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폐황후 마리아-109화 (109/120)

109화

무너진 천장으로 서광이 비치더니, 거대한 빛이 할라드의 검은 연기를 짓눌렀다. 이내 하얀 망토를 휘날리며 나타난 사람들. 빛이 서린 검을 든 기사들은 절도 있는 검술로 사방으로 뻗치는 검은 마력을 단칼에 잘라 냈다.

‘성전 기사단.’

군터는 그들이 누군지 단박에 알아차렸다.

어느새 그들을 군터와 솔샤르를 할라드에게서 떼어 놓곤 악의 소용돌이를 둥그렇게 감쌌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백발의 노인, 아니 교황 리베리오가 서 있었다. 평소에는 옆집 노인처럼 인자했건만, 성스러운 빛을 뿜어내는 리베리오는 전혀 다른 존재였다. 마치 천상에서 내려온 천사 같았다. 그는 강한 신성력으로 단번에 할라드의 흑화된 힘을 제압하기 시작했다.

‘앤드류가 해냈군.’

군터는 용케 리베리오를 설득한 앤드류가 떠오르자 입가에 미소가 피어났다.

“사특한 악귀야, 그만 소멸하거라!”

리베리오는 들고 있던 목장(牧杖)으로 할라드의 머리를 관통했다.

“크아아아악! 리베리오! 네놈만큼은 갈기갈기 찢어 죽였어야 했는데……!”

한데 할라드와 헨리의 존재는 이미 소멸했는지 알 수 없는 마귀의 목소리가 들렸다. 더 사악하고 소름 끼치는 메아리였다. 리베리오는 흑화된 인간과 싸우는 게 아니라, 그들을 조종하는 악귀와 대치 중이었다.

군터는 솔샤르와 함께 기다시피 하여 검은 소용돌이에서 빠져나왔다. 더는 인간 대 인간의 싸움이 아니기에 리베리오의 방해물이 되긴 싫었다. 그러나 리베리오의 성스러운 싸움, 아니 악을 응징하는 광경을 지켜봐야겠다.

리베리오의 목장에서 거센 바람이 쏟아져 악귀를 단숨에 옭아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기사단이 악귀를 에워싸며 검을 휘둘러 보지만 쉽사리 놈은 소멸하지 않았다. 그래도 기사단이 퍼부은 맹공격에 악귀는 조금씩 움츠러들었다.

“컥!”

악귀는 단숨에 헨리와 할라드의 사체를 토해 내곤 커다란 폭풍으로 바뀌었다. 검은 폭풍은 궁전을 무자비하게 부수며 리베리오의 하얀 빛을 검게 덮어 버렸다. 곧 사방이 암흑에 뒤덮이며 서늘한 공포가 엄습했다.

쾅! 목장이 바닥을 때리는 소리에 밝은 빛이 빠르게 암흑을 찢었다. 리베리오는 연신 기도하며 악귀와 싸웠고, 어둠과 빛이 팽팽하게 맞섰다. 두 개의 힘이 맞부딪치면서 일어나는 거대한 진동에 땅이 흔들렸다.

“더는 너를 용서할 수가 없구나. 네가 있던 지옥으로 사라져라!”

리베리오는 자신을 향해 해일처럼 밀려오는 악귀를 향해 서슴없이 뛰어들었다.

“교황!”

군터는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아무리 신성력이 높은 교황일지라도 그는 인간이었다. 한데 저런 독기 속으로 몸을 내던지다니, 혹여 그가 죽을 수도 있었다.

콰콰쾅! 온 세상이 파괴되는 양 거대한 굉음이 울리고 선과 악은 서로 얽힌 채 치열하게 싸웠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카만 어둠에 휩싸였다가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밝은 빛이 쏟아지기를 반복하더니, 마침내 악귀는 성스러운 힘에 조각나기 시작했다.

리베리오가 악귀를 소멸한 것이다. 이내 세상을 오염시켰던 마력이 서서히 걷혔다. 그때 군터의 눈에 벌레처럼 몸을 꿈틀대는 할라드가 보였다.

‘살아 있었나?’

죽은 줄 알았건만, 아직도 살아 있다니 놈의 생명력이 이토록 질길 줄이야. 이내 군터의 시선이 옆으로 향했다.

‘헨리는 죽었다.’

군터는 허리뼈가 부러진 탓에 움직일 수가 없자, 솔샤르가 일어섰다.

“제가 처리합니다.”

솔샤르의 몸에서 분노의 화염이 뻗어 나왔다.

“솔샤르.”

“대왕, 저놈이 에로를 죽였습니다.”

“뭐?”

에로가 죽어? 군터는 놀란 나머지, 솔샤르가 떨어진 검을 주워 할라드에게 향하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용……서해 줘! 한 번만 살려 다오!”

솔샤르는 죽지 않기 위해 비굴하게 구는 할라드의 목을 단번에 내리쳤다. 때마침 드롬들이 마리아와 에로를 군터에게로 데려왔다. 그러나 드롬들은 리베리오와 기사들을 보곤 부리나케 도망쳐 버리고 말았다. 군터는 제 몸뚱어리를 질질 끌며 쓰러진 마리아한테로 다가갔다.

“마……리아.”

군터는 마리아의 얼굴에 연신 입 맞추다가 그녀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으……. 응.”

마침내 정신이 돌아온 마리아. 그녀는 고개를 들어 제 앞에 있는 군터를 보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군터.”

한데 군터는 만신창이가 된 상태. 주위를 보니 하얀 군복을 입은 성전 기사단이 있었다. 그리고 저 멀리 비통한 얼굴로 걸어오는 한 남자가 보였다.

“솔샤르.”

“왕비님.”

솔샤르는 눈물이 가득한 얼굴로 마리아를 부르곤, 죽은 에로를 품에 안았다. 그제야 솔샤르는 크게 소리 내 오열했다. 항상 감정을 숨기기 급급했던 남자는 연인의 죽음에 참았던 슬픔이 터졌는지 서럽게 울었다. 그때였다. 악귀를 소멸한 리베리오가 마리아와 군터를 향해 걸어왔다.

“할……아버지!”

“마리아.”

리베리오는 천천히 다가와 마리아와 군터를 살며시 안아 주었다. 그러곤 군터를 향해 혀를 찼다.

“쯧쯧, 이 일을 어쩌누? 남자는 허리가 생명인데, 똑 부러졌으니 말이다.”

막 감동의 도가니에 빠져들 뻔했는데, 리베리오의 놀림에 마리아는 웃음을 터트렸고 군터는 안색이 창백해졌다.

“휴! 그래도 악귀를 상대로 애썼으니, 상을 내려 줘야겠지.”

리베리오의 손이 군터의 머리채를 한 움큼 잡았다.

“이 노인네가!”

군터가 버럭 화를 내려던 찰나, 리베리오는 기도를 하기 시작했다. 이내 그의 손에서 밝은 빛이 쏟아지더니 상처로 엉망이 된 군터의 몸을 휘감았다.

‘뭐지?’

뼈가 부러지고 살점이 찢어져 고통스러웠던 몸뚱어리가 멀쩡해졌다. 물론 부러진 허리도 움직일 수 있었으며 몸에 난 상처도 씻은 듯이 나았다.

“이 노인네가 그다음은 무엇이냐?”

리베리오가 군터를 향해 의뭉스레 물었다.

“고맙소, 교황.”

군터는 숙연해진 얼굴로 리베리오를 바라보았다. 한데 군터는 리베리오에게 할 말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제 청이 받아들여질지는 미지수였다.

“교황, 죽은 자를 살려 낼 순 없는 거요?”

군터의 말에 마리아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신성력으로 군터의 상처도 말끔하게 치유해 주었으니, 혹여 에로도 되살려 주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솟구쳤다. 그러자 리베리오의 주름진 얼굴이 저만치에서 오열하는 솔샤르에게로 향했다.

“솔샤르가 참 슬프겠구나.”

“할아버지, 도와주시면 안 돼요?”

마리아는 태어나 처음으로 리베리오에게 부탁이란 것을 했다. 마리아는 어릴 때부터 부모로부터 세뇌당하듯이 들어 온 말이 있었다. 리베리오가 같은 가문 사람이라 해도 공인이기에 사적인 부탁 같은 건 절대 해선 안 된다고 말이다. 해서 황궁 생활 중에 어려움이 닥쳐도 절대 리베리오에게 부탁 한 번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 순간만큼은 도덕적 신념이나 염치 따위는 던져 버렸다. 오로지 그에게 에로를 살려 달라고 매달렸다.

“나는 신이 아니다. 신의 종이지. 그런데 어찌 죽은 자를 되살릴 수가 있겠느냐?”

그의 대답에 하나 남은 희망이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마리아는 또다시 울었다.

“나 때문이에요. 내가 복수만 꿈꾸지 않았더라면 에로가 죽진 않았을 텐데. 내가 소중한 사람을 희생시켰어요.”

마리아는 그 자리에 엎드려선 아이처럼 엉엉 울었다. 리베리오는 애틋한 얼굴로 마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네가 아무리 복수를 다른 이름으로 불러도 본질은 달라지지 않는 거란다.”

“그렇다고 죄를 저지른 자들을 그냥 두라는 소리인 거요?”

리베리오의 말에 군터가 발끈했다. 마리아와 저는 리베리오처럼 성인이 아니다. 희로애락을 느끼는 평범한 인간일 뿐이지. 제 인생을 망가뜨린 사람들을 어떻게 용서할 수 있을까. 그건 애초 말이 되지 않았다.

“군터, 그래서 마리아가 만족했느냐? 이렇게 소중한 사람을 잃어 울고 있지 않느냐?”

“그건……!”

“굳이 손을 더럽혀 가며 복수하지 않아도 죄악을 저지른 자들은 마땅한 벌을 받게 되어 있느니.”

하! 정말 그럴까. 세상에는 죄를 짓고도 버젓이 잘 먹고 잘 사는 사람이 수없이 많은 것을. 군터는 연신 도리질하며 리베리오의 말을 부정했다. 결국 그 점이 그와 자신의 차이겠지만.

“에구구, 삭신이야. 늙으면 이렇게 안 아픈 데가 없다니까.”

리베리오는 목장을 짚은 채 어렵사리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악귀와 맞서서 허공을 날며 싸우던 교황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늙은 스톤처럼 투덜대는 노인만 남았다. 그는 느린 걸음으로 솔샤르와 에로에게로 다가갔다.

“그만 슬퍼하거라, 솔샤르.”

리베리오는 솔샤르의 어깨를 토닥이며 그를 위로했다. 더불어 솔샤르의 상처도 치유해 주었다.

“교황님, 제가 욕심이 과한 겁니까?”

“과하긴, 너만큼 절제하며 사는 사람이 어디에 있다고. 군터처럼 성질도 고약하지 않고.”

“그런데 왜 저는 항상 잃기만 하는 겁니까? 유일하게 좋아했던 사람이었습니다.”

솔샤르는 리베리오를 보며 울부짖었다.

“유일하다는 말은 하지 말아라, 훗날 너를 아껴 주는 사람이 또 나타날 터이니.”

그의 말에 솔샤르는 격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에로만큼 좋아할 수 있는 사람이 또 나타나지 않을 것이다. 그건 확신했다. 에로가 죽는 순간, 제 마음도 함께 죽어 버렸으니까. 솔샤르는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비통함에 젖었다. 반면 리베리오는 솔샤르의 품에 축 늘어진 에로를 불쌍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서서히 리베리오의 눈빛이 변했다.

“허 참, 아주 신통한 자가 궁전에 있구나.”

그는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아직 죽지 않았다.”

“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솔샤르는 눈물에 흠뻑 젖은 얼굴로 리베리오에게 물었다.

“좀 애매하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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