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화
“헨리는 흑마법으로 강해진 대신 남자의 기능을 잃었거든요.”
“!?”
군터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되레 인간이 가진 본능과 욕구가 덩달아 강해졌으리라 여겼으니까. 한데 남자의 기능을 못 했다니. 군터는 마리아를 볼 면목이 없었다. 머리로는 다 이해하지만, 좁은 속에선 두 개의 자아가 투덕거리며 싸우는 통에 혼란스럽기만 했다. 그때 마리아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곤 서럽게 울었다. 그제야 군터는 정신이 번쩍 났다.
“마리아.”
그녀를 향한 미안함, 제때 구하지 못한 자책감이 한데 얽히며 가슴이 아팠다. 애초에 자신이 마리아를 잘 지켰더라면 그녀가 그런 능욕을 당하지 않았을 텐데.
“군터는 몰라요. 당신한테 얼마나 미안했는지……. 배 속의 아이에게 죄를 짓는 것 같아서, 정말이지 죽고만 싶었어요.”
“미안하다.”
군터는 마리아를 끌어안곤 연신 사과했다.
“네가 울 일이 아니다. 내가 많이 부족해서 그런다.”
결국 자신도 이성보다 감정의 지배를 많이 받는 평범한 인간에 불과한 것을. 그러나 마리아는 군터를 원망하지 않았다. 세상의 어떤 사람도 이런 경우에 대범할 수는 없었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과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건 엄연히 달랐다. 처지를 바꿔서 군터가 그런 상황에 맞닥뜨린다면 저 역시 지금의 그와 같은 반응을 보였을 것이다. 왜냐하면 저나 군터나 불완전한 인간이니까. 그러니 지극히 정상이었다.
“저는 당시에 다행이라며 안심했어요.”
“신이 도운 거지. 하지만 나를 얼마든지 원망해도 돼.”
“아뇨. 원망하지 않아요. 그러기엔 우린 너무 많이 힘들었거든요.”
마리아는 군터의 품 안으로 더 깊이 파고들었다. 서로를 야속해 하기엔 짧은 기간에 힘든 일을 많이 겪었다. 게다가 아직 일이 다 끝나지 않았다. 라스토니아로 돌아가 마저 해결해야 할 일도 있었다. 군터는 눈물로 젖은 마리아의 입술을 덮었다. 두 입술 사이로 마리아의 눈물이 스며들었건만 전혀 쓰지 않았다. 고난 뒤에 맞보는 입맞춤은 아주 달콤하기만 했다.
“어머!”
마리아는 열심히 키스하다 저도 모르게 군터의 입술을 깨물고 말았다.
“우리 아이가 발길질하며 난리를 쳐요.”
그녀는 군터한테서 잠시 떨어진 채 흐뭇하게 웃었다. 곧 군터의 시선이 전보다 더 커진 마리아의 배로 향했다. 그는 잠시 무릎을 꿇곤 그녀의 배에 얼굴을 가져다 댔다.
‘고맙다. 잘 버텨 주어서.’
마리아만큼 아주 힘들었을 텐데, 꿋꿋하게 버텨 낸 제 아이한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그러곤 다시 의지를 다졌다. 반드시 마리아와 제 아이를 지켜 내고 말 거라고. 이젠 어떠한 운명이 자신을 시험해도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오기가 난달까. 대장장이의 거친 연마질에 더욱 단단해지는 철근처럼, 저 자신도 고난을 겪으며 좀 더 강해질 것이다.
“어서 가요. 노라가 걱정 많이 하고 있을 거예요.”
“그러자.”
군터는 마리아를 꽃다발처럼 안아, 말에 태웠다.
* * *
라스토니아 황궁으로 돌아오자, 예상대로 노라가 눈물 바람을 하며 달려왔다.
“왕비님! 대왕!”
그 와중에도 윌리엄을 품에 꼭 안고 있었다. 역시 노라는 아주 충직한 시녀장이었다. 아이를 부탁했더니 등한시하지 않고 잘 보살펴 줬으니까. 마리아는 노라와 부둥켜안은 채 오열했다.
“제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아세요? 매일 성문을 바라보며 이제나저제나 오시려나 기다렸지 뭐예요.”
“미안해요, 노라.”
두 사람은 한참이나 회포를 풀었다. 이내 마리아의 눈길이 노라의 치맛자락을 꼭 붙잡은 윌리엄을 향했다. 한데 헨리와 로랑의 아이가 전과 달리 보이는 이유가 무엇일까. 어린애마저 죽이는 건 잔혹한 일이라 여겨 살렸으나, 딱히 두 이 아이가 애틋했던 건 아니었다. 한데 지금은 윌리엄이 달리 보였다. 제 복수로 인해 윌리엄은 하루아침에 부모를 잃은 불쌍한 아이가 돼 버렸다. 그때 윌리엄이 노라의 치마를 끌어당기며 무어라 웅얼거렸다.
“마마!”
“우유가 드시고 싶은 거예요, 도련님?”
노라는 능숙하게 윌리엄을 안아 주었다. 하지만 마리아는 큰 충격을 받은 터였다. 그건 곁에 있던 군터도 마찬가지였다. 윌리엄이 그사이 노라를 엄마로 인식하게 되었다니. 이내 노라는 마리아와 군터의 의구심을 풀어 주었다. 자신이 이리저리 알아보니, 윌리엄은 황실 내에서도 잊힌 존재였으며 그간 방치되기 일쑤였다고. 궁인들조차 윌리엄을 사생아 취급 하여 황제의 아들로서 마땅한 처우를 해 주지 않았다고 했다. 그러니 아직 말도 못 하는 아이가 얼마나 외롭고 힘들었을까.
“지금은 밤에 잘 때도 제 품에서 떨어지질 않으세요.”
“그래요?”
마리아는 자신이 행한 복수의 파장이 절대 작지 않음을 절실히 깨달았다. 여러 사람의 인생이 달라졌으며 그중에는 윌리엄도 포함이 됐다.
“노라가 잘 보살펴 주세요.”
“예.”
당장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그때 군터의 손이 마리아의 어깨를 토닥였다. 두 사람은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그런데 군터의 얼굴에도 마리아의 혼란스러운 감정이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
“마리아, 그래도 마무리는 해야지.”
“그럼요. 그래야 우리가 이곳을 떠날 수 있으니까요.”
“맞다.”
이틀 후, 모두가 모였다. 예상대로 저녁 만찬을 주최한 사람은 찰스였으며 그는 현재 황궁의 주인이나 마찬가지였다. 한데 나라 전체에 이상한 소문이 퍼졌다.
[찰스 대공이 에바논에서 영웅이 되었답니다.]
노라의 귀띔으로 알게 되었다. 본디 찰스는 에바논의 허술한 국경으로 침입하여 후방을 맡기로 했었다. 하지만 성전 기사단이 모든 일을 처리한 뒤 찰스가 에바논 궁전으로 들어갔고, 그곳 사람들은 그를 폭군 술탄을 처단해 준 영웅으로 떠받들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욕심 많은 찰스는 에바논 궁전까지 쳐들어갔음에도 아무런 전리품도 챙겨 오지 못했다고 했다.
“에바논에는 새로운 술탄이 등극하게 될 겝니다.”
찰스는 마치 자신이 모든 일을 해낸 양 목에 잔뜩 힘을 주고 거들먹거렸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에로에게로 향했다.
“에론 왕자, 아니지 사기꾼.”
“사기꾼이라니요? 말씀이 지나치시군요. 저도 헨리 왕의 폭정을 막는 데 크게 일조했다는 사실을 잊으셨습니까?”
“허험.”
에로의 반박에 찰스는 헛기침만 해 댔다. 딱히 반박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에로가 마리아와 연관되어 있을 거라고 상상도 못 했다.
‘저 인간은 황제감이 아닌데.’
에로는 찰스를 보며 한숨을 쉬었다. 그때 군터가 앤드류에게 물었다.
“재주가 좋아. 교황을 움직이도록 했으니 말이다.”
사람들은 잘 모르겠으나 교황이 직접 전장에 나선다는 건 그리 흔한 일이 아니었다. 막말로 귀족이 교황청을 찾아간다손 쳐도 그를 직접 만나기 어려운 게 현실이었다.
앤드류는 피식 미소 지으며 겸연쩍어했다. 때마침 마리아도 궁금하다는 얼굴로 앤드류를 보자, 드디어 그가 말문을 열었다.
“복잡한 우리 황실 얘기는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앤드류의 말에 모두 놀랐다. 마리아와 헨리의 원한, 무너진 황권, 할라드와의 동맹, 라스토니아의 혼란에 관해서 전혀 말하지 않았다니. 그러한 사정 얘기도 하지 않았는데 리베리오를 움직인 건, 앤드류의 능력이었다.
“몇 마디만 썼을 뿐이죠.”
군터는 씹다 만 고기를 그냥 삼켰다. 저 자신은 결코 가질 수 없는 능력, 앤드류처럼 지략이 높은 사람들의 처세술이 궁금해졌다.
“교황으로서의 본분을 다하시라고 했습니다. 이교도의 땅에 사는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으니 악마로부터 구해 달라고……. 빛나는 성좌에 앉아 덕담하실 시간이 없다고.”
잠시 정적이 흘렀다. 정말이지 앤드류다운 말이었다. 고분고분하게 부탁하지 않을 거라는 건 예상했으나 이렇게 세게 나갈 줄이야. 정적을 깨고 마리아가 찰스를 향해 잔잔하게 웃으며 말했다.
“대공께선 훌륭한 아들을 두셨습니다.”
구차하게 사정하지 않고 교황이 직접 나설 수 있는 명분을 만들어 주었다. 이교도 처단만큼 합당한 이유는 없을 터.
“어험! 아직 부족한 게 많은 아이입니다.”
찰스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제 자식이 뛰어나다는 것을 알지만, 지금 제 입장으로선 칭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내일 귀족 회의가 열린다지요?”
“그렇소. 내일 왕비께서 참석하셔야 합니다. 우리 황실의 인장을 돌려주셔야지요.”
마리아의 물음에 찰스가 기다렸다는 듯이 재촉했다.
“그래야죠.”
다만 그 귀족 회의에 재상이 없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릴 뿐이었다. 제 아버지가 살아 계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지만 리베리오의 말이 옳았다. 제 마음에 일말의 원한도 남지 않아야 소중한 것을 다시 얻을 수 있다는 말. 부정하기 어려웠다.
“부디, 좋은 결과를 얻길 바라오.”
군터의 말에 뼈가 있었다. 그러자 찰스는 군터의 시선을 외면했다. 마치 그대는 황제감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 * *
드디어 귀족 회의가 열렸다. 마리아는 긴장한 채로 회의장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러자 군터가 마리아의 어깨를 붙잡곤 눈을 맞췄다.
“나를 봐.”
“군터.”
“저 문을 열고 들어가면, 헬랜드의 왕비는 없는 거다.”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마리아는 군터의 말에 어리둥절했다. 저한테 헬랜드의 왕비가 아니라니.
“마리아는 한때나마 라스토니아의 황후였던 자격으로 인장을 건네는 거다.”
그제야 마리아는 군터의 깊은 속내를 이해했다. 귀족들에겐 폐황후가 원한을 품어 황실의 인장을 훔쳤다고 여겨질 테니까. 물론 그건 사실이었다. 그러나 때론 결과도 중요한 법, 폭군 헨리 왕을 처단했고 혼돈에 휩싸인 라스토니아 정세를 바로잡기 위함이었음을 알려야지. 그것이야말로 복수가 아니라 바로잡는 거니까.
“알겠어요.”
마리아는 군터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마침내 회의장 문이 활짝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