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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황후 마리아-104화 (104/120)

104화

할라드는 군터가 보낸 서신을 읽곤 아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역시 제 예상대로 일이 돌아갔다. 병력으로 볼 때 라스토니아는 현재 에바논의 상대가 될 수 없는 데다가 아무리 붉은 군대가 용맹하다고 한들 에바논을 이기기는 무리였다. 그러니 원한이 사무친 당사자들끼리 담판을 짓는 게 현명할 터.

“44번이 황제를 벌하러 온답니다.”

할라드는 맞은편에 있는 헨리를 향해 교활한 어조로 말했다. 물론 서신에는 헨리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그러나 이따위 종이 나부랭이에 적힌 내용을 바꾸는 건 너무 쉬운 일이었다.

“뭐요?”

헨리는 할라드의 손에 쥔 서신을 가져가 읽었다.

“천하의 폭군이며 어리석은 헨리에게 천벌을 내리러 가마?”

그는 서신을 읽는 내내 노여움에 치받쳐 몸을 떨었다. 어디 사람 같지도 않은 짐승이 감히 라스토니아의 황제에게 이따위 막말을 하다니.

“염려 말아요. 황제가 당한 모욕은 내가 풀어 줄 테니.”

“아뇨. 술탄, 짐이 직접 상대할 거요. 짐이 그 천한 놈을 벌해야겠소.”

헨리의 목소리에 분노가 서려 있었다.

“그러시렵니까? 하긴 황제는 현재 누구보다 강한 힘을 가졌으니, 그깟 인간 나부랭이쯤 죽이는 건 일도 아닐 거외다.”

순간 할라드의 동공이 뱀처럼 가늘어졌다. 그가 말할 때마다 입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헨리는 곁에서 그 연기에 취해 갔다. 헨리의 탐욕이 짙어 갈수록 흑화는 빠르게 진행될 터. 그리되면 자신은 강한 무기를 손에 쥐게 된다.

‘네가 44번 그놈을 때려죽이면 네 몸은 내가 흡수해 주지.’

그러잖아도 젊은 몸이 필요하던 차였다. 한데 라스토니아 황제의 몸뚱어리만큼 좋은 것도 없지. 훗날, 라스토니아를 통치하기도 수월하고. 그러려면 순수한 양기가 더 많이 필요했다. 자신을 증오하지 않는 맑고 깨끗한 양기.

“황제, 그 예쁜이는 언제쯤 내 품에 안기는 거요?”

할라드가 헨리를 재촉했다. 얼마 전까지 에로가 저 스스로 술탄의 침전에 들게끔 만들겠노라 호언장담하더니, 며칠이 지나도 감감무소식이었다.

“매일 채찍질하는데도 고집이 보통 아니오. 아무래도 내일쯤 숨통이 끊어질 듯한데.”

“쯧쯧- 그런 예쁜이를 죽이면 쓰나, 몇 년 만에 만난 귀한 물건인데.”

‘역겨운 새끼.’

헨리는 어색하게 웃으면서 속으론 할라드를 욕했다. 자신이 나라만 되찾아 보라지, 이런 상스러운 인간과는 상종도 하지 않을 테니. 궁전에 여신 같은 시녀들이 즐비한데 어째서 변태처럼 남색을 하는지 이해가 안 됐다. 하긴 그건 저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제 눈에도 그림처럼 아리따운 시녀들이 보이지만, 이상하게 마리아에게 집착했다. 수많은 여자가 있으나 세상에 여자는 마리아 한 명인 양 그녀를 원했다.

“그나저나 이틀 후면 44번 그놈이 도착할게요. 놈을 상대하려면 무기가 필요하잖소.”

할라드가 손가락을 까딱이자, 시종이 부리나케 무언가를 가져왔다.

“황제, 선물이오.”

이내 헨리의 손에는 아주 기다란 채찍이 쥐어졌다. 그런데 보통 채찍과는 사뭇 거리가 멀었다. 헨리가 저 멀리 채찍을 휘두르자 촤르르- 금속 마찰음이 울렸다. 채찍은 가죽이 아니라, 얇은 칼날이 여러 개로 연결되어 있어서 한 번 휘두르면 자칫 살을 도려낼 수 있을 정도로 흉포한 무기였다. 곧 헨리의 얼굴에 흡족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정말이지, 이 무기만 있으면 누구한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 * *

마리아는 몸이 불덩어리인 에로를 안곤 눈물을 흘렸다. 매일 채찍질을 당해 등은 거의 다 찢어진 상태, 피가 나다 못해 살갗이 괴사하고 있었다. 에로는 마리아의 무릎에 얼굴을 댄 채 엎드려 있었다.

“에로, 더는 무리야. 내가 헨리한테 갈게.”

마리아는 에로를 위해서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현실이 너무 고통스러웠다. 헨리가 제게 무리한 제안을 했지만, 에로를 살리기 위해선 어쩔 수 없다고 여겼다. 한데 에로가 막아서 버텼으나, 이러다간 에로가 언제 숨이 끊어질지 모를 터.

“안…… 돼, 마리아.”

숨을 쉬기도 어려운 에로는 신음을 토해 내듯 마리아를 만류했다. 하지만 에로가 죽어 버리면 마리아는 평생 저 자신을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군터를 향한 미안함, 여자의 자존심보다 급한 건, 에로를 구하는 일이었다.

“너 죽으면 내 영혼도 죽어.”

“하……지 마, 나 괜……찮아.”

아니, 에로는 전혀 괜찮지 않았다. 더불어 어째서 자신은 헨리를 이길 수 있는 작은 능력 하나도 가지고 있지 못한지 한탄스러웠다. 마리아는 에로를 잠시 바닥에 내려놓은 뒤, 감옥 문을 두드렸다. 이내 문이 열리고 시위가 모습을 나타냈다.

“헨리를 불러와라. 내가 할 말이 있다고 해.”

더 고민할 필요가 없다. 에로부터 살리고 봐야지. 얼마 뒤, 헨리가 모습을 드러냈다. 마리아는 비장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다 아주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에로를 치료해 줘. 당신이 하자는 대로 다 할 테니까.”

그제야 헨리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나의 황후 마리아는 언제나 현명했어. 예전으로 돌아와서 다행이야.”

‘정신 나간 인간.’

헨리는 알까? 지금 제 얼굴이 얼마나 흉한지. 흑마법에 물든 모습이 살 떨리게 끔찍하다는 것을 전혀 모를 테지.

“에로가 죽으면 나도 죽을 거야. 그러면 당신은 인장도 황후도 얻지 못해.”

“걱정하지 마.”

헨리는 시위들을 시켜 에로를 데려가라 명령했다. 그는 궁의를 불러 에로의 등을 치료하고 약을 먹이라고 했다. 마치 마리아를 만족시키듯이 온갖 인심을 다 썼다. 마리아는 감옥에서 나와 시녀들을 따라 욕장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지켜본 헨리는 더할 나위 없이 뿌듯했다. 드디어 조각난 퍼즐이 하나씩 맞춰지며 원래의 자리로 돌아가고 있었다. 하늘이 내린 황제와 황후가 인장을 들고 라스토니아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자신이 바라던 일이었다. 또한 평생 황제인 자신이 원하고 사랑한 여자는 마리아밖에 없음을 깨달았다.

‘군터 플레이슬리, 오늘 밤, 마리아의 배 속에 있는 애는 짐의 아이로 바뀔 거다.’

그 사실을 군터가 알면 얼마나 절망할지, 상상만 해도 짜릿했다. 두피까지 소름이 돋아날 정도로. 헨리는 마리아와 맞이할 역사적인 밤을 기대했다. 한편 마리아와 에로가 갇혀 있던 감옥 창밖으로 드롬이 연신 날갯짓을 하다가 금세 멀리 날아가 버렸다.

“흐으윽!”

솔샤르는 두 손에 거울을 쥔 채 오열했다. 며칠째 드롬이 보여 준 에로의 상태가 너무 충격적이라 더는 감정을 자제할 수가 없었다. 아주 오래전, 자신이 겪었던 그 지독한 학대를 에로가 고스란히 당한 채 죽어 가고 있다니.

“솔샤르.”

군터가 놀라서 그에게 다가갔다. 에바논과의 국경이 지척이었다. 이 밤이 지나면 둘 다 적진으로 들어가야 하는데, 솔샤르가 평소답지 않게 흔들리는 모습에 놀랐다.

“으아아악!”

솔샤르는 주먹으로 연신 땅을 치며 울었다. 그는 여간해서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건만. 군터는 땅에 떨어진 거울을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이내 거울 안에는 홀로 감옥에 엎드려 있는 에로가 보였다. 군터는 에로의 처참한 모습을 보자마자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그리고 얼마 후, 군터는 몸에 지진이 난 양 떨었다.

“용서하지 않을 거다.”

에로의 모습 위로 과거의 자신과 솔샤르가 겹쳐 보였다. 그때 당한 고통이 해일처럼 군터의 영혼을 덮쳤다.

“대왕! 할라드, 그 악마 새끼는 반드시 제 손으로 죽일 겁니다.”

솔샤르는 몸을 휘청거리며 일어나 새카만 어둠을 향해 울분을 토해 냈다.

“멀지 않았다.”

군터는 솔샤르의 어깨를 꽉 잡았다. 실제로 내일이면 저와 솔샤르는 할라드의 궁전으로 향할 터. 흑마법이 득실거리는 적진에서 싸워야 하는 것이 문제지만 절대 물러서지 않을 참이다.

“솔샤르, 너는 반드시 에로와 마리아를 구해 내야 한다.”

“예.”

“궁전에는 나만 들어갈 테니, 두 사람을 부탁한다.”

군터는 솔샤르에게 궁전의 다른 문을 통해 잠입하라고 명령했다. 어차피 드롬이 길잡이가 되어 줄 테니까.

“대왕!”

마치 유언 같았다. 할라드의 궁전에는 수많은 병사가 있을 테고, 흑마법사 할라드가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 한데 군터 혼자 그들을 상대하겠다니. 찰스가 군대를 이끌고 와도 승리하리라는 법은 없는 상황.

“염려 마십시오. 에로와 왕비님을 구한 뒤 저도 합류하겠습니다.”

“아니, 넌 끝까지 두 사람을 지켜라.”

군터는 이번 싸움에 목숨을 걸 생각이다. 그러지 않고서는 승산이 없는 전쟁일 테니까. 언젠가는 해결해야 할 일이 조금 일찍 도래한 것일 뿐. 늘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다.

“마리아가 늘 그랬다. 헨리에게 무엇이 옳고 그른지 보여 주겠다고. 나도 그래. 할라드에게 알려 주고 싶다. 악마의 힘은 결국 스스로를 파멸시킬 거라고 말이다.”

군터는 자신이 말하고도 실소가 터졌다. 그런 말을 한들 알아먹을 인간이 아닌 것을. 말도 말이지만 그를 응징하는 것으로 보여 줘야겠지. 그런데 솔샤르가 불편한 얼굴로 군터를 바라봤다. 마치 군터에게 못 한 말이 있는 사람처럼.

“말해 봐.”

서로를 속이기엔 너무 잘 아는 사이.

“헨리 왕이 흑화한 것 같습니다.”

“할라드의 앞잡이가 되었겠지.”

“그런데 왕비님께 집착하며 해괴한 요구를 했습니다.”

그것까진 말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이 상황에 군터에게 숨길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해괴한 요구?”

“헨리가 왕비님과 잠자리를 통해 배 속의 아이를 제 아이로 만들겠다고 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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