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화
군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뛰쳐나갔고 마리아도 놀라서 그의 뒤를 쫓았다. 이미 복도에는 에로를 호위하던 붉은 군대와 앤드류가 와 있었다.
“에로가 납치되다니?”
“송구합니다, 대왕.”
“송구고 나발이고 설명을 하란 말이야?”
군터가 제 병사들에게 화를 내자, 마리아는 놀라서 몸을 휘청거렸다. 에로가 납치되었다니. 대체 누구한테? 찰스는 아닐 것이다. 그때 앤드류가 나섰다.
“에론 왕자의 방을 조사했는데 외부 침입 흔적이 없었습니다. 창문이 살짝 열려 있는 것 외에는.”
“!?”
“한데, 대왕, 에로……라니요? 에론 왕자와 아는 사이였습니까?”
앤드류는 왕자가 사라진 것을 알았을 때도 놀랐지만, 그의 병사들이 궁으로 달려가 군터에게 고하는 자체가 더 놀라웠다. 자신이 알기론 에론은 키르탄의 왕자인데 왜 군터에게 고한단 말인가.
“앤드류, 자세한 설명은 나중에 할게요.”
마리아가 그의 의구심을 잠재웠다. 지금은 그의 호기심보다 에로가 누구에게 어디로 끌려갔는지가 더 중요했다. 순간 군터의 뇌리에 스친 생각이 있었다. 에로가 제게 인편으로 보냈던 서신.
<대왕, 찰스 대공저에 할라드 술탄이라는 사람이 머물고 있어요. 그 사람이 대왕과 솔샤르 님께 원한이 많아 복수하겠다며 으름장을 놓았습니다. 그러니 각별히 조심하세요.>
설마? 할라드가 에로를 납치한 것인가? 하지만 그럴 만한 근거가 없다. 다만 할라드는 예전부터 마음에 드는 미소년이 있으면 신분을 막론하고 납치하곤 했으니까.
‘그 변태 새끼가 기어이.’
개 버릇 남 못 준다고, 7년을 혼수상태에서 헤매다가 깨어났는데도 그 짓거리를 끊지 못했다는 거지. 마침 앤드류가 군터와 마리아에게 이상한 말을 해 주었다.
“할라드 술탄이 대왕과 싸우겠노라며 라스토니아 국경에 오천의 병사를 배치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요?”
마리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오천의 병사를 데리고 왔었다니.
“바로 쫓아냈지요. 대공저의 성기사들이 그들을 뒤쫓았고요.”
“그럼 돌아간 건가? 에바논으로?”
“성기사들 말로는 두 시간가량은 뒤를 쫓았지만, 어느 지점에 이르니 행방이 묘연해졌답니다.”
결국 할라드를 놓치고 말았다는 소리였다. 한데 의문점은 여전히 많이 남아 있었다. 할라드가 대공저로 다시 돌아왔다면 분명 흔적이 남았을 터. 앤드류의 말로는 술탄의 병사들이 다시 돌아오진 않았다고 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군터와 마리아는 혼돈에 빠지고 말았다. 하지만 죽으란 법은 없는 모양이다. 마리아는 에로가 항시 마법 종이를 챙겨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라모나와 연락하기 위해서. 그렇다면 에로가 머물렀던 방에는 틀림없이 마법 종이가 남았을 터. 그것을 이용하여 스톤에게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군터, 나한테 생각이 있어요.”
“그래?”
* * *
헨리는 떨리는 손으로 에로의 머리를 잡아당겼다.
“넌? 에론 왕자? 아니지, 이 시기꾼 새꺄!”
그는 정신이 몽롱한 에로에게 무자비하게 주먹을 날렸다. 낸시와 무슨 관계인지는 몰라도 이 인간 때문에 자신은 모든 것을 잃고 말았다. 에론 왕자라 사기를 치며 돈을 뿌리고 모니카의 마음을 들쑤시는 바람에, 자신은 황위를 잃었다. 그뿐인가. 지금쯤이면 모니카는 교수형에 처했을 터.
“내 인장은 어디에 있어? 이 새끼야!”
모니카를 꼬드겨 빼앗아 간 인장, 그것만 있으면 다시 황제로 복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때 술탄이 크게 고함치며 헨리를 막았다.
“어이, 황제! 내 물건에 작작 손대슈. 그 예쁜 것에 흠집을 내다니. 쯧쯧쯧-”
그제야 헨리는 에로를 놓아주었다. 그러곤 할라드를 노려보며 말했다.
“이 새낀 그냥 사기꾼이오. 키르탄의 왕자? 다 거짓이란 말이오.”
“거짓? 그럼 더 잘됐구랴, 내 첩으로 딱이구먼.”
“첩?”
헨리는 실소를 터뜨렸다.
“하긴 너 같은 사기꾼 새끼는 남창으로 구르며 벌을 받아야 해. 캭! 퉤!”
헨리는 에로에게 침과 함께 온갖 욕설을 뱉었다. 순간 헨리는 할라드가 에론 왕자를 어떻게 잡아 왔는지 궁금했다. 미꾸라지처럼 요리조리 쏙쏙 빠져나가서 잡기가 매우 힘들었을 텐데. 한데 단숨에 잡아 오다니. 아니지, 방법이 무에 중요하다고. 에론을 잡았다는 사실과 인장을 되찾을 길이 생겼다는 것이 중요했다.
“술탄, 우리 동맹을 맺읍시다.”
“오호라! 이제야 마음을 정하셨나 봅니다.”
헨리는 잠시 머릿속으로 상상했다. 에바논의 군대를 이끌고 라스토니아에 쳐들어가면 찰스는 제 앞에 머리를 조아린 채 벌벌 떨겠지. 살려 달라 손을 비벼 가며 애원할 것이다. 그리되면 자신은 다시 황위에 앉아, 진정한 황제가 누군지 제국민들에게 똑똑히 보여 줄 테다.
“그런데 말입니다. 제가 아주 흥미로운 얘기를 하나 해 드리지요. 술탄의 노예 44번에 관해서 말입니다.”
머뭇거리던 헨리는 사라진 지 오래였다. 이젠 그의 눈은 살기로 번뜩였다. 역시 신은 아직 자신을 버리지 않았다. 이렇게 제게 힘이 되어 줄 사람을 만나게 해 주었으니. 할라드의 병사들만 있다면 현재의 라스토니아 군대는 맥없이 무너질 것이다. 자신이 황제였는데 왜 모를까. 재정이 부족해서 군대 관리를 잘 못하여 엉망진창인 것을.
“자아, 말해 보쇼? 어떤 재미난 얘기인지?”
“그 전에 결과부터 말하지요.”
“결과?”
“술탄은 시궁창의 쥐새끼 같은 44번을 죽이고, 짐은 아내와 황위를 되찾는 거요.”
“아내?”
“44번 그놈이 내 아내를 훔쳐 갔소.”
“쯧쯧,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놈 같으니.”
할라드가 물담배를 뿜어내며 걸쭉하게 웃어 댔다. 하지만 그는 완벽하게 만족스럽지 않은지, 연신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 광경에 헨리는 의아함을 느꼈다. 원하는 대로 다 해 주겠다는데 어째서 저러는 거지?
“황제, 실은 내가 때려죽일 인간이 하나 더 있소이다.”
“누구요?”
“리베리오 교황.”
“!?”
헨리는 놀라긴 했으나, 곧 자신만만한 얼굴로 할라드를 보았다. 왠지 자신이 그에게 큰 도움이 될 듯싶었다.
* * *
마법 종이를 태워 스톤에게 서신을 보내 봤지만 돌아온 답변은 암울했다. 거리가 멀어서 스톤의 마력이 그곳까지 뻗치지 못해 알 수 없다고 했다. 더구나 스톤은 겨울잠 중이라서 그마저도 라모나가 대신 전한 말이었다. 사실 군터는 이미 짐작했다. 스톤의 영적인 힘은 헬랜드 안에서만 발휘된다는 것을. 무엇 하나 흔적이라도 남겼다면 그것을 근거로 찾아 나서기라도 하련만. 할라드와 친분이 있다는 찰스 대공에게 물어도 딱히 건질 만한 답은 듣지 못했다. 정치적으로 몇 번 만나서 이야기를 한 것이 전부라고 했다.
“마리아, 우선 내일 이곳을 떠나자.”
“네. 어디든 가서 에로를 찾아야죠.”
“그래.”
두 사람은 절망적인 상태로 황실에서의 마지막 밤을 보내게 되었다. 군터는 아무리 고민해도 에로를 납치할 사람은 할라드밖에 없다고 단정했다. 그의 성격상, 아름다운 에로를 보고 그냥 지나치진 못했을 터. 한데 무슨 수로 납치를 했는지는 정말 모르겠다. 그때였다. 코끝으로 아주 오래전에 맡았던 물담배 냄새가 스쳤다. 곧 눈앞이 희미해지며 정신이 몽롱했다.
찰싹! 찰싹! 살을 때리는 가죽 채찍 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기둥에 두 팔이 묶인 채로 채찍을 맞는 어린 소년이 보였다.
[44번! 그렇게 고집부려 봐야 소용없다. 오늘 밤이라도 내 방으로 오면 예뻐해 주마.]
[차라리, 날 죽여! 이 변태 새끼야!]
[이런, 겁대가리 상실한 노예 놈이……!]
할라드는 잘 피우던 물담배를 집어 던지곤 자리에서 내려와 제 시종의 채찍을 빼앗았다.
[네놈이 더 얻어터져 봐야 정신을 차리지?]
술탄의 채찍은 가차 없이 군터의 등을 찢었다. 술탄의 얼굴에 피가 튀자, 그는 희열을 느끼는지 낄낄거리며 웃었다. 군터는 그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에 소름이 끼쳤다.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로 할라드의 웃음소리는 끔찍했다.
“허……. 업!”
정신을 잠시 잃었던 군터가 눈을 번쩍 떴다. 한데 제 위로 검은 연기가 넘실대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몸을 움직이려고 해도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수가 없었다. 그저 눈동자만 부산스레 움직일 뿐. 검은 연기는 누군가의 모습으로 변하더니, 웃기 시작했다.
“44번 아주 오랜만이구나.”
‘할라드!’
역시 그였다. 하지만 자신이 알던 할라드는 흑마법을 쓸 줄 몰랐다. 하면 혼수상태에서 깨어나 마법을 익힌 것인가. 군터는 자신이 꿈을 꾸는 거라 여겼다. 하지만 곁에 마리아가 잠들어 있으며, 지금 누워 있는 곳은 헬랜드의 제 왕궁이 아닌 라스토니아의 황궁이었다.
“이날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른다. 네놈을 다시 만나길 손꼽아 기다렸지.”
할라드가 뱀처럼 느물거리며 말하는데도 군터는 혀가 마비되어 한마디도 하지 못했다.
“아름다운 여자구나. 너같이 천하디천한 놈이 이토록 고귀한 여자를 손에 넣다니.”
‘안 돼! 마리아한테 손가락 하나도 대지 마!’
군터는 눈알이 빠질 듯이 할라드를 노려보았다.
“복수는 참으로 즐거운 일이지. 상대를 마음껏 난도질한 뒤, 서서히 죽어 가는 광경을 마음껏 즐길 수 있거든.”
검은 연기가 마리아에게로 다가가 그녀의 몸을 칭칭 옭아맸다.
“44번, 나는 달라졌다. 예전처럼 무식하게 채찍질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네놈이 목숨처럼 여기는 것을 빼앗고 짓밟은 뒤, 가루로 만들어 허공에 날려 버릴 거다. 그리고 너는 아주 무기력하게 그 광경을 지켜보게 될 거다. 바로 지금처럼 말이야. 크크크-”
군터는 숨이 넘어가도록 소리쳤지만, 그의 목소리는 밖으로 터져 나오지 못했다.
“나를 찾아와서 덤벼 봐라. 늦으면 늦을수록 네 여자는 고통스러울 거다.”
‘이 개새끼야! 마리아를 놔줘! 나를 죽이란 말이야!’
할라드는 검은 연기가 되어 마리아의 머리카락조차 보이지 않게 옭아매더니 그대로 창밖으로 날아가 버렸다.
‘마리아!’
군터의 절규는 금세 새카만 어둠에 묻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