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군터는 잠시 참았던 숨을 거칠게 내뱉었다. 사악하고 더러운 음모의 배후에는 할라드가 있을 터. 에로의 목숨을 담보로 마리아를 겁박하고, 헨리는 죄악이 죄악인 줄도 모른 채 할라드의 마리오네트가 되어 조종당하고 있었다. 군터는 마리아가 어떤 결단을 내리든 존중하기로 했다. 왜냐하면 그녀는 현재 선택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엔 음험한 상상으로 가득했다. 헨리와 마리아가 알몸으로 뒹구는 광경. 사람의 감정은 모순 덩어리라는 말이 백번 천번 옳았다. 그는 거칠게 도리질하며 헛된 상상을 떨쳐 내려 했다.
“마리아한테 미안한 할 따름이다. 그리고 가엽구나.”
군터는 격앙된 어조로 솔샤르에게 제 솔직한 감정을 드러냈다. 마리아가 제 여자라는 이유로 할라드의 더러운 계략의 희생양이 된 거니까.
“내게 마리아는 숭고한 종교와도 같다.”
비록 어떤 신도 숭배하지 않으나, 마리아의 말, 생각, 행동 심지어 실수까지도 믿고 있다. 그러니 앞으로 원망하거나 어떠한 의심도 하지 않을 참이다.
“대왕, 제가 괜한 말씀을 드린 것 같습니다.”
솔샤르가 비통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말이었는데.
“아니, 잘했다. 어차피 할라드의 궁전은 사악한 악마의 소굴이거든. 마리아가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다.”
솔샤르는 군터의 말에 담겨 있는 진심이 느껴졌다. 저 또한 에로가 살아 있기만을 바라니까. 하긴 할라드가 마리아와 에로를 납치했을 때는 꽃밭에 모셔 두려는 목적은 아니었을 터. 그들을 교묘하게 흠집 내며 저와 군터에게 고통을 주려는 것이다.
“맞습니다. 할라드의 계략에 휘둘려선 안 됩니다. ”
“그래.”
대답하는 군터의 목소리가 매우 저조했다. 누구보다 그 악마에 관해 잘 알고 있으나 가슴을 할퀴는 불안감은 떨칠 수가 없었다. 그러면서도 솟구치는 울분이 군터의 몸을 관통하여 그는 저 자신을 온전히 지탱하기가 어려웠다.
때마침 희소식이 전해졌다. 헬랜드에서 제이미가 찾아온 것이다.
“대왕, 부관님!”
“제이미!”
“네가 여기까지 어떻게?”
군터가 의아하게 묻자, 제이미는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대왕, 잊으셨어요? 저 마법 학교에서 1등 했어요.”
“그러하냐?”
제이미는 솔샤르 편으로 드롬 하나를 보낸 게 마음에 걸렸는지, 좀 더 마력이 강한 드롬을 여러 개 가져왔다. 제이미가 아직 열한 살밖에 안 된 어린애이긴 하나, 웬만한 어른보다 의젓하고 침착했다. 마법 학교 교장이 보낸 서한에 제이미는 천재라며 극찬할 정도였으니까. 겨울잠에 들어간 스톤의 공백을 제이미가 채우고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두 분께 드릴 것이 있습니다.”
“드롬 말고 또 있느냐?”
“예, 제가 헬랜드에서 나는 마석으로 만든 무기입니다.”
마석으로 마든 무기라니, 군터와 솔샤르는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정작 자신들이 광산을 경영하지만, 헬랜드에서 생산되는 마석의 종류를 다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때 제이미가 군터와 솔샤르에게 칼날이 없는 손잡이 하나씩을 건넸다.
“이게 검이라는 거냐?”
솔샤르는 날이 없는 손잡이만 쥔 채 고개를 갸웃거렸다.
“제가 만든 마검입니다. 손바닥을 살짝 그어 보세요.”
두 남자는 제이미의 말대로 손잡이를 쥔 채, 마치 검이라도 있는 양, 손바닥에 그었다. 그러자 군터의 손바닥에서 피가 튀며 붉은 검날이 나타났다. 또한 솔샤르의 검날은 푸른빛을 띠었다. 제이미의 말로는 마석 중에 정체를 감출 수 있는 것이 있다고 했다. 거기에 자신의 마법으로 보이지 않는 검을 완성했다고 했다. 정말이지, 드롬은 그저 애들 장난에 불과할 정도로 검은 훌륭했다.
“더 놀라운 얘기를 해 드릴까요?”
“!?”
“그 마검은 상대의 마력을 흡수합니다. 살짝 위험하긴 한데, 대왕과 부관님은 충분히 다루실 수 있을 거예요.”
“상대의 마력을 흡수한다?”
“하지만 한 번밖에 사용할 수가 없어요. 목숨이 위태롭다고 느끼실 때만 사용하세요.”
순간 군터의 가슴에 흥분이 몰아쳤다. 마리아와 에로로 인한 괴로움이 조금은 가라앉았다고 할까. 할라드와 대적할 수 있는 강한 무기를 얻게 되었으니까.
* * *
마리아는 궁전의 치유사들이 에로의 등을 치료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약을 바르고 깨끗한 붕대로 상체를 감싼 뒤, 열을 가라앉히는 약을 먹였다. 그러자 에로는 깊이 잠들었다.
“상처가 심한 만큼 약도 독합니다.”
다행히 이곳의 치유사들은 나쁜 사람들 같아 보이진 않았다. 악마 같은 할라드로 인해 한때는 궁인들까지 수상하게 보였다. 한데 이들도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에 지나지 않았다. 한데 더 씁쓸한 건, 치유사들이 채찍질에 죽어 가는 사람들을 너무 능숙하게 치료한다는 것이다. 그만큼 할라드의 채찍질에 죽거나 불구가 된 사람이 많다는 거겠지. 마리아는 치료실 안을 획 둘러보았다.
‘군터도 이곳에서 치료를 받았을까?’
아니다, 스톤이 보여 준 기억에선 군터는 이런 배려조차 받지 못했다. 그나마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사람들은 할라드에게 굴복한 자들일 터.
“침전으로 드실 시각입니다.”
마침 시녀들이 마리아를 데리러 왔다. 헨리와의 약속을 지켜야 할 시간이었다. 마리아는 침울한 표정으로 시녀들을 따라갔다. 그러다 잠시 걸음을 멈추곤 병상에 누워 있는 에로를 바라보았다.
‘에로, 절대 죽으면 안 돼.’
그녀는 치유사들에게 에로를 신신당부한 후에야 다시 움직일 수 있었다. 한데 죽으러 가는 길도 이렇게 참담할까. 마치 처형장에 끌려가는 양 비통했다. 한 걸음을 뗄 때마다 군터의 얼굴이 아른거려서 눈물이 차올랐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에로를 살리기 위함이라곤 하나, 죄책감과 수치심에 가슴이 답답했다.
‘이 방법밖에는 없는 걸까.’
아무리 헨리의 손아귀에서 벗어나려고 해도 도통 묘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드디어 헨리의 침전에 도착했다. 라스토니아 황실과 달리, 이국적인 커튼이 몇 겹으로 늘어져 있고 화려한 카펫에는 아주 크고 푹신한 쿠션이 놓여 있었으며, 그 위에는 부드러운 모피가 깔려 있었다. 그리고 코를 강하게 자극하는 이국적인 향기. 마리아가 고개를 돌리자, 침전에는 곳곳에 향로가 놓여 있었다. 그곳에서 희미하게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마리아, 왔어?”
에바논 전통 의상을 입은 헨리가 머리를 괸 채 침상에 누워 있었다. 자수가 화려한 검은 가운 사이로 그의 맨몸이 고스란히 보였다. 그제야 마리아는 헨리와의 잠자리가 실감이 났다.
“한 번이면 되지?”
그녀는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 한 번도 치가 떨리게 싫었다.
“무슨 소리야? 우린 부부인데. 예전으로 돌아간 거라고.”
“헛소리하지 마. 우리가 어떻게 예전으로 돌아가.”
마리아는 검게 물들어 몽롱해진 그의 눈을 보곤 놀랐으나, 일부러 자분자분하게 따졌다. 하지만 자신의 말은 날아가던 화살이 벽에 부딪힌 양 소용이 없었다. 그때 헨리가 제 옆자리를 툭툭 치며 오라고 했다.
마리아는 긴장한 채로 서서 그를 바라보다가 눈을 질끈 감고 마른침을 삼켰다. 그러곤 천천히 헨리에게로 한 발짝씩 걸어가 침상에 무릎을 꿇었다. 이내 헨리는 마리아를 제 옆에 눕히곤 그녀의 풀어헤친 금발을 쓰다듬었다.
“마리아가 이렇게 아름다운 금발인 줄 이제야 알았어.”
그만큼 무심했다는 것일 터.
“…….”
그가 말을 할 때마다 독한 약초 향이 났다. 마리아는 눈을 떠 예전과 완전히 바뀌어 버린 헨리의 얼굴을 응시했다.
‘흑화가 심해졌어.’
눈동자와 입술이 자줏빛을 띠고 얼굴의 핏줄이 겉으로 보일 정도였다. 할라드에게 얻은 힘으로 제 몸을 더럽히려는 것일 터. 그녀는 본능적으로 제 배를 감쌌다.
“약속해, 더는 에로를 괴롭히지 않겠다고.”
“황제는 두말하지 않아.”
‘헛소리.’
변덕쟁이 황제라는 사실을 본인만 모르다니.
“나도 라스토니아의 인장이 어디에 있는지 몰라.”
“뭐?”
헨리는 놀랐는지 상반신을 일으켜 세웠다.
“인장을 숨긴 사람은 에로거든.”
이렇게라도 거짓말을 해야 했다. 그래야 헨리가 더는 에로를 학대하거나 죽이려 들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에론인지 에로인지 그 변태 놈은 술탄한테 먹히기 전에, 인장이 어디에 있는지 불고 말 거다.”
“!?”
정말이지, 인간도 아니었다. 뺨에 오소소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저들이 혐오스러웠다. 헨리는 다시 마리아에게 다가와 그녀의 입술을 덮었다.
“읍.”
마리아는 입술을 꼭 다문 채, 헨리의 침입을 막았다. 하지만 그의 혀는 집요하게 그녀의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헨리는 발정한 짐승처럼 마리아의 입술을 탐했다. 그것으로 부족한지, 그녀의 목덜미를 거칠게 애무하며 봉긋한 가슴 쪽으로 움직였다.
반면 마리아는 몸이 딱딱하게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무의미하고 무자비며 무서운 순간이었다. 헨리의 차가운 손이 제 몸 곳곳을 만지는 것이 끔찍했다. 이내 그는 마리아의 치맛자락을 거칠게 걷어 올리곤 그녀의 두 다리 사이에 자리했다. 욕정에 치받쳤는지 더는 참기 어려운 듯 보였다. 마리아는 고개를 돌린 후, 눈을 질끈 감았다.
‘군터, 미안해요.’
마리아의 눈에서 흘러내린 눈물이 하얀 모피를 축축하게 적셨다. 이제 곧 헨리의 성난 욕망이 제 몸을 더럽힐 터. 그 능욕의 시간을 어떻게 버텨야 할지 모르겠다. 자존심이 상해서 울지 않으려 했는데, 어느새 그녀는 가슴까지 들썩이며 울고 있었다. 제 몸 위에서 아등바등하는 헨리를 보니,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충동이 치밀었다.
한데 헨리가 좀 이상했다. 금방이라도 제 몸에 응축된 욕정을 풀 것처럼 덤비더니, 마리아한테서 완전히 등을 지곤 낑낑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때마침 들려오는 헨리의 탄식.
“젠장,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