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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황후 마리아-103화 (103/120)

103화

헨리는 마리아의 질문에 대답은 하지 않고 그녀에게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그는 마리아의 품에 안겨 있는 에로를 짐짝처럼 던져 버리곤 소리쳤다.

“변태 새끼랑 뭐 하는 짓이야?”

“에로!”

다급히 에로에게로 다가가던 마리아는 헨리의 손에 저지당하고 말았다.

“나가자!”

“싫어.”

“싫어? 감히 짐의 명을 거역하는 거야?”

“헨리, 당신은 더 이상 라스토니아의 황제도 내 남편도 아니야.”

그러니 그에게 매사 깍듯하게 존칭을 쓸 필요가 없었다. 아니, 그럴 가치가 없었다. 하지만 헨리는 마리아의 팔을 우악스럽게 붙잡곤 감옥에서 끌어냈다.

“이거 놔! 에로와 있을 거야!”

마리아의 격렬한 몸부림에도 헨리는 그녀를 거칠게 대했다. 끝내 마리아를 차가운 돌벽으로 밀어붙였다. 이내 헨리의 얼굴이 마리아의 코끝까지 밀착했다. 한데 그한테서 이상한 향기가 났다. 독초와 짐승의 털을 태우면 나는 연기 냄새, 그리고 비릿한 짐승의 피 냄새도 풍겼다. 가까이에서 보니, 자신이 알던 예전의 헨리가 아니었다.

‘흑마법에 취해 있어.’

어리석은 인간 같으니. 기어이 할라드의 수작에 걸려들어 그의 앞잡이 노릇을 하려는 것일 터.

“마리아, 너 그런 여자였어?”

헨리는 혼탁한 눈빛으로 마리아를 노려보더니 거세게 질책했다.

“뭐?”

“넌 고고한 백조 같은 여자였단 말이야. 그런데 저런 변태 새끼를 아무렇지도 않게 안고, 심지어 짐승 새끼랑 붙어먹기도 했지.”

“말조심해.”

그의 눈이 마리아의 불룩한 배로 향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두 손으로 배를 감쌌다.

“너와 짐은 황제이고 황후였다고. 그게 신이 정해 준 운명이야. 그러니 그렇게 아무 놈하고 붙어먹으며 막살면 안 된다고, 마리아.”

‘미친 인간, 제정신이 아니야.’

역시 타고난 천성은 어쩔 수 없는 건가. 흑마법에 취해서 그런 게 아니라, 헨리는 원래 이상한 우월감에 빠진 남자이긴 했다. 라스토니아의 황제인 자신은 신탁을 받은 신성한 존재라서 어떤 죄를 저질러도 죄가 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것이 곧 신의 뜻이라 믿는 거겠지. 하긴 황궁이 세상 전부인 양 살았으니 그럴 수도 있지.

저 또한 헨리와 다를 바가 없었다. 황후가 되어 황제를 보필하고 황실의 안주인 역할을 잘해 내는 것이 신이 부여한 제 운명이라고 여겼다. 한데 그런 잘못된 편견을 깨 준 사람이 공교롭게도 헨리였던 것을. 그러니 이번에는 자신이 그의 잘못된 세계관을 깨 줘야겠지.

“당신과 나, 우린 그냥 사람일 뿐이야. 사랑하고 배신하고 분노하다가 다른 사람을 만나 전혀 다른 인생을 살기도 하는 평범한 사람일 뿐이라고. 그러니까 착각에서 벗어나. 당신은 이제 라스토니아의 황제가 아니야. 물론 나도 황후가 아니고.”

마리아의 말에 혼탁했던 헨리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실소를 터뜨렸다.

“짐은 마리아를 용서할 거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 거니까. 본디 황제는 관대한 존재거든.”

“하……!”

말이 전혀 통하지 않았다. 일부러 남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는 건지, 정신이 이상해진 건지 모르겠으나 정상적인 소통이 불가능했다. 처음에는 원래 철없는 인간이라 그런 줄 알았는데, 착각은 헨리가 아니라 저 자신이 하고 있었다. 그때 헨리는 고개를 숙인 채 키득키득하며 웃었다.

“마리아, 보여 줄게. 짐이 인간 같지 않은 것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말이야.”

헨리는 손에 든 채찍을 매만지며 서늘한 미소를 지었다. 순간, 마리아는 깨달았다. 헨리가 매일 에로에게 채찍질하려 한다는 것을.

“에로한테 손가락 하나라도 대면, 절대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야.”

마리아가 몸을 떨며 말하자, 키득거리던 헨리는 손등으로 마리아의 뺨을 쓸어내렸다.

“왜? 또 천벌이라도 내리게?”

그는 끼고 있던 가죽 장갑을 벗어 던지곤 마리아를 향해 손바닥을 활짝 펼쳤다.

“!?”

감쪽같이 사라졌다. 리베리오가 준 펜으로 헨리의 오른 손바닥에 저주의 글귀를 적었건만 완전히 지워졌다. 분명 그 펜은 한 번 그리면 절대 지워지지 않는다고 했는데. 역시 흑마법을 이용한 듯했다.

“용서는 마리아가 아니라, 짐이 할 수 있는 거야. 그러니까 짐한테 잘 보이라고.”

마리아는 그의 사악한 웃음에 욕지기가 났다. 차라리 예전의 철딱서니 없는 헨리가 그리울 지경이었다. 그런데 이건 그저 약한 농담에 지나지 않았다. 헨리는 눈으로 마리아의 몸을 애무하듯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끈적하게 훑어 내렸다. 그러다 다시 시선이 마리아의 배에 머물렀다. 물론 마리아는 제 손으로 여전히 배를 감싼 채였다.

“하루라도 빨리, 내 침실로 와. 짐이 사랑해 줄 테니.”

“미……쳤어?”

임신한 여자한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하지만 헨리에겐 금기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 배 속의 아이 말이야.”

“!?”

“우리가 사랑하면 짐의 아이로 바꿀 수 있거든.”

“읍.”

마리아는 너무 놀라 손으로 제 입을 틀어막았다. 대체 할라드는 헨리에게 무슨 짓을 했기에 그가 악마가 된 걸까. 심장에서 피어난 공포가 마리아의 전신으로 급속하게 퍼져 나갔다. 마리아는 사지를 떨며 헨리한테서 멀어지려 몸을 움직였다.

“마리아, 짐을 거부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저 안의 변태 자식의 고통은 멈추지 않게 될 거야. 그러니 판단 잘하도록 해.”

쫙! 가죽 채찍이 돌벽을 때리는 날카로운 마찰음이 마리아를 그 자리에 주저앉게 했다. 마리아는 눅눅하고 어두운 벽에 기대어 두려움에 떨었다. 어떻게 해야 저 자신과 에로를 지킬 수 있을까. 군터가 구하러 올 때까지 버텨야 하는데, 적들은 모두 미쳤다.

* * *

군터는 고민에 빠졌다. 할라드가 원하는 건, 바로 저 자신만이 아니었다. 그자는 본디 탐욕이 끝이 없는 인간이기에, 제 예상대로라면 라스토니아까지 넘보고 있을 것이다. 물론 어리석은 헨리는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터. 어떻게 해야 적은 병력으로도 에바논의 군대를 격파할 수 있을까. 역시 방법은 단 하나밖에 없다.

“솔샤르, 내가 할라드와 담판을 짓겠다. 너는 마리아와 에로를 구해라.”

“예, 대왕.”

“저는 무얼 하면 됩니까?”

앤드류가 의아한 얼굴로 군터에게 물었다. 비록 싸울 줄은 모르지만 넋 놓고 있을 수는 없었다. 라스토니아를 위해 무엇이라도 해야 하니까.

“넌 빠져라, 말도 못 타는 주제에 무얼 한다는 게야?”

마침 찰스가 들어와 앤드류를 막았다. 그는 군터에게 자신이 군대를 이끌고 출정을 하겠노라 선언했다. 물론 군터를 비롯한 모든 이가 놀랐다. 그중에서도 가장 놀란 사람은 단연코 앤드류였다. 제 아비는 그리 용맹하지도 않을뿐더러, 자신에게 이득이 되지 않는 일에는 절대 나서지 않는 사람인 것을.

“아버지께서요?”

“귀족들이 모두 나만 보고 있지 않느냐? 내 손으로 인장을 되찾고 라스토니아를 지키는 모습을 보여 줘야지.”

아, 그런 의도라면 충분히 이해가 됐다. 차기 황제로서의 정당성을 인정받고 싶은 것일 터. 그때 솔샤르가 세부적인 작전을 이야기했다.

“드롬으로 정찰을 해 보니, 에바논의 국경은 허술한 곳이 많았습니다. 게다가 마물도 없습니다. 그래서 경계를 푼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그쪽으로 병력을 분산시켜 잠입해야 합니다.”

솔샤르는 탁자에 펴 놓은 지도에 깃발을 꽂으며 설명했다.

“알겠소이다. 후방은 내가 치고 들어갈 테니, 두 사람이 앞을 맡아 주시오.”

앤드류는 제 아버지가 달리 보였다. 물론 그가 목적이 있어서 그런다는 건 알지만, 이미 그의 눈빛은 전과 달랐다. 하긴 제 아버지에게 라스토니아를 빼면 아무것도 남지 않으니 필사적일 수밖에.

“그래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 있지 않을까요?”

앤드류는 조바심이 났다. 비록 승마도 검술도 무예에도 능하지 않으나, 후방에서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 싶었다.

“앤드류가 할 일이 있긴 한데 말이지. 그게…….”

군터가 어두운 얼굴로 말끝을 흐렸다.

“대왕, 뭡니까?”

“아니다.”

군터는 섣불리 대답하기를 꺼렸다. 할라드가 흑마법을 쓴다면, 아무리 대단한 군대가 가도 쉽게 이기기는 무리였다. 최악의 경우, 많은 병사의 목숨이 희생될 터였다. 물론 자신도 살아남기는 힘들 것이다. 한데 도움을 청할 곳이 딱 한 군데 있긴 했다. 하지만 그가 쉽사리 응할지는 미지수였다.

“말씀해 주십시오.”

앤드류는 비장한 얼굴로 재차 물었다. 대체 얼마나 어려운 일이기에 군터가 회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걸까.

“교황에게 서신을 써야 한다. 아니, 설득해야 하지.”

“리베리오 교황님께요?”

“그래, 하지만 교황은 절대 나라 간의 분쟁에 관여하지 않을 거다.”

제 뿌리인 스튜어트 가문이 멸문해도, 마리아가 곤경에 처해도 교황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그러니 이번에도 마찬가지일 터. 리베리오는 교황으로서 스스로에게 엄격한 존재기에 절대 예외를 두지 않을 터. 중립을 지키며 기도나 하고 있겠지. 그때 앤드류가 반색하며 군터에게 다가왔다.

“제가 해 보겠습니다.”

“!?”

“제가 교황님께 도움을 요청해 보겠습니다.”

거의 불가능한 일이지만, 군터는 열의에 찬 앤드류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세상에는 종종 변수라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하니까.

“솔샤르, 출정 준비해.”

“예, 대왕.”

군터는 완전무장을 한 뒤, 붉은 용 투구를 머리에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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