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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황후 마리아-113화 (113/120)

113화

솔샤르와 에로도 둘만의 시간을 가졌다. 두 사람은 아주 오랫동안 포옹하며 서로의 체온과 숨결, 체취에 흠뻑 젖었다. 살아 있음을 느끼며 소중한 감정을 공유했다.

“언제쯤 헬랜드로 돌아갈 수 있는 거예요?”

에로는 솔샤르에게서 몸을 살짝 떼며 물었다.

“적어도 사흘 후면 떠날 수 있을 거다.”

솔직히 솔샤르도 에로만큼 헬랜드가 그리웠다. 제 앞에 멀쩡히 살아서 숨 쉬는 에로가 있는데도 불안함은 여전했다. 아무래도 타국이라서 느끼는 경계심일 것이다.

“고생했다.”

솔샤르가 에로의 뺨을 매만지며 말했다. 이번에 에로가 겪은 고난은 죽어도 잊지 못할 터. 그저 연극배우처럼 즐기고 싶다는 에로의 열망을 외면하지 못해 지지했건만, 죽을 고비까지 넘길 줄은 몰랐다. 미리 알았다면 죽어도 허락하지 않았을 테지. 물론 에로의 의지대로 행동하는 것이 옳으나,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용납할 수 없다는 의미였다.

“부관님도요.”

“이름을 불러 봐.”

“네?”

에로가 죽었다가 깨어났던 순간, 제 이름을 불러 줬을 때의 감동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솔샤르.”

“듣기 좋네.”

“에로, 너는 내게 많이 소중한 사람이다.”

그가 뜬금없이 진지한 얘기를 꺼내는 바람에, 에로는 사뭇 놀란 터였다. 한데 말하면 뭐 해, 제게도 그가 너무 소중한 것을.

“솔샤르도 제게 너무 소중한 사람이에요.”

“그래?”

“네.”

솔샤르는 에로에게 머물던 시선을 돌려 먼 곳을 바라보았다. 그는 마치 깊은 고뇌에 빠진 양 진지했다. 그러다 다시 에로를 응시했다.

“에로, 우리 헬랜드로 돌아가면 혼인하자.”

“네?”

“아, 미안하다. 반지도 꽃도 없이 말로만 해서.”

멋쩍어하는 솔샤르와 달리, 에로는 아주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혼인이라니, 자신이 지금 그에게서 무슨 소리를 들은 거지? 제 귀로 듣고도 믿기지 않았다. 대체 무어라 대답해야 하는지 머릿속이 하얗기만 했다.

“싫은가?”

에로가 사색이 된 채 연신 고개를 흔들며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자, 솔샤르도 적잖이 놀랐다. 제 딴에는 에로가 무척 좋아할 거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연인이라면 응당 청혼을 하고, 수락받으면 감동하는 거니까.

이젠 솔샤르의 얼굴도 심각해져 갔다. 그렇게 두 사람은 어색하게 시간을 흘려보냈다. 드디어 에로가 말문을 열었다.

“혼인이요? 글쎄요, 진지하게 고민해 보지 않아서…….”

솔샤르는 의아했다. 청혼을 받은 에로가 단번에 수락할 거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한데 혼인에 관해 고민조차 해 보지 못했다니. 그건 의외였다. 혹여 에로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닐까. 왠지 확실하게 해 두는 게 나을 듯싶었다.

“에로, 나를 좋아하는 거 맞아?”

“네? 당연하죠. 사랑하는걸요.”

그제야 솔샤르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서로 사랑하는데 문제 될 게 무에 있다고.

“하지만 혼인은…… 모르겠어요.”

“어째서?”

“그건……!”

‘나로 인해 솔샤르의 인생이 불완전해지니까요.’

혼인이라면 한 가정을 이루는 것이다. 사랑하는 남녀가 만나 아이를 낳고 키우는 일련의 과정들. 그런데 자신은 솔샤르에게 연인은 가능하나, 진짜 아내는 되어 줄 수가 없으며 그의 아이를 낳아 줄 수도 없다. 지금이야 괜찮다고 해도 세월이 많이 흐른 뒤에 찾아오는 공허함을 견딜 수 있노라 장담할 수 있을까.

“그건? 뭔데?”

솔샤르의 표정이 매우 진지했다. 긴장했는지 마른침을 삼키는 그의 목울대가 연신 꿀렁댔다.

“나 참, 정말 눈치 없다니까? 원래 쉽게 대답해 주는 거 아니거든요. 남자의 애를 막 태워야 재밌는 거라고요.”

“그런 거였어?”

그의 미소에 에로는 히죽대며 고개를 끄덕였다. 괜스레 심각해지고 싶지 않았다.

“기다려 주세요. 고민 좀 해 볼게요.”

오히려 새초롬한 얼굴로 대답했다. 그러자 솔샤르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 * *

스튜어트 가문은 완전히 복권되었다. 제임스 공작은 다시 재상으로 추대되었고 여러 차례의 회의를 거쳐 새로운 황제를 옹립하기로 했다. 그리고 마리아는 제임스뿐만 아니라 어머니인 엠마와 오빠들과도 다시 만났다. 한동안 울음바다였지만 격한 감정의 소용돌이는 한바탕 휩쓸고 지난 후라서 이젠 매우 평온한 상태였다.

“어머니, 미리 알고 계셨어요?”

마리아는 엠마에게 아주 놀라운 이야기를 들었다. 낸시가 보낸 서신을 읽곤 무언가 일이 잘못되었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마리아, 너의 필체가 아니었거든. 낸시가 대충 흉내만 낸 거였지. 그리고 너에게 미안하지만, 이 어미는 낸시가 헨리 왕을 사모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엠마는 오랜 세월 귀부인으로 살아온 습관 때문인지, 시시콜콜하게 그 과정에 대해 말해 주지 않았다. 다만 일찍이 마리아와 헨리의 사이가 끝날 것을 알아챘고, 최악의 경우 스튜어트 가문도 멸문될 것을 예상했기에 미리 대책을 마련했다고 했다. 일부러 시체를 구해서 공작 부부인 양 꾸며 놓았으며, 비밀스러운 지하 통로를 통해 라스토니아를 빠져나가 남대륙의 섬에 숨어 있었다고 했다.

“그 꿈이 맞았어.”

마리아는 예전에 자신이 꾸었던 꿈이 신기해서 연신 중얼거렸다.

“남대륙의 섬이요?”

“교황님께서 마리아에게 준 재산이었지.”

엠마는 그 섬에 관해 이야기해 주었다. 대외적으로는 그곳이 귀족들의 휴양지로 알려져 있지만, 실상은 각 나라에서 쫓겨난 병자들의 섬으로, 교황청에서 치유사와 주교들을 보내 관리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도 리베리오가 마리아에게 그 섬을 남긴 건, 딱 한 가지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마리아의 수중에는 돈이 끊이지 않을 테니까. 기부하라는 뜻이었지.]

지금도 마리아는 리베리오가 떠나기 전에 했던 말을 떠올리면 웃음이 났다. 그때 군터가 중요한 말을 할 것처럼 목을 가다듬었다.

“말씀 중에 죄송합니다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마리아는 군터의 정중한 태도에 깜짝 놀랐다. 리베리오 앞에서도 무례하기 짝이 없는 남자이건만, 제 아버지와 어머니에겐 확연히 달랐다. 자신이 아는 군터가 맞는지 의구심이 들 정도였다.

“말씀해 보세요. 대왕.”

엠마는 기품 있는 미소를 지으며 군터의 말에 귀 기울였다.

“마리아와 함께 헬랜드로 가시는 건 어떻습니까?”

군터는 더 이상 마리아가 친정 식구들을 그리워하는 게 싫었다. 함께 살면 그녀가 더 행복해할 테니까. 마리아가 기뻐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해 주고 싶었다. 그러자 마리아도 제임스와 엠마를 번갈아 보며 답을 기다렸다. 두 분이 함께 가 준다면야 더 이상 바랄 게 없었다.

“아버지, 어머니. 저희와 함께 가요. 더는 헤어지기 싫어요.”

“미안하오. 대왕.”

제임스는 군터에게 예의를 갖추며 말했다. 하지만 군터는 꽤 놀란 터였다. 예상대로라면 흔쾌히 수락할 줄 알았다.

“혹시 헬랜드가 척박할까 그러시는 겁니까?”

군터는 잠시 간과했다. 제임스와 엠마도 귀족이라는 사실을. 누구라도 헬랜드로의 이주를 반기지 않으니까. 귀족이면 더더욱.

“대왕, 남대륙의 섬은 더 척박했소. 매일 치유사들과 병자들을 돌봐야 했지. 그러니 우리한테 헬랜드는 천국이나 마찬가지 아니겠소? 다만…….”

제임스는 라스토니아의 재상으로서 소임을 다할 것이며 희생당한 제 영주민들의 가족들을 살펴야 한다고 했다. 아직 라스토니아에서 할 일이 많이 남아 있기에 갈 수 없다는 결론이었다.

결정적으로 망조로 접어든 고국을 외면할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라 말했다. 마리아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예상은 했지만 아주 잠시나마 기대가 컸다. 역시 제 부모님다운 결정이었다.

“그럼 종종 헬랜드로 와 주실 거죠?”

마리아는 입을 뽀로통하게 내밀며 투정을 부렸다.

“당연하지. 마리아가 아이를 낳으면 바로 보러 갈 거다.”

엠마는 마리아를 끌어안곤 그녀의 등을 쓸어 주었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마리아의 임신을 예지하는 꿈을 꾸었노라 말해 주기도 했다.

“공작님, 공작 부인.”

군터가 두 사람을 부르자, 제임스는 갑자기 그를 향해 다가갔다.

“대왕, 잠시 말을 놓겠소.”

“!?”

“군터, 이젠 우리를 아버지, 어머니라고 부르거라.”

“예?”

“나와 엠마도 앞으론 군터를 아들이라고 여길 테니.”

제임스의 말에 군터의 가슴에 뜨거운 감정이 역류했다. 일순간 맥이 탁 풀리며 코끝이 찡했다. 군터는 제임스와 엠마를 번갈아 가며 보았다. 이내 엠마가 수긍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군터의 얼굴이 벌게졌다.

“죄송합니다. 얼굴이 붉어진 건 화가 나서 그런 게 아닙니다.”

군터는 이런 상황에선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뜨거운 감동이 그의 전신에 거센 바람처럼 몰아쳤다.

“군터, 우리를 아버지, 어머니라 불러 봐라.”

“예? 아,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은 것을. 하지만 속으론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만큼 좋았다. 군터는 여러 번 입술을 달싹거리다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아버지 그리고 어머니.”

군터는 어색하게 그들을 새 호칭으로 불렀고, 마리아는 이미 감동의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스튜어트 공작저의 재건에 필요한 자금을 제가 대겠습니다.”

“군터, 고맙지만 그 자금은 라스토니아 빈민들을 위해 기부해 주면 어떨까?”

“예? 예.”

“시간이 걸리더라도 공작저는 내 손으로 재건하고 싶구나.”

제임스의 거절에 군터는 민망했는지 얼굴을 붉혔다. 그러자 제임스는 군터를 꼭 안아 주며 말했다.

“고맙다, 아들아. 네 소중한 마음은 영원히 간직하마.”

“!?”

‘아들, 내가 아들이라고?’

그의 말 한마디에 우람한 군터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여보, 나도 우리 아들 좀 안아 봐요.”

엠마의 성화에 제임스는 군터를 양보해 주었다. 그러나 유난히 체구가 작은 엠마는 고개를 있는 대로 뒤로 젖혀야 군터의 얼굴을 겨우 볼 수 있었다. 군터가 엠마를 살짝 들어 올려 주자, 그녀는 그를 따뜻하게 안아 주곤 연신 등을 토닥였다.

“든든한 아들이 생겨서 좋구나.”

“어……머니.”

드디어 군터는 ‘어머니’라는 말을 해 볼 수 있게 되었다. 자신은 태어나서 지금까지 ‘주인님’이라는 소리는 해 봤어도 누군가를 아버지, 어머니라고 불러 본 적 없었다. 그런데 막상 입 밖으로 꺼내고 나니, 그 호칭의 힘은 대단히 컸다. 부르기만 해도 그 호칭에 담긴 깊은 감정이 심장까지 전해진달까.

‘나에게도 부모님이 계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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