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황후 마리아-101화 (101/120)

101화

에로는 제 눈앞에 있는 두 남자를 보곤 치를 떨었다. 할라드와 헨리, 그 두 인간이 손을 잡을 줄이야. 두 사람은 커다란 좌식 식탁에 음식을 가득 채워 놓곤 푹신한 카펫에 앉아 함께 식사했다. 살아 있는 인형처럼 아리따운 시녀들이 시중을 들자, 헨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할라드는 시녀들에겐 관심조차 두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로지 저만치 바닥에 비굴하게 묶여 있는 에로에게 고정됐다.

‘역겹군.’

헨리는 에로를 집요하게 쳐다보는 할라드의 눈빛에 욕지기가 났다. 자신은 에로가 너무 계집애 같아서 별로였다. 하지만 씹어 먹어도 시원찮을 에로가 제 앞에 비참하게 붙잡혀 있으니 얼마나 통쾌한지 모른다. 놈 때문에 모니카는 교수형에 처해지고 인장은 사라졌다. 어떻게든 에로한테서 인장을 다시 받아 내야지.

“황제, 저 녀석이 인장이 어디에 있는지 술술 말합디까?”

“전혀요. 생긴 거 답지 않게 고집이 보통이 아닙니다.”

헨리의 투정에 할라드가 껄껄대며 웃었다. 한데 할라드도 그렇게 웃을 입장은 못 되는 것을. 에로를 원하지만, 억지로 취하지는 않는 것이 반전이었다.

‘역시 변태야.’

생긴 것만 보면 원하는 건 억지로 가질 것 같은데. 굴종하지 않으면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대신 자기 취향대로 길들 때까지 혹독하게 괴롭히며 희열을 느끼겠지. 그때 헨리는 빵 하나를 에로 앞에 획- 던지곤 소리쳤다.

“지금이라도 말해. 인장이 어딨는지.”

그러자 에로가 키득키득 웃더니 헨리를 한심하게 바라봤다. 흑마법에 취해 며칠간 정신을 못 차렸건만, 결국 끌려온 곳이 할라드의 궁전이라니. 아무래도 할라드를 너무 얕본 게 화근이었다. 에로는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떤 방법을 써서라도 군터와 마리아에게 할라드가 흑마법을 부릴 줄 안다고 알려 주어야 할 텐데.

“어디 있는지 말해 주면 찾으러 갈 순 있고? 헬랜드 대왕 앞에선 고양이 앞의 쥐새끼처럼 벌벌 떠는 주제에.”

에로는 마음껏 헨리를 비아냥거렸다. 나약하고 변덕도 심하며 이기적인 인간이 황제의 자리에 있었으니 얼마나 많은 사람이 피해를 봤을까. 혼자서는 숨 쉬는 것 빼고는 할 수 있는 게 없는 인간, 복수도 할라드의 손을 빌려서 하려 들겠지. 한심해서 화가 날 정도였다.

“저 변태 새끼가!”

헨리는 에로의 말에 얼굴이 붉어지더니 고함을 쳤다.

“변태는 내가 아니고 저 노인네지. 그리고 넌 머저리고.”

그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는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에로를 향해 다가갔다. 곱상한 낯짝을 작살을 내 놔야 정신을 차릴 테지. 에로의 턱을 거세게 거머쥔 헨리의 손등에 심줄이 터질 듯 돋았다. 하지만 헨리는 할라드의 제지에 멈춰야 했다.

“황제, 저놈의 세 치 혀에 놀아나지 마쇼.”

“뭐요?”

그러고 보니 할라드의 얼굴은 평온했다. 에로가 대놓고 변태라고 했는데도 얼굴색조차 변하지 않았다. 그저 입술에 기름을 지저분하게 묻히며 양고기를 뜯어 먹느라 바빴다.

‘상스럽게, 손으로 처먹고 난리지.’

아무리 좋게 봐 주려고 해도, 아니 친해지려고 해도 한계가 있는 인간이었다. 정말이지, 제 취향과는 너무 거리가 멀어서, 마음 같아선 당장이라도 이곳을 떠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갈 데가 어디에 있다고.

“황제, 저 예쁜이의 말이 옳지 않소?”

할라드는 양고기 기름으로 번들거리는 입으로 말했다.

“뭐가 말입니까?”

“황제는 44번 앞에선 쥐새끼처럼 벌벌 떨지 않느냐는 말이오.”

“술탄! 짐을 모욕하지 마시오!”

헨리가 버럭 화를 내자 할라드는 들고 있던 고기를 내려놓은 뒤, 손가락에 묻은 기름을 쪽쪽 빨기 시작했다. 마치 헨리의 역정이 가소롭다는 듯이.

“워워, 흥분만 하지 말고 냉정하게 따져 보슈. 황제가 현재의 상태로 44번을 이길 수 있는지 없는지 말이오.”

“!?”

어리둥절한 헨리와 달리, 에로는 할라드의 숨은 의도를 바로 알아챘다.

“무슨 소립니까?”

헨리가 선뜻 제 뜻을 이해하지 못하자, 할라드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기로 했다.

“황제에게 내 힘을 빌려드리리다. 나는 마법을 쓸 수 있소.”

“마법!”

“황제가 원하는 것은 다 이뤄질 수가 있다오.”

그제야 헨리의 눈동자에 이채가 돌았다. 마법이라……. 한낱 인간이 범접할 수 없는 힘이란 거지. 하긴 그것만 있으면 군터 따위 얼마든지 뭉개 버릴 수 있을 터. 반면 에로는 눈을 질끈 감았다. 저 어리석은 인간이 할라드의 꼬임에 넘어가다니. 흑마법을 쓰려면 자신의 영혼을 더럽혀야 하는 것을.

그뿐만이 아니었다. 흑마법을 쓰고자 한다면 반드시 제물이 필요한 법. 헨리는 제 목숨을 담보로 내놔야 한다는 걸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한데 할라드가 그런 말은 쏙 빼 버리고 하지 않았다. 그때 에로의 뇌리에 섬광이 스쳤다.

‘그렇구나, 사람이 7년 만에 깨어났는데 저렇게 강할 수가 없지. 할라드는 제 영혼을 제물로 바쳐 흑마법을 익힌 거야.’

그래서 3년간 군터를 향한 복수를 계획한 것이다. 군터가 절대 자신을 이길 수 없도록 강한 힘을 키우고 싶었던 거겠지. 그러나 강한 군터를 상대하려면 마력 소모가 클 테니, 헨리를 이용하려는 것이고.

“황제도 할 수 있소이다.”

“?”

“나처럼.”

헨리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거인 같은 사내가 식당으로 들어왔다. 한데 그의 품에는 정신을 잃은 한 여자가 안겨 있었다. 이내 헨리와 에로는 경악했다.

“마리아!”

“왕비님!”

에로는 사지를 부르르 떨었다. 자신을 납치했던 것처럼 마리아한테도 흑마법을 쓴 것일 터.

* * *

군터는 마리아가 사라진 지 한 시간이 지난 후에야 몸의 마비가 풀렸다.

“으아아아악!”

그는 침대에서 튕기듯 일어나 소리를 질렀다. 때마침 시종장과 노라가 득달같이 달려 들어왔다.

“대왕, 왜 그러십니까?”

“노라, 마리아가 납치됐다.”

이게 무슨 소리? 자다가 꿈을 꾼 건가? 한데 마리아가 누워 있어야 할 옆자리가 휑했다. 게다가 곳곳에 검은 얼룩이 묻어 있었다.

“예?”

“시종장, 내 갑옷, 검, 투……구 어서 가져와!”

군터는 창백해진 얼굴로, 차가운 설원에 알몸으로 서 있는 양 파들파들 떨었다. 노라는 군터가 이토록 겁에 질린 모습은 처음 보았다. 그래서 더 충격이었다.

“할라드, 이 악……마 같은 새끼를 갈기갈기 찢어 죽일 거다.”

노라는 숨을 멈춘 채 뒷걸음질 쳤다. 아무래도 군터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이대로 두면 불나방처럼 홀로 불구덩이로 뛰어들 기세였다. 때마침 시종장이 허둥대며 군터의 군복을 챙겨 오자, 그는 닥치는 대로 입었다.

‘어떡하지?’

노라는 머릿속이 하얬다. 그러나 저라도 침착해야 할 터, 마리아가 납치를 당했고 군터는 광기에 사로잡혔다. 이럴 때 솔샤르라도 곁에 있다면 좋을 텐데.

‘대왕은 제정신이 아니셔.’

때마침 침실로 한 남자가 뛰어 들어왔다. 얼마 전에 스치듯이 인사만 나눈 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대왕, 무슨 일입니까?”

앤드류는 늦게까지 책을 읽다가 묘한 냄새를 맡고 코를 킁킁거렸다. 처음 맡아 보는 기분 나쁜 냄새였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제 방을 밝히던 불이 다 꺼질 정도로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시종들이 잘 단속한 창문은 굳건하건만 어디에서 이런 바람이 불어오는 것일까. 앤드류는 의구심에 사로잡혀 방에서 나와 복도를 헤맸다. 한데 저 멀리, 군터의 침실 문틈으로 검은 연기가 새어 나오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광경에 넋이 나가 무려 한 시간을 서 있었는지도 몰랐다. 그러다 군터의 비명에 정신이 들었다.

“할라드가 마리아를 납치했다.”

“예?”

“비켜라! 당장, 에바논으로 쳐들어가 마리아를 구해야 한다.”

앤드류가 보기에도 군터는 제정신이 아니었다. 공포로 아득한 눈동자, 힘없이 흔들리는 몸, 입으론 연신 쓰디쓴 탄식을 내뱉으며 괴로워했다.

“약제실에 가서 진정 약을 타 오세요!”

앤드류는 노라와 시종장을 향해 소리쳤다. 군터의 심경은 충분히 이해하나, 급한 건 당장 마리아를 구하러 가는 일이 아니었다.

“예……? 예,”

두 사람은 우당탕 밖으로 뛰쳐나갔다.

“대왕, 침착하십시오!”

앤드류는 군터를 붙잡고 애원했다. 하지만 돌아온 건 그를 우악스럽게 뿌리치는 힘뿐이었다.

“내 앞을 막지 마라. 죽여 버리기 전에!”

군터의 아랫입술이 무섭게 떨렸다. 앤드류는 군터에게 맞을 각오를 했다.

“지금 이대로 가시면 대왕도 죽습니다. 아니, 대왕은 할라드를 이길 수가 없습니다.”

“!?”

군터는 앤드류의 멱살을 거칠게 잡았다. 할라드를 이길 수 없다니. 자신은 지난날 할라드에게 무기력하게 핍박받던 약한 소년이 아니었다. 군터가 앤드류의 얼굴을 갈기려 한쪽 주먹을 추어올린 채 부르르 떨었다.

* * *

“왕비님? 네가 마리아를 왜 그렇게 불러?”

헨리는 마리아를 제 품에 안았다. 한데 에로가 마리아를 잘 아는 양 다른 호칭으로 부르는 게 이상했다. 순간, 깨달았다. 마리아와 에로, 모두 한통속이라는 것을.

“왕비님의 몸에 손대지 마!”

에로는 헨리의 추궁 따위 개의치 않았다. 단지 헨리로 인해 마리아가 더럽혀지는 게 싫었다.

“하! 나를 파멸시키기 위해였어? 이 모든 계획이 마리아의 머리에서 나온 거였나?”

그제야 사건의 전말이 밝혀졌다. 그 순간, 헨리는 제 손바닥을 펼쳤다. 마리아가 제게 천벌을 내리겠노라 저주했던 글자가 여전히 선명하게 보였다.

“이게 천벌이야, 마리아?”

헨리는 정신을 잃은 마리아를 보며 비아냥거렸다. 결국 납치당해 제 품에 안겨 있으면서 할 소리는 아니었다. 뭐, 그래도 상관없다. 자신도 그녀를 아프게 했으니 주거니 받거니 했다 치면 될 테니까. 마리아가 제게 있는데 무슨 걱정. 다시 시작하라는 신의 계시일 터. 더불어 할라드의 힘은 상상했던 것보다 대단했다. 현재 제겐 아무런 힘이 없으니, 그의 힘을 빌리면 잃어버린 황위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헨리는 할라드를 진지하게 바라보며 말문을 열었다.

“술탄, 짐에게 힘을 빌려주시오.”

그의 말에 할라드는 흡족하게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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