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이틀 뒤에 이혼 심의가 다시 열렸다. 예상대로 군터는 심기가 불편한 상태였고 사람들은 오랜만에 재밌는 유흥을 즐기는 양, 얼굴에 호기심이 덕지덕지 묻어났다. 자고로 남의 집 부부 싸움만큼 재밌는 일이 없으니까. 마침내 법관들이 착석하자, 헨리는 기다렸다는 듯이 나섰다.
“심의를 하기 전에 바로잡을 일이 있습니다.”
헨리가 시종에게 무어라 귀띔을 하자, 법정 문이 열리며 한 무리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병사들이 결박된 사내를 데려다가 법정 가운데에 꿇어앉혔다.
“일찍이 짐은 익명의 사람에게 밀고를 받았소. 스튜어트 공작이 반역을 꾀한다고 말이오. 그 증거로 문서 여러 장을 손에 넣었는데…….”
헨리의 시선이 결박된 사내에게로 향했다. 순진한 낸시, 애초에 그녀가 필사가를 찾아간다고 했을 적에 뒤를 밟은 것을. 자신이 그토록 허술한 인간은 아니었다.
“조작된 것이었소. 또한 저자에게 자백도 받은 상태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배후가 누군지는 모르고 있었소. 그저 자신은 필사를 의뢰받은 것뿐이라고 했소.”
그의 말에 객석이 술렁였다. 그 말인즉슨, 누군가가 스튜어트 공작을 반역죄로 몰기 위해 그의 필적을 조작했다는 결론이 된다. 그리고 그 필사가가 바로 저 사내라는 거겠지.
“물론 제대로 진위를 확인하지 못한 짐의 잘못이 가장 크오. 하지만 그 문서가 얼마나 정교하고 완벽하던지, 짐뿐만 아니라 다른 정무대신들도 제임스 공작의 필적이라고 확신했습니다.”
때마침 객석에서 질문이 쏟아졌다.
“그럼 폐하께 밀고한 사람은 누굽니까?”
“그자를 잡아서 엄하게 벌해야 합니다. 제임스 공작을 모함한 배후도 반드시 찾아내야죠.”
“그건 조……사 중에 있소.”
헨리가 말을 대충 얼버무렸다. 애초에 밀고자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런데도 이런 무리한 과정을 거치는 이유는 단 하나일 터.
“하여 짐은 마리아 스튜어트의 폐위를 철회하며 그 가문을 복권시킬 겁니다.”
그의 돌발 선언에 법정 안이 시끄러웠다. 그러나 헨리는 사람들의 반응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미 완벽하게 꾸며진 문서 여러 장을 법관들에게 제출한 상태였다. 그들은 마리아의 황후 폐위가 부당하다는 증거를 살피곤 꽤 오랫동안 상의를 했다.
“황제께서 제출한 증거물을 확인한바, 필사가의 자백이 명백하므로 마리아 스튜어트의 폐위는 무효입니다.”
드디어 법관들이 판결을 내렸다. 하지만 마리아와 군터는 황망하게 웃기만 할 뿐, 전혀 기쁘지 않았다. 그래도 헨리의 노력에 성의 표시는 해야 할 터. 마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헨리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폐하, 감사드립니다. 이제라도 저와 우리 가문의 억울함을 풀어 주셔서.”
“마……리아.”
마리아의 인사에 헨리가 애틋한 얼굴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마리아는 더 이상 폐황후가 아니야. 이젠 짐의 황후로 복권이 된 거라고.”
그의 말에 군터가 헨리를 죽일 듯이 쏘아보았다. 그는 여러 번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어리석은 건지, 교활한 건지 분간이 안 될 정도로 대책 없는 인간이 이 나라의 황제라니. 그러니 갈수록 나라가 쇠퇴하는 건 당연했다. 군터는 앤드류가 어째서 그토록 비통해하는지도 충분히 이해가 됐다.
마리아는 군터의 손을 꼭 잡곤 그에게 말했다.
“완벽하게 마무리 짓고 싶어요.”
“그래.”
그제야 성난 군터의 불길이 사그라들었다. 군터의 동조에 마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법정 가운데로 걸어 나갔다. 그녀는 법관들에게 고개 숙여 예의를 갖춘 뒤, 헨리와 곁에 있는 모니카에게도 정중하게 인사했다. 물론 모니카는 순순히 인사를 받아 주진 않았다.
“그러면 저는 더 이상 반역 죄인이 아닌 거군요?”
“당연하지. 마리아는 예전으로 돌아오기만 하면 돼.”
헨리는 기대에 가득 찬 얼굴로 마리아의 대답을 기다렸다.
“그렇다면 저도 당당하게 폐하께 요구하겠습니다.”
“!?”
“폐하, 이혼해 주세요.”
“마……리아, 짐이 이렇게 성의를 보였잖아?”
“폐하의 성의 감사합니다. 하지만 저는 헬랜드의 대왕님이 아니면 필요 없습니다.”
“뭐?”
헨리는 잠시 사고가 멈췄다. 동시에 예전의 일이 떠올랐다.
[이혼해 줘, 황후가 젊지 않아도, 석녀가 아니라도 상관없어. 내겐 로랑이 낳은 아이가 아니면 필요 없단 말이야.]
헨리는 거칠게 도리질하며 마리아의 결정을 부정했다. 아니, 의심했다. 그는 마리아에게 성큼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저자를 좋아해? 마리아 네가?”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렇지?”
“사랑합니다. 그리고 존경합니다. 군터 플레이슬리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 없을 만큼 사랑해요. 그의 아이가 아니면 제 임신은 아무 의미가 없을 정도로 사랑해요.”
“이런 미친! 정신이 나갔어. 네가 대체 누구라고 생각해? 정신 좀 차려! 넌 명문가의 영애였고 이 제국의 황후였어. 그게 말이 돼?”
“폐하야말로 말이 된다고 생각하셔서 그런 결정을 하신 겁니까? 저는 명문가의 영애였고 완벽한 황후였습니다. 한데 저를 빚 대신 볼모로 보내셨죠. 그게 말이 됩니까?”
“그건……! 어차피 다 갚으려고 했어. 아니, 이미 갚았잖아.”
“사람을 죽여 놓고……!”
마리아는 고통에 일그러진 표정을 짓다 눈을 질끈 감았다. 당시 헨리가 검으로 제 부모의 시신을 훼손했던 그 참혹한 광경이 다시 떠올랐다. 그로 인해 얼마나 크나큰 고통 속에서 몸부림쳤던가. 아니, 지금도 그 일만 떠올리면 칼로 마음을 헤집는 것 같은 통증이 느껴졌다. 훗날 에이든에게 그 시신이 제 부모가 아니라는 것을 전해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당시의 상처가 금세 치유되는 건 아니었다. 결과적으로 제 부모는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를 행방불명 상태니까.
“폐하의 입맛대로 살렸다가 죽였다가, 하! 폐하는 뭐든 쉬워서 좋겠습니다.”
마리아는 격앙된 어조로 헨리에게 쏘아붙이곤 가까스로 감정을 자제했다. 마리아는 헨리에게 돌아서 법관들을 향해 말했다. 처음부터 이혼을 요구한 것도 헨리였으며, 빚 대신 헬랜드로 보낸 것도 그였으니, 사실상 혼인 관계는 파탄이 났노라 설명했다. 그러니 자신의 이혼 요구는 당연하며 더불어 위자료도 청구한다고 했다. 이내 법관들은 다시 심의에 들어갔다.
* * *
에로는 잠자리에 들기 전, 마법 종이를 태웠다. 곧 제 서신이 라모나에게 전해질 터. 벌써 헬랜드가 그리웠다. 하루라도 빨리 돌아가고 싶으나, 자신은 마리아와 군터를 지켜야 했다. 그들이 일을 마치고 돌아갈 때 합류해야 하니까.
‘오늘은 일찍 자고 내일은 황궁 사정을 좀 알아봐야겠어.’
그러려면 앤드류와 친하게 지내야 할 것 같았다. 적어도 그는 찰스와는 다른 인간이니까. 그에 대해 잘 알지는 못하지만, 때론 육감이 알려 주기도 한다. 위험한지 아닌지.
“아함, 졸려!”
참으로 고단한 나날이었다. 에로는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들었다. 꿈에서라도 솔샤르와 만나길 고대하며 기꺼이 잠들었다. 에로가 잠들고, 새벽녘쯤이었다. 덜컥거리던 창문 사이로 검은 연기가 살아 있는 듯 들어와 침실 안을 안개처럼 가득 채웠다. 이내 검은 연기는 사람의 인영으로 변하더니 에로를 향해 다가갔다.
“그냥 지나치기엔 욕심이 나서 말이야. 이렇게 아름다운 물건이 몇 년 만이더라.”
에로는 스산한 기운에 잠에서 깼고 제 앞에 있는 괴상한 인영에 놀라 비명을 지르려던 찰나, 이미 검은 손이 에로의 입을 틀어막곤 음흉하게 껄껄거렸다.
“눈에 아른거려서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단 말이지. 쩝-”
에로의 커다래진 눈으로 검은 인영을 부산스레 살폈다. 목소리를 들으니 바로 그자였다. 할라드 술탄. 한데 그가 흑마법을 부릴 수 있었던가.
“나랑 가자. 예뻐해 줄 테니, 내 첩으로 살아.”
‘어머머! 이 인간, 정신병자였어.’
마침 찰스가 농담처럼 했던 말이 떠올랐다.
[허허허- 에론 왕자, 술탄을 조심하시오. 아주 유명한 남색가이니.]
에로는 발버둥을 치며 그에게서 벗어나려 했으나 그의 강한 흑마법을 물리치기엔 무리였다. 처음 봤을 때 음산한 기운이 펄펄 풍겼는데, 그때 알아봤어야 했다. 에로는 살면서 이런 공포는 처음이었다. 마리아와 돌무더기에 매몰되었을 때도 이렇게 무섭진 않았다. 뇌와 배 속의 내장이 차갑게 어는 느낌은 처음이었다. 에로는 곧 검은 연기에 칭칭 감긴 채로 창밖으로 무력하게 끌려 나갔다.
‘안 돼! 싫어! 솔샤르 님!’
아무리 소리를 쳐도 입이 막힌 터라, 제 소리를 들어 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 *
“판결을 내리겠습니다.”
법관들은 오랜 회의 끝에 의견을 모았다. 곧 법정 안의 모든 사람이 긴장한 얼굴로 법관들을 바라봤다. 과연 어떤 결과가 나올지 궁금했다. 물론 그런 사람들과 다른 이는 오로지 군터뿐이었다. 애초에 저들의 판결 따윈 중요하지 않았다.
“헨리 코부르크 황제와 마리아 스튜어트 황후는 사실상 혼인 관계가 깨졌다고 판단되므로 마리아 스튜어트의 이혼 요구는 정당합니다. 하지만 위자료 문제는 두 사람이 원만한 합의를 보시길 권합니다.”
탕탕탕- 판결을 마무리 짓는 소리에 사람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탄식과 아쉬움이 뒤섞였고 헨리의 절망과 마리아의 희열이 상반됐다.
“이런 말도 안 되는 판결이 어딨어? 짐이 빚을 갚았잖아? 그런데 왜 이혼이야?”
헨리가 난동을 부리기 시작했다.
“마리아는 더 이상 볼모가 아니잖아. 그러니 원래 자리로 돌아와야지!”
“아, 그 어음에 관해서도 말씀드리겠습니다.”
법관들의 말에 법정이 다시 조용해졌다. 어음의 진위를 확인했다더니 결과가 나온 것인가.
“키르탄 왕국에서 발행하고 대륙 법원에서 공증한 어음이라고 하셨는데, 이 어음은 가짜입니다.”
“뭐?”
“키르탄 왕국에서 어음을 발행한 적도 없으며, 어음에 찍힌 법원의 인장도 조작된 것입니다.”
헨리는 어안이 벙벙해져 법관들만 바라보았다. 어음이 가짜라니. 그럼 키르탄 왕자도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인물이란 것인가. 헨리는 모니카를 바라봤지만, 그녀도 경악하긴 마찬가지. 그때 군터가 자리에서 일어나 헨리에게로 다가왔다.
“황제, 이제 어쩔 건가?”
그의 물음에 헨리는 슬슬 뒷걸음질 쳤다.
‘젠장! 낸시 이것이 우리를 속였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