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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황후 마리아-99화 (99/120)

99화

마리아는 석탑에서 내려온 뒤에도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낸시는 귀족 회의에서 자신의 잘못을 고한 뒤, 그에 맞는 처벌을 받겠다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의연하게 받아들이려 애쓰던 낸시는 헨리가 추방되었다는 말에 서럽게 울었다.

[다시는 폐하를 볼 수 없는 거겠죠?]

‘헨리, 너를 진심으로 사랑한 여자는 낸시뿐이었어.’

저조차도 황후로 살 적, 헨리를 낸시처럼 좋아한 적이 없었다.

‘그래, 사랑은 죄가 아니지.’

마리아는 실소를 터뜨렸다. 낸시가 조금만 방법을 달리했더라면, 사랑이란 이름으로 스스로를 죄악의 늪으로 밀어 넣지만 않았다면 좋았을 것을.

“속상하시죠?”

씁쓸한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노라가 마리아를 다독이며 말했다.

“어릴 때는 낸시가 내 동생인 줄 알았어요.”

그 정도로 허물없이 지내며 세상에 둘도 없는 관계였건만, 모든 것이 깨져 버리고 말았다.

“그나저나 찰스 대공이 언제 저렇게 거사를 계획한 거래요?”

노라는 찰스가 황위를 노린다는 건 눈치를 챘으나, 이렇게 빨리 귀족들을 제 편으로 만들 줄은 몰랐다.

“시기가 딱 맞은 거죠. 황제가 멍청하니까.”

황제가 무능하고 잘못을 저지르기를 가장 바라는 이가 귀족들인 것을. 그래야 나라의 권력을 휘어잡을 수 있으니까. 이런 반정을 계기로 일명 권력의 물갈이가 이루어지는 건 다반사였다.정치가들에겐 아주 큰 기회이기도 했다.

“찰스 대공 얼굴을 좀 보시라고요. 아주 욕심이 덕지덕지 붙어 있던데…….”

노라는 왠지 찰스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니카를 이용한 것도 그렇고, 아무리 헨리가 잘못했다고 해도 조카를 단번에 쳐 내는 야비함이 싫었다. 일국의 황제라면 인품도 중요한 것을.

“결국 인장이 없으면 귀족들은 찰스 대공을 인정해 주지 않을 거예요.”

“아! 그렇군요.”

역시 마리아는 따로 생각이 있었다. 되레 찰스가 일을 도모하도록 모르는 척한 듯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아기 울음소리가 궁 안을 시끄럽게 울렸다. 마리아와 노라는 그 울음소리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병사들에게 안겨 어디론가 끌려가는 아기를 보게 되었다.

“노라, 저들을 막으세요.”

마리아의 지시에 노라는 다급하게 걸어가 병사들의 앞을 막았다. 이내 마리아도 그들이 있는 곳으로 향했다.

“그 아이는 누구냐?”

“황후님.”

병사들은 마리아를 보곤 고개 숙여 예의를 갖췄다.

“폐위된 헨리 왕과 로랑 세라두의 사생아입니다. 찰스 대공께서 처형하라는 명을 내리셨습니다.”

“뭐?”

마리아는 서럽게 우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헨리를 쏙 빼닮았다. 이제 두 살도 채 안 된 아기였다. 아직 엄마 젖을 먹어야 하는 아이의 목을 치겠다니. 게다가 저 아이는 헨리의 적자도 아니었다. 굳이 사생아까지 죽일 필요가 있을까.

“노라, 아이를 데려오세요.”

“예, 왕비님.”

노라도 이건 아니다 싶었는지 병사들에게 달려가 우악스레 아이를 빼앗아 왔다.

“대공께는 내가 잘 말할 테니, 너희는 돌아가라.”

“예, 황후님.”

마리아는 헨리의 아이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어린것이 죽을 것을 알았는지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우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눈물, 콧물 범벅에 뺨이 다 터질 정도로 그간 많이 울면서 지냈던 모양이다.

“아니, 애가 무슨 죄라고, 애 꼴 좀 봐, 제대로 먹이지도 않았나 봐요. 어이구, 기저귀도 다 젖었네.”

노라는 아이를 이리저리 살피곤 혀를 찼다.

“이제부터 노라가 아이를 보살펴 주세요.”

“그건 어렵지 않지만, 어쩌시려고요?”

“저 아이, 여기에 있으면 반드시 죽임을 당할 거예요.”

* * *

마리아와 군터는 찰스와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한데 찰스는 이미 자신이 황제라도 된 양, 주인 행세를 했다.

“대공, 철회해 주십시오.”

“뭘 말입니까?”

“헨리의 아이를 죽이는 일 말입니다.”

“난 또 뭐라고.”

찰스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고기를 썰어 질겅질겅 씹었다. 마치 마리아의 의견을 씹는 양, 오랫동안 대답하지 않았다.

“대왕은 아시지 않소? 선황제의 씨앗은 완벽하게 제거하는 것이 권력의 세계라는 것을.”

찰스는 마리아의 부탁은 무시한 채 군터에게 동조를 구했다. 군터도 찰스처럼 고기를 썰어 씹더니 오랫동안 말을 아꼈다. 그러다 심드렁한 얼굴로 찰스를 보며 말했다.

“마리아에게 깊은 뜻이 있을 거요.”

“대왕, 적자든 사생아든 선황제의 후사를 살려 두는 건, 훗날 문제가 생길 수 있어요. 일국의 왕이라면 이런 원리 정도는 잘 알지 않소?”

“마리아는 틀린 말을 하지 않소.”

“대왕이 제 입장이라도 충분히 행할 수 있는 일이란 말이오. 그러니 대왕의 비를 말려 봐요.”

“마리아를 말릴 수 없소.”

찰스는 기함을 쳤다. 말간 얼굴로 그놈의 마리아를 외치며 고기를 씹는 군터의 모습이 어찌나 꼴 보기 싫은지. 저런 천하의 머저리를 다 봤나. 여자한테 미쳐서 정신이 나갔다. 북부의 붉은 용의 기백은 다 어딜 가고, 제 마누라 치마폭에 휩싸여 절절매는 꼴이라니.

“대공, 아이를 살려 주시지요.”

“그건 안 될 말이오.”

찰스는 강경했다. 그러자 군터가 포크와 나이프를 거세게 내려놓으며 찰스를 노려보았다.

“그럼, 계산부터 제대로 해야겠군.”

“계산? 무슨 계산을 말하는 거요?”

“1000만 골드.”

군터는 자신이 헨리에게 빌려준 돈을 받을 길이 없으니 찰스가 대신 갚으라며 엄포를 놨다. 만일 갚지 않으면 찰스는 차기 황제가 아닌 게 되는 거라며 압박했다. 어차피 빚은 황실 이름으로 진 것이기에 법정 다툼을 해 봤자 찰스가 지는 싸움이었다.

‘젠장, 황위에 빚까지 떠안게 생겼네.’

찰스가 짜증스럽게 인상을 썼다.

“우리가 헬랜드로 돌아가기 전까지 갚으시오. 금화로.”

“뭐요?”

순간 찰스는 헨리의 눈을 도려내려 했던 군터의 잔인한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군터는 어떤 상황에도 빌려준 돈은 반드시 받아 내고야 마는 철칙을 지키기로 유명했다.

“그렇다고 뭐! 그 어린애가 1000만 골드짜리인 건 아니잖소?”

이왕 계산하기로 한 거, 정확히 따져 보자 싶었다. 헨리의 아이를 마리아에게 준다손 쳐도 그런 거액을 탕감해 줄 리는 없을 테니까. 저 같아도 그런 밑지는 거래는 하지 않는다. 그때 군터는 다시 포크와 나이프로 고기를 썰어 입에 넣곤 찰스를 향해 히죽 웃었다.

“마리아가 원한다면 1000만 골드짜리 선물이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

“!?”

“그게 사람이든, 짐승이든, 땅이든……. 저기 하늘의 별이라도.”

‘하, 진짜 제대로 돌았네그려.’

어쩌면 잘된 일인지도 모른다. 자신이 황제에 등극하면 그 빚은 오롯이 제 앞으로 남을 터. 이참에 없애 버리는 편이 깔끔할 테지.

“그 아이를 헬랜드로 데려가면 되겠습니까?”

마리아는 찰스가 염려하는 문제를 해결해 주기로 했다. 라스토니아에 헨리의 아이가 없으면 해결되는 거니까. 사실 찰스로선 마땅한 일일 것이다. 황위 앞에선 부모·자식도 없는 것이니. 마리아는 헨리의 아들 윌리엄을 헬랜드로 데려가되, 라스토니아에는 절대 발도 들여놓지 못하게 하겠노라 약속했다. 그러자 찰스가 고집을 꺾었다. 때마침 군터의 시종장이 다급하게 그를 찾아와 마리아의 눈치를 보곤 그의 귓가에 무어라 속삭였다. 이내 군터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에로가 납치돼?’

* * *

헨리는 몇 날 며칠을 달렸다. 당장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여 무작정 앞만 보고 말을 달렸다. 한데 어느 순간, 검은 터번을 쓰고 샴쉬르를 든 병사들이 헨리를 양옆으로 호위하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도 모르게 그들을 따라 에바논까지 오게 되었다.

“황제 폐하, 오셨습니까?”

할라드는 헨리를 궁 앞까지 마중 나왔다. 한데 그의 궁전은 참으로 화려했다. 원색의 보석이 벽면을 장식하고 아치형의 문 앞으로 화려한 색감의 유리가 깔린 길이 있었다. 이국적이고 신비로운 분위기의 궁전은 자신이 외국에 와 있음을 실감 나게 했다.

할라드는 헨리를 극진하게 대접했다. 벌써 헨리의 곁에는 아리따운 이국의 여인이 옆에 딱 붙어 시중을 들었다.

“차 먼저 드십시오. 우리는 술을 마시지 않으니 양해해 주시지요.”

할라드는 시종에게 시켜 헨리의 잔에 차를 따르게 했다. 한데 시종이 가져온 주전자는 부리가 날렵하고 길어서 허공에서 차를 따라도 정확하게 헨리의 잔에 떨어졌다. 헨리는 한동안 그 광경을 넋을 잃고 바라보다 거칠게 도리질했다.

“짐을 어째서 이리로 데려온 거요?”

엄밀히 말해서 쫓아온 거나 마찬가지였다.

“폐하, 잃어버린 황위를 되찾으셔야지요. 그 능구렁이 같은 찰스를 그냥 내버려 두실 겁니까?”

“그건……!”

마음 같아선 요절을 내고 싶으나, 자신은 혈연단신으로 궁에서 쫓겨났다. 복수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할라드 술탄을 어찌 믿고, 찰스만큼이나 의뭉한 속내를 가지고 있는 작자인 것을. 혹여 자신을 이용하려는 것일 테지.

“폐하께선 잃어버린 황좌를 되찾으시면 되고, 저는 44번 그놈만 때려잡으면 원이 없습니다.”

“짐이 술탄을 믿어야 할 이유가 있소?”

정말이지, 늙은 여우들을 상대하기가 지겨웠다. 찰스에게 뒤통수 맞은 것도 얼얼한데 이교도의 술탄한테 이용까지 당하라고.

“쯧쯧쯧- 참 순진하십니다. 저렇게 아군인지 적군인지 분간도 못 하시니.”

할라드가 옆으로 누워 물담배를 한 모금 길게 빨아들였다가 내뱄자 붉은 카펫이 깔린 응접실은 묘한 이국의 향기로 가득했다.

“증거를 보여 드리면 믿으시겠습니까?”

“증거요?”

할라드가 시종을 쓱 바라보자, 얼마 뒤 시종들의 손에 한 사람이 끌려 나왔다. 밧줄에 묶인 채로 헨리 앞에 쓰러져 있었다. 한데 어디서 많이 본 사람이었다. 헨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쓰러진 남자의 얼굴을 제대로 확인했다.

“당신은?”

헨리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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