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화
군터가 헨리를 향해 검을 내리칠 때마다 강한 검기가 진동을 일으켰다.
“이제 좀 싸울 만하네.”
헨리는 검은 입술을 비틀며 비열하게 웃었다. 역시 솔샤르와는 급이 다른 힘이었다. 하지만 저도 만만찮게 강해진 상황. 더는 군터 플레이슬리를 두려워할 이유는 없었다.
“근데 너무 늦게 왔어. 마리아 배 속의 아이는 이미 짐의 아이로 바뀌었거든!”
“!?”
헨리의 도발에 군터의 관자놀이가 불끈거렸다. 당장 때려눕혀도 속이 시원찮을 정도로 분노했지만, 지금은 놈의 농간에 휘말려선 안 됐다.
“주둥이로 싸울 텐가?”
“주둥이? 감히 짐에게 그런 막말을!”
헨리는 군터를 향해 마구잡이로 철 채찍을 휘둘렀다. 채찍이 헛나가 벽을 칠 때마다 요란한 굉음이 울리며 부서졌다.
‘왜 흥분하지 않는 거지? 사내새끼라면 제 여자를 건드렸다고 하면 미쳐 날뛰어야 정상이잖아?’
헨리는 군터의 침착함과 여유가 마치 자신을 조롱하는 것 같아서 길길이 날뛰었다. 여전히 자신을 약골 취급 하는 것에 발끈하여 정신없이 채찍을 휘둘렀다. 하지만 군터의 빠른 검이 헨리의 손목을 잘랐다.
“윽!”
헨리는 채찍과 잘려 나간 제 손목을 보곤 말문이 막혔다. 어둠에 물든 두 눈이 커다래지며 현실을 외면하려 했다.
“짐의 손목이 잘렸어.”
잘린 손목에서 피가 쏟아지는데도 헨리는 믿기지 않는 양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그런데 아주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어째서 손목이 잘렸는데도 아프지 않은 것일까.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헨리는 되레 피 흘리는 손목을 보며 광기에 휩싸인 양 웃었다.
“!?”
‘고통을 못 느끼는군.’
군터는 헨리의 반응을 보고 단박에 간파했다. 흑마법에 취해서 고통도 못 느끼는 살인 무기, 할라드에게 놀아나는 줄도 모르는 무지한 인간. 하지만 자신이 전능하다고 착각하겠지? 그리고 헨리는 겁 없이 달려들 것이다.
“이얏!”
그의 예상대로 헨리는 군터를 향해 돌진했다. 헨리가 움직일 때마다 잘린 손목에서 붉은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팡! 헨리는 강한 기운을 모아 군터를 밀어냈다.
“큭!”
폭풍처럼 몰아치는 마력에 군터는 공처럼 벽에 튕겨 멀리 나가떨어졌다. 헨리는 쓰러진 군터를 무자비하게 폭행했다.
“제 주제도 모르고 남의 것을 탐하는 거지 같은 놈. 땅에 떨어진 썩은 고깃덩어리나 먹고살 것이지, 감히 짐의 아내를 탐내? 너만 아니었다면 마리아가 짐을 외면하는 일 따윈 없었어.”
“한심한 새끼!”
스삭! 군터의 검이 헨리의 가슴을 스치고 지났다. 얼마 뒤, 헨리의 가슴에서 피가 주르륵 흘렀다. 한데 그의 피 색깔은 이미 검게 바뀐 뒤였다. 영혼까지 완전히 오염된 상태.
“멈춰! 이 얼빠진 새끼야!”
군터는 헨리의 폭주를 말리고 싶었다. 제힘으로 싸우는 게 아닌, 할라드의 마력에 조종당하는 것인데도 모르고 있으니까. 헨리는 할라드의 손에 쥐어진 무기에 불과했다. 부서지고 망가지면 가차 없이 버려질 무기.
“아, 네가 로랑도 죽였지, 아마!”
헨리는 불현듯 로랑이 떠오르자, 심장이 불에 타는 양 뜨거워졌다. 그러고 보니 군터는 제 여자들을 빼앗거나 죽였다.
“로랑도 마리아도 심지어 엄마까지……!”
검은 연기가 헨리의 몸을 서서히 휘감는 광경에 군터는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헨리는 자신이 왜 싸우는지조차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안 좋았던 감정을 마력으로 키워 싸울 명분을 만드는 것일 뿐. 하지만 그를 말리기엔 이미 늦어 버렸다.
“ЀЖѨђӴѿ!”
자아를 잃은 헨리는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포효하며 검붉은 화염에 휩싸였다. 이내 그의 모습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의 얼굴이 하얀 유리 조각으로 뒤덮이더니 머리 위로 칼날 같은 뿔이 높이 솟아났다. 두두둑! 그의 몸 안에서도 뾰족한 유리 조각이 튀어나와 온 살갗을 덮었다.
쿠쿵! 점점 거대해지는 육체. 마치 깨진 유리로 만든 짐승 같았다. 그가 포효할 때마다 커다란 입에서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군터와 솔샤르를 향해 쏟아졌다. 과연 저 마물에게도 붉은 심장이 있을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것마저도 단단한 유리로 만들어졌다면 깨부수기 쉽지 않을 터.
“ЙѸӚѰѮҐ҂Ԓ!”
완전하게 마물로 변한 헨리는 알 수 없는 주문을 외웠고 그때마다 그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군터는 제 검을 두 손으로 바짝 붙잡았다. 인간이든 마물이든 심장은 있을 것이다. 설사 마물의 심장이 단단한 수정체라고 해도 반드시 부숴 놔야지.
‘단번에 심장을 깨뜨린다.’
그러나 마물의 심장이 어디에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인간처럼 왼쪽이면 좋으련만, 마물은 제각각이라서 자칫 실수라도 하면 제 목숨이 위태로웠다. 마침내 마물이 군터에게 달려들었고 그는 마물과 하나로 엉켜 바닥을 굴렀다.
마물이 군터의 어깨를 강하게 물곤 놔주지 않자, 그는 검으로 마물의 몸을 사정없이 찔렀지만 튕겨 나오기 일쑤였다.
‘젠장! 심장을 못 찾겠어!’
퍽- 마물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두꺼운 갑주를 뚫고 들어와 군터의 살에 박혔다.
“아악!”
드디어 군터의 몸에서도 피가 솟구치기 시작했다. 마물의 발톱과 이빨이 그의 갑주를 무참히 찢어발기곤 생살을 물어뜯었다. 카펫은 군터가 흘린 검붉은 피로 물들어 갔고 마물은 커다란 아가리를 벌려 군터의 머리를 삼키려 했다. 그때 군터는 마물의 몸을 빼곡하게 감싼 유리 조각 사이의 틈을 보았다. 군터는 그 틈으로 검을 밀어 넣었다.
“ҲѢшѠҨӒӸ!”
마물이 몸부림치는 사이 또 다른 마검이 뒤에서 꽂혔다. 아무리 대단한 마물일지라도 빈틈은 잊기 마련. 솔샤르도 놈의 빈틈을 놓치지 않았다.
“솔샤르.”
“대왕!”
솔샤르의 마검이 마물의 심장을 찔렀는지, 군터의 몸에서 떨어져 나갔다. 파사삭- 마물의 몸에서 탄내가 진동하며 하얀 연기가 피어올랐다. 이내 마물은 서서히 헨리의 모습으로 바뀌고 있었다.
‘드디어 해치운 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쉴 때쯤 맞은편 복도에서 검은 해일이 밀어닥치며 헨리의 몸뚱어리를 삼켜 버렸다. 군터는 솔샤르를 부축하곤 재빨리 일어섰다.
“큭큭큭! 44번, 45번 오랜만이구나.”
“할라드!”
“내가 이날을 얼마나 기다린 줄 아느냐? 나를 7년이나 잠들게 한 네놈들을 어떻게 죽여야 할지 고민하고 또 했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았나?”
군터가 할라드를 비난했다. 원래도 악마 같은 인간이었건만, 그것으로는 부족했던 모양인지 진짜 악마가 되어 나타나다니.
“44번, 네가 그렇게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다.”
그때였다. 집채만 한 검은 늑대가 입에 쇠사슬을 문 채 나타났다. 군터와 솔샤르의 눈에 쇠사슬에 묶인 두 사람이 보였다. 정신을 잃은 마리아와 숨이 끊어진 에로였다. 검은 늑대는 마리아와 에로를 사냥한 먹잇감처럼 사슬에 묶어 끌고 다녔다. 순간 심장이 차갑게 어는 느낌이었다. 머리카락이 곤두설 정도로 차가운 공기가 군터의 몸을 휘감았다.
“너 같은 인간이 왜 이 세상에 태어났을까?”
군터는 갑자기 의문이 생겼다. 어째서 신은 저런 악마를 만들어 냈는지 모르겠다.
“네놈들의 소중한 사람들은 곧 내 늑대 밥이 될 게다. 뼈까지 오독오독 씹어 먹는 광경을 반드시 보여 주마.”
“개새끼!”
솔샤르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할라드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때였다. 할라드는 헨리의 모습으로 바뀌어 있었다.
“짐이 죽은 줄 알았나?”
퍽! 헨리는 솔샤르를 저 멀리 날려 버렸다.
“군터 플레이슬리, 똑똑히 지켜봐라. 짐이 갖지 못하는 건, 너도 못 가져.”
헨리는 바람처럼 날아와 군터의 목을 거머쥐었다. 오래전 자신이 군터에게 당했던 것처럼 그의 목을 잡은 채 허공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으윽.”
“어때?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힘이란 게 느껴지나?”
군터는 헨리의 손을 꽉 붙든 채 있는 힘을 다해 저항했다. 그때 헨리와 할라드의 얼굴이 교차하며 군터를 교란했다. 군터는 부츠에 꽂아 놓은 단검을 꺼내 헨리의 머리를 찔렀다.
“크아악!”
퍽- 군터는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지만, 그는 바로 일어나 헨리를 향해 다시 검을 겨눴다. 이젠 저들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상관없다. 이미 악마라는 게 밝혀졌으니까.
“감히!”
헨리는 제 머리에 단검이 꽂혔는데도 빼지 않았다. 그대로 군터를 검은 연기로 옭아매더니 강하게 몸을 조여 왔다.
“으악!”
이국적인 궁전이 검은 해일에 잠식당하고 섬광이 튀었다. 콰쾅- 기둥이 무너지며 천장에 금이 갔다.
“44번 네놈이 그랬던 것처럼 너의 척추뼈를 부러뜨려 주마.”
어느새 악마는 할라드로 바뀌어 있었다. 빠직! 할라드는 군터의 허리를 검은 연기로 조이곤 반으로 꺾어 놓았다.
“헉!”
두둑-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군터의 귀에 선명하게 들렸다. 한동안 숨을 쉴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대로 승복하기엔 억울했다. 군터는 기합을 넣곤 두 팔로 할라드의 목을 감쌌다.
“할라드 그리고 헨리, 같이 지옥으로 가자.”
“놔! 이 새끼야!”
악마들은 모른다. 죽음을 각오한 인간은 흑마법이 없어도 충분히 강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악으로부터 제 소중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선 못 할 일이 없었다. 군터는 할라드의 목을 부러뜨릴 듯이 억세게 잡았다. 그때였다. 솔샤르도 달려와 할라드를 죽기 살기로 옭아맸다.
때마침 드롬 떼가 날아와 검은 늑대를 향해 붉은 빛을 쏘아 죽였다. 늑대는 강아지처럼 낑낑거리다 소멸했다. 그리고 드롬들은 마리아와 에로를 묶은 사슬에 결계를 채우곤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져 버렸다. 아마도 제이미가 조종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을 터.
‘기특한 녀석.’
이대로 악마 놈들과 죽어도 후회는 없었다. 제 소중한 사람들을 지켰으니. 한편 할라드는 좀 더 흑화하여 마력을 쏟아 냈지만, 좀처럼 군터와 솔샤르를 떼어 놓지 못했다. 무기도 없고 뼈도 부러진 인간들이 어떻게 자신의 힘에 저항하는지 의문이었다. 그들한테서 아주 강한 힘이 뿜어져 나왔다.
쿠쿠쿵- 사방이 굉음으로 휩싸이더니 아름다운 에바논 궁전이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솔샤르, 후회 없는 인생이었다.”
“저도 그렇습니다. 대왕.”
“이 악마들을 죽일 수 있다면 내 목숨, 전혀 아깝지 않다.”
“제 목숨도 아주 값지게 쓰고 갑니다.”
피투성이가 된 두 남자는 막바지 힘을 다해 할라드를 옭아맸다. 그리고 할라드는 여러 형태로 겉모습을 바꿔 가며 군터와 솔샤르한테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썼다. 그때 할라드는 괴상한 주문을 외우며 몸집을 더 키웠다.
“윽.”
군터는 할라드가 뿜어내는 강한 힘에 더는 버티기가 힘이 들었다. 몸이 점점 뒤로 밀리며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이렇게 죽는 건가.’
죽음을 직감한 순간, 하늘에서 서광이 비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