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2화
성난 붉은 용을 잠재우기 위해 무려 다섯 명의 남자가 달려들었다. 앤드류는 겨우 군터에게 진정 약을 먹였고, 얼마 후 군터는 깊은 잠에 빠졌다. 앤드류는 군터가 잠든 모습을 보곤 바로 찰스를 찾아가, 밤새 일어난 사건에 관해 말했다.
“뭐라고? 폐황후 아니지, 헬랜드 왕비가 납치를 당해?”
그도 적잖이 놀란 얼굴이었다.
“아버지, 진짜 모르셨습니까? 할라드 술탄이 흑마법을 부릴 수 있다는 것을요.”
“모…… 몰랐다. 신께 맹세코.”
“큰일입니다. 대공저도 황궁도 할라드가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드나들 수 있게 됐으니까요.”
“뭐?”
“그자가 마음만 먹으면 아버님의 목숨도 해칠 수 있단 말입니다.”
앤드류는 찰스에게 사태의 심각성을 일깨워 주었다. 군터가 광기를 부리며 하는 말을 들었는데, 할라드는 검은 연기가 되어 창문으로 들어와 마리아를 납치했다고 했다. 그러니 사람 하나 죽이는 일이 무에 대수라고.
“오! 신이시여!”
고로 황궁도 위험하다는 뜻이었다. 찰스는 그대로 황좌에 주저앉았다. 괜스레 인맥을 트려 했다가 커다란 혹을 붙인 셈이었다. 할라드가 성질이 지랄 같은 건 알았으나 이토록 사악한 인간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게다가 에론도 놈에게 잡혀갔으니 인장을 되찾을 길이 더욱 막막해져 버렸다. 하루라도 빨리 인장을 손에 넣어야 귀족들이 자신을 진짜 황제로 인정해 줄 터. 그렇지 않아도 귀족 회의만 열면 인장을 찾아 오라는 성화에 미칠 지경이었다.
“이제 일을 어쩐다.”
찰스가 손으로 제 이마를 거머쥐었다.
“아버지, 지금 동원할 수 있는 병사의 수가 얼마나 됩니까?”
“할라드와 전쟁이라도 하자는 게야?”
하고 싶어도 헨리가 국정을 엉망진창으로 해 놔서 그럴 여력이 없었다. 찰스는 앤드류를 향해 거칠게 도리질했다. 안 될 말이라고. 어차피 마리아는 제 나라 황후도 아닌데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었다. 한데 앤드류가 찰스를 한심한 얼굴로 쳐다보며 말했다.
“인장, 안 찾으실 겁니까?”
“인장! 찾아야지.”
“사병이라도 내놓으십시오. 그래야 아버지께서 귀족들을 휘어잡을 수 있습니다.”
‘오호라! 정세가 혼란스러울 때는 전쟁만큼 좋은 것이 없지.’
찰스는 큰 깨달음을 얻은 얼굴로 앤드류를 보았다. 역시 앤드류는 제 외가를 닮아 머리가 비상했다. 저와 판박이였다면 평생 잔머리만 굴렸을 터. 하지만 이미 전쟁의 결과는 나왔다.
“앤드류, 우리는 할라드의 군대를 못 이긴다.”
“…….”
앤드류도 그 말은 부정하지 않았다. 국경에 오천의 병력을 대기 시킬 정도인데, 현재 라스토니아는 오백의 병력도 어려웠다. 그만큼 재정적으로 어려운 상태에 직면해 있기 때문이다. 어차피 전쟁이란 것도 국가가 부강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그때 시종장이 다급하게 찾아왔다.
“대공 전하, 헬랜드에서 손님이 왔습니다.”
“손님?”
* * *
군터는 밤이 되어서야 잠에서 깼다. 한데 눈을 뜨자마자 보인 사람은 놀랍게도 솔샤르였다.
“솔샤르!”
그가 벌떡 일어나자 솔샤르가 군터에게 예의를 갖췄다. 그리고 그의 곁에는 앤드류도 함께였다.
“이제 좀 진정이 되십니까?”
앤드류의 낯빛도 그리 좋지 못했다. 군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앤드류가 제게 무얼 먹였는지는 몰라도 마음이 한결 차분해졌다.
“에로가 보낸 서신을 읽고 왔습니다.”
솔샤르는 이미 앤드류에게 그간의 사정을 들었는지 침울한 표정이었다. 그때 솔샤르는 품에서 마석 하나를 꺼내더니, 앤드류에게 건넸다.
“흑마법을 막아 주는 마석입니다. 황궁에서 가장 높은 석탑에 놓으십시오. 마석이 스스로 결계를 쳐서 황궁을 보호할 겁니다.”
“고맙습니다.”
앤드류는 그제야 한시름을 덜었다. 하지만 세 남자의 고민은 깊어졌다. 화가 난다고 해서 무작정 에바논으로 쳐들어갈 일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솔샤르, 우리 전사들이 총 몇 명이지?”
“삼백이 되지 않습니다.”
에바논의 병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그곳은 예전부터 인구가 많았다. 그러니 동원할 수 있는 병사의 수가 헬랜드의 몇 배는 될 터.
“어차피 전면전은 불가능합니다.”
솔샤르는 침착한 어조로 말했다. 한데 군터는 그런 솔샤르가 신기하게만 느껴졌다. 에로가 납치되었다는데 어떻게 저렇게 평정심을 유지할 수 있을까. 저 자신은 마리아만 떠올리면 심장이 찢어질 것처럼 아픈데.
“솔샤르, 아무렇지도 않으냐?”
군터는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참는 겁니다. 미칠까 봐.”
“!”
군터는 허탈하게 웃었다. 솔샤르도 할라드에 관해 누구보다 잘 아는 터였다. 그가 얼마나 변태스러운 남색가인지. 그러니 그 속은 이미 뭉그러지고도 남았을 터.
“네가 나보다 의젓해.”
“대왕, 그나마 우리한테 무기가 하나 생겼습니다.”
“뭐지?”
“제이미가 마법 학교에서 돌아왔는데 비페르의 눈알을 개조했습니다.”
“!”
솔샤르는 눈알의 새로운 기능에 관해 이야기했다. 제이미는 비페르의 눈알에 날개를 달아서 사람의 시야가 닿지 않는 구석진 곳까지 살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 눈알의 주인은 손거울로 적진 안쪽의 상황을 쉽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물론 눈알은 제 주인의 명령에만 따르며 라모나가 마법을 불어 넣어, 흑마법에도 걸리지 않는다고 했다.
솔샤르는 군터에게 상자 하나를 건넸다. 이내 그가 상자를 열자, 눈알에 붙어 있는 이상한 날개와 부산스레 움직이는 동공이 보였다.
“제이미가 이름을 새로 지었다고 합니다.”
“이름?”
“드롬입니다.”
“드롬? 어울리는 이름이다.”
정말이지, 제이미는 천재가 확실했다. 자신은 그 나이 때 구걸밖에 못 한 것을. 군터는 그대로 상자를 닫아 버렸다. 훌륭한 무기가 생겨서 좋기는 하나, 머릿속이 복잡했다. 어떻게 작전을 짜야 효과적으로 빠르게 놈들을 제압할 수 있을까. 지금의 병력으론 절대 할라드를 굴복시킬 순 없을 터. 군터의 고뇌가 깊어 갈 때쯤, 앤드류가 좀 더 절망적인 이야기를 꺼내 놓았다.
“대왕, 헨리 왕은 아마도 할라드와 손을 잡았을 겁니다.”
“뭐?”
“제 기사들이 헨리 왕을 뒤쫓던 중 알게 된 사실입니다. 에바논의 병사들이 헨리 왕을 데려갔답니다.”
그렇다면 현재 헨리의 손아귀에 마리아가 떨어졌다는 결론이 된다. 하지만 아주 최악이라고 속단하기엔 일렀다. 오히려 멍청한 헨리가 그곳에 있다면 일이 더 편해질지도.
“솔샤르, 혹시 인장도 가져왔느냐?”
“예.”
군터는 지그시 눈을 감곤 생각에 빠졌다. 앤드류는 어제와 완전히 달라진 군터의 침착한 모습에 적잖이 놀란 터였다.
“대왕, 흥분이 가라앉으신 모양입니다.”
앤드류는 군터의 극적인 변화가 신기하여 물어보았다.
“어떻게 죽여야 가장 고통스러워할지 고민하는 거다.”
눈을 뜬 군터의 청록빛 눈동자가 분노로 새카매지더니, 그의 관자놀이가 불뚝거렸다.
“반드시 보여 줄 거다. 살아 있는 지옥을.”
* * *
마리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며 미간이 일그러졌다. 아주 오래 잠든 것 같은데, 머리가 쪼개질 듯이 아팠다. 한데 이 느낌은 무엇일까. 코끝에 풍기는 이국적인 향기, 차가운 바닥, 굳이 눈을 뜨지 않아도 캄캄한 곳임을 알 수 있었다. 그때 고통스러운 신음이 생생하게 들렸다.
‘무언가가 잘못된 게 틀림없어.’
직감적으로 제 곁에는 군터가 없음을 알았다. 눈을 뜨면 끔찍한 광경을 보게 될 테지.
“으……. 윽!”
곁에서 들려오는 신음이 왠지 귀에 익었다. 마리아는 순간 가슴이 선뜩했다.
‘아니겠지, 설마.’
그녀는 어느새 눈을 뜬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곁눈질로 제 옆에 쓰러진 사람을 흘깃 보았다.
“아……. 악.”
다시 들려온 신음에 마리아의 고개가 자연스레 움직였다. 그리고 마주한 광경은 마리아를 충격으로 몰아넣었다.
“악!”
마리아는 단말마의 비명을 지르곤 두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에로.’
그녀는 입에서 손을 떼곤 벌벌 떨며 에로에게로 다가갔다. 상반신이 완전히 벗겨진 채 엎드린 사람이 에로가 아니길 바랐지만, 그녀를 못 알아볼 자신이 아닌 것을.
에로의 등에는 수없이 많은 채찍 자국이 있었고 상처에선 피가 흥건하게 흘렀다. 그제야 마리아는 에로와 함께 알 수 없는 감옥에 갇혔음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입고 있던 가운을 벗어 에로의 상체를 덮어 주곤 제 품에 끌어안았다.
“에로, 나야.”
기어이 에로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니, 마리아의 입에서 터지려던 비명이 그대로 입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너무 무서워서 비명조차 지를 수 없는 상황이 딱 이 순간이었다.
“왕……비님?”
“그래, 어쩌다가……. 아니, 어떻게 사람을 이 꼴로……. 하!”
마리아는 에로의 참혹한 모습에 입만 벌린 채 제대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하늘빛 눈동자에서 쉴 새 없이 눈물이 쏟아져 에로의 얼굴에 떨어졌다.
“가……여워서 어……떡해.”
마리아는 슬픔이 차올라 숨을 끊어 가며 겨우 말을 이어 갔다. 그녀는 제 얼굴을 에로의 뺨에 비비며 오열했다. 저와 에로가 왜 이런 낯선 곳에 끌려왔는진 알 수 없으나 매우 끔찍한 일을 당한 건 확실했다.
“괜……찮아요, 울지 마세요. 왕비님.”
에로는 피범벅이 된 손으로 마리아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다 내 잘못이야. 나 때문에 이런 험한 일을 겪게 된 거야.”
마리아의 울음소리는 점점 격해졌다.
“그……런 말 하지 마. 내 친구 마리아. 너를 위해 일……할 수 있어서 얼마나 행복한데.”
에로도 오열하며 말을 이어 갔다. 그때 문이 벌컥 열리며 누군가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마리아! 그놈한테서 손 떼!”
“!?”
마리아가 고개를 돌리자, 헨리가 서 있었다. 한데 그의 모습이 사뭇 이상했다. 눈동자며 입술이 새카매지고 얼굴은 전과 다르게 창백했다. 붉은 핏줄이 다 보일 만큼.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손에는 피 묻은 채찍이 들려 있었다. 설마? 저 채찍으로 에로를 때린 건가.
“당신이 에로를 이렇게 만든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