줘야지. 내일이면 모든 결론이 날 터. 군터는 돈으로 해결하려고 할 테지. 헨리가 원해도 귀족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은 상황. 그러니 마리아와의 재결합은 헨리만의 바람일 뿐이다.
마침 문이 열리며 시녀가 잠자리 시중을 들기 위해 들어오는 듯했다. 하지만 낸시 앞에 나타난 사람은 시녀가 아니었다. 투구로 얼굴을 가린 몇 명의 남자들.
“누구냐?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낸시는 본능적으로 일이 잘못됐음을 인지하곤 재빨리 침대에서 일어나 옆에 있는 화병을 집어 들었다. 그러나 남자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낸시를 향해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고, 그녀는 단숨에 그들에게 제압당하고 말았다.
“이거 놔……! 읍!”
목덜미를 강타당한 낸시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고, 남자들은 그녀를 커다란 자루에 담아 신속하게 침실을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