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군터는 단번에 헨리의 목을 거머쥐었다. 그의 손등에 심줄이 툭 튀어나올 정도로 힘을 주어 잡았다.
“다시 말해 봐라. 이혼이 아니라고?”
“놔라, 짐승 놈아! 감히, 누구의 몸에 손을 대는 거냐?”
헨리도 강하게 반항하자, 곧바로 근위대가 군터를 향해 검을 겨눴다. 하지만 군터는 근위대는 신경조차 쓰지 않았다. 그저 마리아를 두고 제 황후라는 둥, 이혼은 무효라며 까분 것이 노여울 뿐이지. 참, 오랫동안, 많이 참아 주었다. 마리아가 아니었다면 결코 눈 뜨고 봐주지도 않았을 텐데.
“황제, 그대의 문제점이 무엇인 줄 아나?”
“!?”
“무지.”
황궁 안에만 살다 보니 세상사가 얼마나 복잡한지 모르는 것, 제 머리로만 생각하고 판단하며 그것이 옳다고 여기는 오만과 편견, 그런 자가 황위에 있으니 당연히 나라가 엉망이지. 무엇보다 버린 것은 절대 다시 줍지 않아야 황족인데도 그는 염치도 없었다.
“빚을 못 갚았으니, 나는 황제의 한쪽 눈알을 도려내야겠단 말이지.”
군터는 제 부츠에 꽂힌 단검을 꺼내 들었다.
“이 새끼들아! 어서 이놈을 잡아!”
헨리는 제 얼굴로 드리운 단검을 보곤 근위대를 향해 버럭 고함을 질렀다. 하지만 근위대 중 누구도 섣불리 군터에게 덤벼드는 자는 없었다.
“염려 말라고, 아주 깔끔하게 도려내서 이 푸른 눈동자에 금줄을 꿰어 내 목에 걸고 다닐 거니까.”
항시 자신을 야만인, 짐승이라 불러 주니 그 기대에 부응해 주어야지.
“으……아아악! 누가 좀 말려 줘!”
이쯤 되면 모니카나 하다못해 마리아라도 달려와 막아 줘야 하는 게 맞았다. 한데 누구도 그를 저지하지 않았다. 정말 이대로 군터에게 눈알이 파이는 건가.
“대왕, 자중하시오.”
한데 군터를 막은 사람은 뜻밖에도 찰스였다. 군터는 흘깃 찰스를 보곤 히죽 웃으며 거머쥔 헨리의 멱살을 놓아주었다. 그러곤 군터는 미련 없이 마리아에게로 돌아갔다.
“!?”
헨리는 놀라서 주위를 살피다 찰스가 병사들을 이끌고 자신을 구하러 온 것을 목도했다.
“숙부!”
역시 피붙이밖에 없는 것을. 찰스라면 틀림없이 제 편이 되어 줄 거라 믿었다.
“숙부, 저 무도한 자가 짐을 욕보였습니다. 어서 응징해 주십시오!”
헨리는 설움에 북받친 채 찰스에게 그간의 일을 전부 고해바쳤다. 하지만 찰스는 헨리의 말을 묵묵하게 듣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찰스의 표정이 예전과 달랐다. 그러고 보니, 법정에 있던 귀족들과 정무대신들이 찰스의 등 뒤에 포진한 이유를 모르겠다. 왜 저들이 마치 찰스가 황제인 양 뒤에 있는 거지?
“귀족 회의에서 결정을 내렸소. 헨리 코부르크 당신은 이제 라스토니아의 황제가 아니오.”
이번에는 찰스가 아닌 다른 이가 헨리에게 다가와 정색하며 말했다.
“스테인 후작, 무엄하다!”
“우리 귀족들은 찰스 코부르크 대공을 새로운 황제로 추대하기로 하였소.”
“그게 무슨 개똥 같은 소리야? 누구 마음대로 황제를 갈아?”
모니카가 득달같이 달려와 소리쳤다. 그러자 귀족들이 모니카를 향해 야유를 보냈다.
“헨리, 그대의 어머니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아시오?”
“뭐?”
“당신의 모친이 라스토니아의 인장을 키르탄 왕자, 아니지 어음도 가짜라고 밝혀졌으니 왕자는 무슨? 여하튼 그 사기꾼에게 빼돌렸단 말이오.”
헨리는 정신이 반쯤 나간 얼굴로 모니카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하얗게 질린 모니카를 보게 되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선황후가 황실의 인장을 빼돌리다니, 그건 곧 교수형감이란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인데……. 에이, 그럴 리가 없었다.
“아니죠? 어머니?”
“아니야!”
모니카는 찰스를 향해 눈을 희번덕거리며 삿대질했다.
“증거 있어? 내가 인장을 빼돌렸다는 확실한 증거가 있느냔 말이야?”
“증거? 아무렴, 증거도 없이 왔을까.”
찰스는 모니카를 향해 문서 한 장을 보였다.
“이건, 키르탄의 왕자, 아니지 그 사기꾼의 자술서요. 그리고 대예배당의 밀실을 확인한 결과 황실의 인장은 자리에 없었소.”
그의 발언에 장내가 소란해졌다. 찰스는 시종을 시켜 그 문서를 법관들에게 전달했고 그들도 읽는 내내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선황후께서 에론 티크에게 황실 인장을 언제, 어디서, 몇 시에, 왜 주었는지 소상히 적혀 있습니다.”
법관들의 말은 또 다른 소란을 일으켰다.
“그건…… 빼돌린 게 아니라, 잠깐 빌려 달라고 해서…….”
모니카가 겁에 질려 우는 모습을 멍하니 보던 헨리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고, 찰스는 비통한 얼굴로 마지막 선고를 했다.
“헨리 코부르크는 이 시간 이후로 라스토니아에서 추방하며, 모니카 코부르크는 교수형에 처한다.”
찰스의 마지막 선고가 광장의 종소리처럼 울렸다.
* * *
마리아는 군터와 망루에 올라, 헨리가 황궁에서 쫓겨나는 광경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속이 답답한지 모르겠다. 복수하면 아주 통쾌할 줄 알았건만, 오롯이 좋지만은 않았다. 그렇다고 후회하거나 헨리를 향한 동정심 때문도 아니었다.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그렇지, 새로운 시작을 향한 진통이라고 하는 게 맞을 터였다. 그때 마리아는 전과 다른 태동에 화들짝 놀랐다.
“왜? 마리아!”
마리아가 몸을 움찔거리자, 군터가 더 놀랐다.
“배 속의 아기가 발길질을 해요.”
“어, 그러고 보니 배가 더 커졌다.”
“틀림없이 군터를 닮았을 거예요. 그러니 이렇게 엄마한테 발길질을 서슴없이 하죠.”
“그……런가. 아니지, 마리아도 만만치 않은데?”
“제가요? 저는 벌레 한 마리도 못 죽이는 순한 여자랍니다.”
“아, 그래서 로랑을 그렇게 해 놓았나?”
“그거야…….”
상황이 그리 만든 거지. 한데 로랑을 떠올리니, 바로 한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겹쳤다. 더불어 자신이 계획한 복수도 끝에 다다랐음을 깨달았다.
“마리아, 내일이라도 돌아가자.”
“조금만요. 더 마무리할 일이 남았어요.”
한때 라스토니아 제국의 황후였으나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니 완전히 이곳을 떠나기 전에 반드시 끝을 보고 넘어가야 할 일이 남았다.
“군터.”
“응?”
“우리 가문이 완벽하게 복권되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요.”
“그렇군, 모두 되찾아야지.”
“만약 부모님이 살아 계신다면, 아니 반드시 돌아오실 거예요. 그러니 제가 원래대로 되돌려 놓아야 해요.”
폐허가 된 스튜어트 가문을 다시 세우는 일은 매우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또한 자신이 마무리를 짓지 않으면 찰스 대공은 스튜어트 가문의 복권을 차일피일 미루며 제대로 처리하지 않을 터. 아버지와는 평생 정적으로 살았으니까. 그러니 이것만큼은 자신이 마무리 짓고 헬랜드로 돌아갈 참이다. 그리고 자신은 돌아가 목숨을 걸고 출산을 해야 할 터.
마리아는 그런 제 생각을 군터에게 말해 주었다. 한데 이해 못 할 줄 알았던 군터가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해 주자 울컥 눈물이 났다. 정말이지, 군터는 막무가내로 일을 처리하던 예전의 그 사람이 아니었다. 어느새 일국의 왕으로서 면모를 갖춰 가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군터, 키스해 줘요.”
마리아가 두 팔로 그의 목을 부둥켜안았다.
“키스로 될까?”
“나머지는…….”
마리아가 비음 섞인 어조로 말을 얼버무리자, 군터는 그대로 그녀의 입술을 덮어 버렸다.
* * *
다음 날, 모니카의 교수형이 거행되었다.
“나는 잘못한 게 없어! 이게 다 낸시 그년의 모략이라고!”
모니카는 단두대에 오르는 순간까지 낸시를 저주했다. 물론 마리아도 그녀의 저주를 피하기는 어려웠다. 군터는 마리아 대신 모니카의 교수형을 참관했다. 임신한 여인이 보기에는 끔찍한 광경이라 보여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찰스! 이 나쁜 놈아! 넌 네 마누라를 이렇게 죽게 내버려 두는 거야? 내 아들, 헨리! 엄마를 구해 다오.”
“어험! 죄인의 눈을 가려라!”
찰스는 자신에게 폭언을 퍼붓는 모니카를 외면하곤 명령만 내렸다. 아무리 아내라고 해도 봐줄 수가 있는 죄를 지었어야지. 다른 것도 아니고 나라의 인장을 빼돌리는 경우가 어디에 있다고. 누구에게 물어도 모니카의 교수형은 적법하다 할 것이다. 이건 나라를 팔아먹은 것과 같았다. 모니카가 단두대에 머리를 올리자, 그녀는 울음을 그쳤다.
‘그래도 살면서 진짜 사랑은 해 봤잖아. 그러면 된 거지.’
비록 에론 왕자의 순정이 거짓이라도 제 감정은 살면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순수했었다. 나라의 인장을 주어도 아깝지 않을 만큼. 남들처럼 진짜 사랑도 못 해 보고 죽으면 억울할 뻔했는데, 느지막이 사랑이란 열정을 알게 되어 다행이었다.
그때 슝! 탁- 위에서 떨어진 칼이 모니카의 목을 쳐 내며 그녀의 머리는 데구루루 굴러가 나무통에 떨어졌다. 공포는 험준한 길처럼 길기만 했으나 죽음은 한순간에 그녀에게 평화를 선사했다.
그 시각, 마리아는 라스토니아에서도 가장 외진 석탑으로 올라갔다. 물론 계단을 오르다 서다 반복했지만, 곁에 노라가 있어서 할 만했다.
“임신부들한테 계단 오르기는 그리 나쁜 운동은 아닙니다.”
노라의 말에 마리아는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제 예상대로라면 괜찮냐고 물을 줄 알았건만, 운동이라 여기라니. 역시 강한 어머니 노라다웠다.
“막달에 가면 많이 움직여 줘야 순산해요.”
“네네, 알겠습니다. 시녀장님.”
두 사람은 아이에 관해 이야기하면서 석탑까지 무사히 올라왔다. 하지만 석탑 문이 열리는 순간 마리아의 표정은 싸늘하게 바뀌었다.
“마리아.”
낸시는 자신을 가둔 사람이 마리아라는 사실에 경악했다. 그때 노라가 낸시에게 달려가 세차게 뺨을 내리쳤다.
“존칭을 써라. 감히 누구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느냐?”
얼마나 세게 때렸는지 낸시의 입술이 터져 피가 흘렀다.
“쯧쯧, 가여운 것.”
마리아는 낸시를 안타깝게 바라봤다. 헨리가 먼저 움직이기 전에 낸시를 빼돌려야 했다. 군터의 호위대가 직접 나설 수가 없어서 앤드류에게 은밀히 부탁했는데, 이토록 깔끔하게 일 처리를 해 주다니.
“저를 죽이러 오신 거예요?”
낸시는 울고 있었다. 막상 마리아와 이런 상태에서 조우하고 나니 그녀도 감정이 북받쳤던 모양이다.
“낸시, 나는 이제야 너의 말을 이해하게 됐다. 사랑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했던 말.”
“!?”
“하지만 사랑에도 방법이 있잖니. 그런데 넌 방법이 나빴어.”
“그럼 저 같은 게 어떻게 폐하의 마음을 사로잡아요.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눈길도 주지 않으실 텐데.”
“네 말도 옳아.”
평생 시녀로 살던 여자한테 넌 자존감도 없느냐고, 스스로를 더 아끼고 사랑한 후에 상대를 옳은 길로 인도했어야지, 라고 말하는 건 비현실적인 이론에 불과했다. 그래서 더는 구구절절 말하지 않기로 했다.
“나는 너를 용서할 수가 없어. 그래서 벌을 줄까 한다.”
“네.”
“귀족 회의에 참석하여 네가 저지른 죄를 이실직고한 뒤 마땅한 벌을 받든지, 아니면 로랑이 있는 곳으로 가든지, 그건 네가 선택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