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리베리오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에로를 향해 손을 뻗었다. 곧 그의 손에서 치유의 빛이 쏟아졌다. 오열하던 솔샤르도, 군터와 마리아도……. 모두 리베리오의 행동에 주목했다. 분명 죽은 자는 되살릴 수 없다고 했다. 단언컨대 리베리오는 인간의 운명을 함부로 거스르게 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 에로에게 치유의 빛을 비춰 주는 것일까. 그렇게 10여 분이 흘렀을까. 빛은 멈췄으나 달라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잠시 흥분했던 마리아는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금기된 행동이나 일말의 희망을 품었건만, 에로는 되살아나지 않았다. 그녀는 군터의 가슴에 머리를 댄 채 흐느꼈다. 그때였다. 군터의 거친 심장박동 소리가 마리아의 귀를 때렸다.
“마리아, 저길 봐라.”
“네?”
마리아는 그의 말에 재빨리 고개를 들곤 군터의 시선을 쫓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몸을 서서히 움직이는 에로가 있었다. 분명히 에로가 고개를 양옆으로 움직였다.
“세상에!”
마리아는 놀라서 허둥지둥 에로를 향해 걷다가 다리의 힘이 풀려서 거의 기어가다시피 했다. 그러나 정작 좋아해도 시원찮을 솔샤르는 넋이 반쯤 나간 채로 부산스레 움직이는 에로만 바라보았다. 그러다 에로와 두 눈이 마주쳤다.
“부……관님, 아니 솔샤르.”
“!?”
솔샤르는 대답도 못 하고 몸을 떨었다. 그는 어안이 벙벙해진 얼굴로 리베리오를 보았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그의 해명이 필요했다.
“할아버지, 살릴 수 없다고 하셨잖아요?”
마리아가 득달같이 달려가 물어보자, 리베리오는 껄껄 웃기만 했다.
“죽은 자는 되살릴 수가 없으나, 산 사람이니 치유해 줄 순 있지.”
“네? 산 사람이요? 그럼, 에로가 죽지 않았단 말씀이세요?”
“그래. 이 궁전에 의술이 뛰어난 치유사가 있는 모양이구나.”
리베리오는 목장을 짚고 기사단 쪽으로 다가가 명령을 내렸다.
“궁에 있는 치유사를 모두 데려오시게.”
“예, 교황님.”
그의 명령에 몇 명의 기사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솔샤르는 여전히 믿기지 않는지 멀뚱멀뚱 에로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자 에로가 아무렇지도 않게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로!”
되레 마리아가 뛰어가 에로를 부둥켜안았다.
“왕비님.”
마리아는 에로의 체온과 심장박동을 느꼈다. 필시 환영은 아닐까 의심했는데, 에로는 실제로 살아 있었다. 게다가 몸은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해졌다. 그녀는 에로의 머리부터 세세하게 살피며 확인했다.
“괜찮아? 숨은 쉴 수 있어? 아픈 데는 없고? 나 보여? 내 목소리 들려? 이게 몇 개야?”
“마리아, 그만하지.”
“놔 봐요. 에로한테 물어볼 게 아주 많단 말이야!”
군터가 마리아를 번쩍 안아서 제게로 데려오자, 그녀는 강하게 저항했다.
“진정해, 지금은 마리아가 나설 때가 아니야.”
“응?”
마리아는 금세 군터의 말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게 되었다. 감동에 젖은 솔샤르와 에로가 서로한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광경. 그 사이에 주책없이 자신이 끼어든 거였다. 그러니 솔샤르와 에로가 둘만의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잠시 빠져 줘야 했다.
군터는 솔샤르를 잘 알고 있다. 그는 분명 소중한 것을 잃고 좌절해야 한다고 여기고 있었을 터. 언제나 불행은 저와 솔샤르의 동반자였으니까. 그런데 이런 기적이 일어났으니, 믿기 어렵기도 하겠지.
“에로.”
“부관님.”
솔샤르는 떨리는 손으로 에로의 얼굴을 매만졌다. 정말 되살아났는지 확인하고 싶었다. 마침 솔샤르의 손에 전해지는 온기에 그는 덥석 에로를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안은 채로 오열했다.
* * *
리베리오는 에바논의 치유사들을 칭찬했다. 딱히 누구라고 딱 짚을 수 없을 정도로 모든 치유사가 합심하여 병자들을 치료했다. 무엇보다 그들은 치유사로서 인간의 생명을 등한시하지 않았으니 마땅히 칭찬받아야 했다.
“술탄의 채찍에 죽어 나가는 사람이 많아서 일부러 혼수상태 약을 먹였습니다.”
“그래야 더는 맞지 않을 테니까요.”
“그렇게 사흘 후면 숨이 돌아오며 되살아나거든요.”
“우리가 무고한 사람들을 살릴 수 있는 일은 이것밖에 없었습니다요.”
그들의 말에 마리아는 에로를 성심껏 치료해 주던 치유사들이 떠올랐다. 당시에는 에바논의 궁전에는 할라드처럼 악인들만 있는 줄 알았다. 한데 병자를 대하는 치유사들의 진심 어린 태도에 놀랐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들이 저도 모르게 에로한테 그런 약을 먹인 줄은 몰랐다. 하긴 그 사실이 밝혀지면 자신들의 목숨도 부지하지 못할 테니까, 비밀에 부친 거겠지.
군터는 그들에게 헬랜드로 가자고 제안했다. 그러나 에바논의 치유사들은 이곳에 남아 술탄의 핍박을 받은 사람들을 도와야 한다며 거절했다. 감옥에는 아직도 치료를 받아야 할 병자들이 아주 많다는 말도 해 주었다.
드디어 리베리오와 헤어질 시간이 되었다.
“마리아, 더는 억울해하며 살지 말아라.”
“네, 할아버지.”
“네가 비로소 모든 것을 내려놨을 때, 소중한 것을 다시 얻게 될 수 있단다.”
“소중한 것이요?”
자신이 다시 얻어야 하는 소중한 것. 그건 가족이었다. 부모님과 오빠들……. 가문의 혈족들과 가신들. 한데 그들을 다시 보기 위해선 마음에 원망이나 분노가 없어야 한다니.
“진정한 왕비가 되기 위해선 가시 돋친 적도 품을 줄 알아야 한다.”
“!?”
“네 몸에 피가 철철 나도 한 나라를 다스리는 왕비는 희생을 두려워해선 안 되는 거란다.”
“명심할게요.”
마리아는 허탈하게 웃었다. 제 마음엔 자신을 아프게 했던 사람들을 향한 미움이 존재하지 않는 줄 알았다. 한데 로랑과 낸시 그리고 모니카의 처참한 최후를 보고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더 아프게 고통스럽게 해 주지 못해서 아쉬울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겉으론 자신은 복수하려는 게 아니라 정의를 바로 세우려 함이라 포장하기에 급급했다.
그러나 리베리오는 진심이 빠진 용서였음을 단번에 알아본 것이다. 마리아는 에바논을 떠나기 전, 리베리오와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하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있기에 헬랜드가 아닌, 라스토니아 황궁으로 향했다. 한데 라스토니아로 향하는 내내 군터의 말수가 확연히 줄어든 게 이상했다.
“군터, 무슨 일 있어요?”
“아니.”
반대로 솔샤르와 함께 말을 타고 가는 에로는 소리 내 웃느라 바빴다.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처럼. 그런데 이 상황에선 저들처럼 군터도 즐거워하는 것이 맞지 않나? 마리아는 군터의 굳은 표정이 내내 마음에 걸렸다. 아무래도 가시가 돋친 적도 품어야 한다는 리베리오의 조언을 실행하기란 쉽지 않을 듯했다. 적이 아닌 제 남편의 굳은 얼굴도 이해 못 하는 것을.
군터는 간사한 제 감정에 혐오감을 느꼈다. 분명 마리아가 무사히 살아 있으니, 기뻐해야 마땅했다. 그런데 위기를 모면하고 나니 헨리가 했던 말이 연신 귓가에 맴돌았다.
[근데 너무 늦게 왔어. 마리아 배 속의 아이는 이미 짐의 아이로 바뀌었거든!]
진짜 바뀌었을까. 마리아는 에로를 살리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한 것일 뿐. 그녀의 진심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의 배 속에 있는 아이가 제 아이가 아니란 사실에 절망감을 느끼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군터, 너는 정말 대왕 자격이 없는 놈이다. 치졸하게 아내나 의심하고.’
결국 마리아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가장 중요한 것인데. 그것을 자꾸만 까먹고 헛된 사념에 사로잡혀 스스로를 고통으로 몰아넣었다. 그때 마리아가 군터의 어깨를 툭툭 쳤다.
“말 세워 봐요. 우리 얘기 좀 해요.”
마리아의 얼굴이 매우 진지했다. 하긴 자신이 너무 티를 내긴 했지. 입을 꾹 다문 채 말없이 말만 몰았으니, 그녀가 의심 안 할 리가 있나. 군터는 마리아의 요구대로 말을 세운 뒤, 그녀를 내려 주었다. 두 사람은 바람이 부는 언덕에 서서 머나먼 지평선을 바라보았다.
“군터가 염려하는 일은 없었어요.”
마리아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당장 군터에게 가장 필요한 말을 해 주자 싶었기 때문이다. 군터가 왜 저렇게 말이 없는지 고민하던 끝에 에바논 궁전에서 자신을 보호한 비페르가 떠올랐다. 그렇다면 군터는 저와 에로의 상황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결론이 나온다. 아니, 몰랐어도 깃털처럼 가벼운 입을 가진 헨리가 군터에게 말을 안 했을 리 없지. 사실이 아니어도 군터의 성질을 돋우기 위해 거짓을 말했을 터.
“마리아.”
군터는 심히 당황하여 그녀의 이름만 불렀다.
“군터, 어쩔 수 없었어요. 에로는 매일 채찍을 맞으며 죽어 가고 있었으니까요.”
“안다. 그만해.”
너무 잘 알아서 그녀를 이해 못 하는 저 자신을 경멸했다. 그 채찍질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누구보다 잘 알면서.
“시간을 되돌려서 에로를 살릴 방법이 그거 하나라면, 저는 같은 선택을 할 거예요.”
“…….”
마리아의 목소리가 점점 격앙됐다. 당시의 치욕이 되살아나 너무 고통스럽기 때문이다. 임신한 몸으로 남편이 아닌 다른 남자와 잠자리를 해야 한다는 건, 평생 후회하며 스스로를 고통스럽게 할 사건이니까.
“그런데 갑자기 얻은 대단한 능력에는 대가가 따르는 법인가 봐요.”
“대가?”
마리아는 점점 알 수 없는 말만 했고 군터는 머릿속이 복잡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