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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황후 마리아-112화 (112/120)

112화

열린 문 앞에서 마리아는 긴장하여 마른침을 삼켰다. 이내 장내의 모든 시선이 마리아, 아니 그녀의 손에 들린 붉은 벨벳 주머니로 쏠렸다. 세상의 왕족과 귀족이 한결같이 바라는 욕망의 산물. 이것을 얻기 위해서라면 부모, 자식도 정적으로 돌릴 수 있는 절대 유혹이었다. 마리아는 상석에 앉은 찰스의 옆자리에 자리했다. 곧 기다렸다는 듯이 귀족들의 쓴소리가 날아왔다.

“황실의 인장을 빼돌리다니요?”

“여자의 복수가 무섭지. 버려졌다고 어떻게 이런 말도 안 되는……!”

“한때나마 황후로서 부끄럽지도 않습니까?”

“제임스 공작이 살아 계셨다면 통탄하실 일이었습니다.”

귀족들의 쓴소리에 마리아의 얼굴이 점점 굳어 갔다. 왜냐하면 그들의 말이 전부 옳기 때문이다. 무엇 하나 반박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중에서도 제 아버지의 얘기는 저조차 동의했다. 감히 황실의 인장에 손을 댔다는 사실을 알면 제 여식이라도 용서하지 않았을 터. 그때 찰스가 탁자를 거세게 치며 소란을 잠재웠다.

“그대들은 어째서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하오? 우리가 헨리 왕의 폭정에 얼마나 휘둘렸는지 기억나지 않소? 제국의 사정은 또 어떻습니까?”

“어험.”

찰스의 일침에 귀족들은 멋쩍은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렸다. 이내 마리아는 자리에서 일어나 귀족들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여러분의 말씀이 다 옳습니다. 한때나마 라스토니아의 황후였던 사람으로서 해선 안 될 짓을 했습니다. 사과드립니다.”

마리아는 고개 숙여 제 잘못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녀가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눈빛이 날카롭게 변해 있었다.

“그런데 말입니다. 여러분은 나라가 엉망이 되어 가는데 무얼 하셨지요? 목숨을 걸고 황제에게 간언한 적이 있었나요?”

“그건……!”

“제국민에게 고율의 세금을 거둬들이는 데 앞장서지 않으셨나요? 그런 탓에 라스토니아 제국민은 어떻게 되었나요?”

세금을 내지 못하면 죽임을 당했으며 평민에서 농노로 전락한 예는 허다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고국을 등지고 세상을 떠도는 이들이 얼마나 많아졌던가. 그러다가 도적 떼가 되기도 하고 종국엔 길에서 생을 마감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녀의 말에 회의장은 불편한 기색이 역력했다. 아니, 누구 하나 마리아의 말에 반박하지 못했다.

“여러분이 그토록 존경했다던 제임스 공작, 제 아버지가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실 때 무얼 하셨나요? 헨리 왕이 정부를 황후로 만들기 위해 스튜어트 가문을 반역 죄인으로 몰 때, 말리셨던 분 계셨어요?”

모두 저 살기 바빠서, 되레 정세의 흐름을 관망하며 어느 편에 서야 할지 주판알을 튕겼을 터. 마리아는 더 이상 말하지 않기로 했다. 제 억울한 사정을 말한들 저들이 알아주지도 않을뿐더러 이제는 벌여 놓은 일을 해결하는 것이 중요한 때니까.

그녀는 붉은 벨벳 안에서 인장을 꺼내 탁자 가운데 놓았다.

“오!”

그 순간, 귀족들은 일제히 탄성을 질렀다. 마리아한테 집중했던 관심이 일제히 인장으로 향했다.

“라스토니아의 귀족으로서 그 책임을 다해 주세요. 호화스러운 삶과 특혜만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부강한 나라가 될 수 있도록 힘써 주세요. 제가 바라는 건 그것뿐입니다.”

“그건 폐황후가 신경 쓸 일이 아닙니다.”

한 귀족이 마리아의 말을 반박하고 나섰다. 이제 아무런 권한도 없는 여자가 귀족들에게 훈계질 따위 하지 말라는 뜻일 터.

“맞습니다. 폐황후 마리아는 이날로 끝이니까요. 하지만 저도 한때는 이 나라 사람이었기에 드리는 말씀입니다.”

마리아도 그의 말에 부정하지 않았다. 아니, 조금이라도 빨리 폐황후 마리아라는 꼬리표를 떼고 싶은 심정이었다. 자신은 이제 헬랜드의 왕비니까. 그것이 제 정체성이었다. 그때 한 귀족이 찰스를 향해 이제껏 누구도 하지 않았던 말을 꺼냈다.

“귀족 회의를 하기에 앞서 재상을 다시 뽑아야 하지 않습니까?”

그의 말에 장내가 어수선했다. 애초에 황위 서열 1위인 찰스를 앞에 두고 귀족 회의를 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지금으로선 그가 차기 황제가 되는 건 거의 확정적이라고 하나, 말 그대로 귀족들이 회의하여 황제를 옹립해야 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그럼 재상을 선출하는 일이 선행되어야겠군요.”

그때부터 귀족들은 서로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나서고는 싶지만, 서로의 생각을 감춘 채 기회만 노리는 상황. 때마침 회의장 문이 열리며 시종장이 다급하게 들어왔다.

“무슨 일이냐?”

찰스의 호통에 시종장은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교황께서 납시셨습니다.”

“교황께서?”

귀족들은 화들짝 놀라며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한데 시종장은 못다 한 말이 있는지 입술만 달싹거리다 마저 말을 이었다.

“교황께서 아주 귀한 분을 모셔 오셨습니다.”

“!?”

회의장이 요란하게 술렁이는 가운데, 마침 문이 활짝 열리며 성전 기사단이 장내로 일사불란하게 들어와 양옆으로 도열했다.

‘할아버지.’

목장을 짚은 리베리오가 문 앞에 서 있는 광경에 마리아의 심장도 요란스럽게 뛰었다. 한데 더 경악할 만한 일이 벌어졌다.

“아……버지!”

마리아도 놀라서 큰 소리로 부르지 못했다. 리베리오가 데려온 사람이 제 아버지였다니.

“제임스 스튜어트 공작!”

“분명히 참수당했는데 어떻게……?”

“이게 어찌 된 일입니까?”

마리아는 혼란한 귀족들의 반응을 뒤로한 채 제임스를 향해 뛰어가 그의 품에 안겼다.

“아버지!”

“마리아.”

그녀는 살아 있는 아버지의 품에 안기는 순간, 이제껏 볼 수 없었던 거대한 빛과 온기를 느꼈다.

* * *

군터는 회의장 밖에서 초조하게 안의 상황을 주시했다. 틀림없이 귀족들이 하나같이 마리아를 비난할 터. 그때 군터는 문 앞을 지키는 시위를 향해 손가락을 까딱거렸다. 시위는 경직된 얼굴로 군터를 향해 뛰어왔다.

“받아라.”

군터는 시위의 손에 금화 하나를 던져 주었다.

“고맙습니다. 대왕님.”

“고마울 필욘 없다. 네게 시킬 일이 있어서 수고비로 준 것이니.”

“예? 제가 할 일이요?”

“이제부터 문 앞에 바짝 서서 귀를 쫑긋 세워라.”

“쫑긋……?”

“그래, 어떤 귀족이 마리아에게 막말하는지 잘 들으란 말이다. 누가 누군지 모르겠으면 몇 놈, 아니지 몇 사람이 허튼소리를 했는지 세어 놔라.”

“알……겠습니다.”

시위는 한달음에 문 앞으로 달려가 군터의 명령대로 귀를 문 쪽에 바짝 갖다 붙였다. 때마침 메아리처럼 들려온 익숙한 목소리.

“쯧쯧쯧, 한심한 녀석 같으니.”

“!?”

양옆으로 성전 기사단의 호위를 받으며 교황이 나타났다. 그는 군터를 한심하게 쳐다보며 연신 혀를 찼다.

“왜? 마리아한테 쓴소리라도 하면 혼내 줄 참이냐?”

“당연하잖소? 내 여자한테 막말하는 인간들은 그냥 두지 않을 거요.”

“어허! 너는 언제 그 이름값을 할 테냐?”

“그 이름 교황이 지어 준 거 아니니, 걱정할 필요 없소.”

언제나처럼 두 사람은 투덕거렸다. 늘 서로를 걱정하고 만나면 반가워하면서도 내외라도 하는 양 진짜 속내를 감췄다. 마침 두 사람의 소소한 다툼을 멈추게 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 이름은 내 딸이 지어 준 거로 아는데.”

“!?”

하얀 대리석 계단으로 백금발을 한 중년의 사내가 올라오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에 만났던 사람으로 자신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마리아의 아버지였다.

“공……작.”

군터는 귀신이라도 본 양 놀랐다. 그제야 리베리오가 제게 마리아만 부탁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군터의 시선이 리베리오를 향했다. 절대 사적인 일에 나서지 않는다며? 그래도 제 혈족은 외면하지 못한 거겠지? 라는 표정은 감추지 못했다. 물론 군터의 얼굴에는 교황을 향한 고마움으로 가득했다.

“그런 거 아니다, 이놈아!”

아니라고? 그럼 교황이 스튜어트 가문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던 게 아니라는 건가.

“뭐요?”

순간 제임스는 군터를 와락 품에 안더니 연신 그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고맙네. 우리 마리아를 살려 줘서.”

제임스는 군터를 품에 안곤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이내 군터의 두 손이 허공을 배회하다가 조심스레 제임스의 등을 살포시 짚었다. 대체 이 감정은 무엇인지 모르겠다. 가슴에 온기가 돌며 코끝이 시큰해지고 괜스레 서러웠다. 그러면서도 크나큰 안도감이 들었다.

“늦었지만, 저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오랜 포옹 끝에 군터가 제임스에게 깍듯하게 존칭을 썼다. 그러자 몇 계단 위에 서 있던 리베리오가 저 배은망덕한 놈을 보라며 노발대발했다. 그런데도 군터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10년 전에 저와 솔샤르를 보살펴 주셨는데, 정작 떠날 때 고맙다는 인사를 못 드렸습니다. 사실 그런 말을 해야 하는 줄도 몰랐습니다.”

“아니네, 내가 더 고맙지. 자네가 꿋꿋하게 우리 마리아를 사랑하고 지켜 줬다는 거 알고 있네. 그거면 된 거지, 안 그렇나?”

제임스는 마리아와 같은 표정으로 군터를 다독였다. 순간 군터의 가슴에 온기가 퍼졌다. 마리아를 보호하는 건 제 사명이기에 한 것뿐인데, 제임스가 건넨 따뜻한 말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공작, 어서 가자고. 내가 엄청 바쁜 사람이라.”

리베리오의 재촉에 제임스는 군터에게 다녀오겠노라 인사했다.

“기다려 주게, 군터.”

“예? 예. 기다리겠습니다.”

군터는 리베리오와 회의장으로 향하는 제임스의 뒷모습을 감격스레 바라보았다. 마리아가 그를 보면 얼마나 기뻐할지 상상만 해도 웃음이 지어졌다. 이젠 마리아가 걱정할 일은 하나도 없게 되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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