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에로의 숨이 끊어졌다. 마리아는 에로의 코에 손을 대 보았다.
“왜……? 숨을 안 쉬지?”
조금 전까지 제 이름을 불렀는데. 마리아는 연신 에로를 부르며 몸을 흔들어 보았다. 그런데도 에로는 축 늘어진 채로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마치 죽은 사람처럼. 설마…… 죽은 건가.
“헙!”
갑자기 마리아의 심장을 후비는 공포가 엄습했다. 그녀는 소리 없이 입만 벙끗거리며 에로의 몸 구석구석을 살폈다. 조금이라도 움직임이 있을까 해서. 한데 에로는 말도 하지 않고 몸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마리아는 격렬하게 도리질하며 부정했다. 설마 에로가 제 앞에서 죽으려고. 숨쉬기가 힘드니 잠시 쉬어 가는 것일 터. 그런데 마리아의 몸은 제 의지와 상관없이 떨리고 있었다. 머리로는 에로의 죽음을 인정하지 못하나, 몸뚱어리가 공포에 질려 떨고 있었다. 이러려고 에로를 제 복수에 끌어들인 것이 아닌데. 저로 인해 무고한 생명이 죽다니. 마리아는 에로를 꼭 끌어안았다.
“추워서 그런 거지? 내가 따뜻하게 해 줄게.”
아무리 따져 봐도 에로의 숨이 끊어졌다는 건,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다. 마리아는 에로에게 자신의 온기를 전해 주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다 보면 꽁꽁 얼어 버린 심장도 녹을 테고 막혔던 숨통도 트일 테지.
“에로, 내가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그러니까 제발 숨을 쉬어 줘.”
마리아는 울부짖었다. 제 복수가 결국 소중한 사람의 목숨을 담보로 삼았다는 사실에 자괴감이 밀려왔다. 에로를 잃을 줄 알았더라면 복수 따위 하지 않았을 텐데. 어째서 자신은 이토록 우매한 것일까.
“너를 잃으면 난 어떤 방법으로도 속죄할 수가 없어.”
마리아의 굵은 눈물 줄기가 하염없이 에로의 얼굴을 적셨다. 도대체 자신은 착하디착한 에로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아아악……!”
마리아는 지옥에 떨어진 양 절규했다. 에로는 그저 연기를 하고 싶었을 뿐인데, 자신은 그녀를 살벌한 현실로 던져 버리고 말았다.
“네가 왜 죽어? 죽으려면 내가 죽어야지!”
마리아는 주저앉은 자리에서 괴롭게 몸부림치며 울었다. 그때였다. 마리아의 머리 위로 무언가가 날아다녔다. 뿌연 시야에 보이는 거라곤 날개가 달린 구체였다. 이내 익숙한 향기가 풍기더니 마리아를 붉은 군대가 둥그렇게 감쌌다.
“왕비님!”
붉은 군대는 절도 있게 부복했다. 곧이어 들려오는 발소리. 마리아는 눈물 가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솔샤르.”
희미한 시야에도 솔샤르의 창백해진 얼굴이 고스란히 보였다.
“왕비님.”
“에로가 숨을 쉬……지 않아요.”
“!”
솔샤르는 드롬의 안내를 받아 에바논의 궁전을 기습했다. 약속한 날은 내일이지만, 마리아와 에로를 먼저 구하기 위해서였다. 마력이 강해진 드롬이 안전한 길로만 안내하여 어렵지 않게 마리아와 에로를 찾아냈건만, 메아리처럼 들리는 한 여자의 울음소리에 등줄기가 서늘했다. 그건 분명 마리아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순간 가슴이 선뜩하며 무언가가 크게 잘못되었음을 예감했다.
붉은 전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데도 자신은 발에 철근을 매단 양 무거웠다. 왠지 제 눈으로 확인해선 안 될 것만 같았다. 그렇게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는데 비탄에 젖은 마리아의 울음이 공포로 다가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의 품에 안겨 잠든, 아니 죽었을지도 모르는 에로를 보게 되었다.
‘에로, 내가 왔다. 어서 일어나.’
극도의 긴장감에 마른침을 삼키며 두 사람에게로 다가간 순간, 절망으로 눈앞이 아득했다. 솔샤르는 오열하는 마리아를 보며 한동안 넋이 나간 채 서 있었다.
‘그럴 리 없어. 에로가 내게 말도 없이 죽을 리가 없지.’
솔샤르는 거세게 도리질하며 허공을 헤매는 불안한 이성을 붙잡으려 애썼다. 후- 그는 깊은숨을 내쉬곤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에로를 업어라.”
솔샤르의 명령에 전사들은 마리아의 품에서 에로를 데려가 등에 업었다.
“왕비님, 시간이 없습니다.”
그 짧은 말 한마디를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던지. 그러나 제 임무를 잊어선 안 된다. 어떤 슬픔과 절망이 자신을 기다려도 당장 해야 할 일이 우선이었다. 솔샤르는 마리아를 일으켜 세웠다. 에로를 향한 애통함은 잠시 접어 두어야지.
“여기서 빠져나가야 합니다.”
“네……? 네.”
그제야 마리아도 조금은 상황 파악을 했는지, 아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저 대답만 하는 인형처럼 솔샤르의 손에 이끌려 걷다가 서기를 반복했다. 솔샤르는 드롬이 안내하는 길을 따라 빠르게 걸었다. 물론 배가 무거운 마리아를 부축한 터라, 제 원래 걸음보다 느렸다. 그때 창문 밖으로 동이 트고 있었다. 그렇게 무리 없이 기나긴 통로를 지나 완전히 빠져나왔을 무렵, 앞서 길을 안내하던 드롬이 화염에 휩싸이더니 파사삭! 타 버리고 말았다.
“!?”
솔샤르는 재빨리 마리아를 제 뒤로 보냈다.
“비겁하게 남의 아내를 몰래 훔쳐 가는 건가?”
드롬을 한 방에 불태운 사람은 헨리였다. 솔샤르는 심하게 흑화된 헨리를 보곤 몸을 움찔거렸다. 자신이 전에 알던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마리아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저와 침전에서 있을 때보다 더 강해졌다.
“너희는 왕비님을 모시고 퇴각하라!”
솔샤르는 붉은 전사들에게 명령한 뒤, 자신의 주 무기인 창을 꺼내 들었다. 솔샤르는 제 군대가 마리아를 데리고 멀찌감치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 몸과 마음을 다잡았다.
“이봐, 군터 그놈을 불러와. 너는 짐의 상대가 못 돼.”
헨리의 등 뒤로 검은 기운이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헨리는 비열하게 웃으며 솔샤르를 향해 철로 만든 채찍을 휘둘렀다. 촤르륵- 공기를 할퀴듯 날아간 채찍이 솔샤르의 창을 단번에 휘감았다.
“윽.”
솔샤르와 헨리의 힘겨루기가 시작되었다. 한데 솔샤르는 헨리의 힘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인간의 힘이 아니다.’
심지어 헨리는 채찍을 한 손을 잡고 있었다. 한 손으로 솔샤르와 힘 대결을 하며 아주 여유롭게 웃었다. 반면 솔샤르는 그에게 끌려가지 않기 위해 있는 힘을 다해야 했다.
“애송이 황제, 날 얕보지 말라고. 이래 봬도 평생 전장을 누빈 몸이거든.”
솔샤르는 단숨에 헨리의 채찍을 말더니 힘껏 끌어당겼다. 힘만으로 싸움에서 이기려 하는 건 큰 착각. 상대의 힘을 적절히 이용할 줄 아는 것도 능력이었다. 하지만 헨리는 분명 버거운 상대인 건 맞았다.
“시쳇더미에서 뒹굴던 천한 놈!”
어느새 헨리는 허공을 날아와 솔샤르의 목을 거머쥐었다.
“헉!”
그까짓 채찍이 없다고 질 줄 알았나. 현재의 자신은 그 누구도 대적할 수 있을 만큼 강한 것을. 헨리의 검은 손이 솔샤르의 숨통을 거세게 옭아맸다. 팡! 솔샤르의 창이 헨리의 명치를 치며 두 사람은 겨우 떨어졌다.
한편 마리아는 전사들을 따라 궁을 빠져나가기 위해 바삐 움직였다. 그런 중에도 전사의 등에 업힌 에로한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네가 그토록 그리워하던 솔샤르가 왔는데.’
가슴이 찢어질 듯이 아팠다. 에로가 솔샤르의 품에서 끝을 맞이했다면 아쉬움이 덜 남았을 터. 결국 두 사람은 이별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끝나 버렸다. 그런데 마리아는 아까부터 이상함을 느꼈다.
“멈춰라!”
왠지 같은 통로에서 헤매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맞은편에서 검은 소용돌이가 몰아쳤다.
“이 발칙한 놈들!”
할라드의 목소리였다. 그는 전사들을 갈기갈기 찢어 버렸다. 용맹하다고 자부하던 붉은 군대도 흑마법 앞에선 속수무책이었다. 순간이었으나, 마리아는 불길한 예감에 휩싸였다. 할라드가 헨리를 강하게 만들어서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는 느낌이랄까. 아마 군터와도 싸우게 만들 터. 그렇다면 할라드가 진짜 죽이고 싶어 하는 사람은 누구지?
“으아아악!”
“안 돼!”
마리아는 비명을 지르며 허공을 부유하는 에로를 향해 뛰었다. 하지만 할라드의 검은 소용돌이는 붉은 군대를 단번에 제압하곤 마리아와 에로를 휘감아 어딘가로 데려갔다.
* * *
콰쾅! 솔샤르는 대리석 기둥에 거세게 부딪힌 뒤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헉.”
솔샤르는 검붉은 피를 연신 토해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순간 제이미가 위급할 때 쓰라고 했던 검이 떠올랐다. 하지만 왠지 쓰고 싶지 않았다.
“에로…….”
그 검을 써야겠다는 위급함보다 죽은 에로의 모습이 눈앞을 어지럽혔다. 어차피 에로 없이 살아가기는 힘들 터.
“뭐야? 벌써 항복이야? 이건 너무 시시한데.”
헨리는 피를 토하는 솔샤르를 가차 없이 걷어차며 낄낄거렸다. 아무런 저항도 못 하고 때리면 때리는 대로 맞는 것을 보니, 이젠 끝을 내야 할 때인 듯했다.
“너 같은 건, 짐의 상대가 못 된다고 했지?”
그제야 헨리는 할라드가 말한 쾌감에 대해 알 것 같았다. 본능적인 욕구보다 더 강렬한 희열을 주는 건, 어떤 상대도 제압할 수 있는 강함이라는 것을.
“천하디천한 놈아! 짐의 손에 생을 마감할 수 있으니, 영광으로 여겨라.”
헨리는 사악한 기운에 먹혀 본래의 모습이 사라진 지 오래였다. 그는 한 손에 흑마법의 기운을 모으곤 그대로 솔샤르의 심장으로 향했다. 단번에 놈의 가슴을 뚫고 들어가 붉은 심장을 꺼내려던 찰나, 퍽! 거센 발길질이 헨리를 허공으로 날려 버렸다.
“윽!”
군터는 단번에 달려가 자신의 검으로 헨리의 목을 겨눴다.
“악마에게 영혼을 판 추악한 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