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마리아는 군터와 함께 황실 묘지를 찾아왔다. 귀족들은 죽은 헨리와 모니카의 시신을 황실 묘지에 안장하는 것을 반대했으나, 찰스의 강한 고집에 모두 승낙했다.
[무능한 황제였을지라도 엄연히 라스토니아의 황제였고 선황후였소. 그 시신을 아무 곳에나 방치하는 것은 곧 황실의 위엄을 깎아내리는 거요.]
그의 뜻에 가장 먼저 동조해 준 사람은 제임스였다. 그들이 저지른 만행과 별개로 차기 황제가 될 찰스의 심중이 더 중요했기 때문이다.
“대공의 심경에 변화가 온 것 같아요.”
마리아가 군터와 손을 잡은 채 헨리의 묘지 앞으로 걸어갔다.
“막상 황제가 되고 보니, 공허함에 휩싸인 것 같더군.”
“제 눈에도 그렇게 보였어요.”
황위를 간절히 원할 때는 보이지 않고, 느끼지 못했던 것들이 한꺼번에 밀려오면서 찰스는 혼돈에 빠진 듯이 보였다. 헨리는 자신을 잘 따르던 조카였고, 모니카는 정략적이긴 했으나 제 아내로 죽음을 맞이했으니까.
마침내 두 사람은 헨리의 묘지 앞에 다다랐다. 마리아는 묘비석에 새긴 문구를 속으로 되뇌었다. 더불어 찰스가 느꼈을 허망함을 그녀도 알 듯했다. 매일 헨리를 미워하고 저주했었는데, 막상 그의 묘지 앞에 서니 그런 과거가 한없이 덧없게 느껴졌다.
‘죽으면 다 끝인 거잖아.’
그때였다. 군터는 마리아의 양어깨를 지그시 잡으며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마리아가 라스토니아를 떠나기 전에 만나야 할 사람이 있다.”
“네?”
마리아가 놀라서 고개를 돌리자, 저 멀리서 꽃을 든 여자가 걸어오고 있었다. 누군지 너무 잘 알지만, 당혹감에 휩싸여 굳이 묻지 않아도 될 것을 물었다.
“군터가 낸시를 부른 거예요?”
“아니다, 낸시가 인편으로 소식을 전해 왔다. 내게 부탁하더군. 마리아와 풀어야 할 것들이 있다고.”
“그래요?”
마리아는 군터의 말을 듣는 내내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낸시와도 마무리를 짓긴 해야지.
낸시가 두 사람에게로 가까워지자, 군터는 슬며시 자리를 피해 주었다. 마침내 마리아는 낸시와 마주하게 되었다. 한때는 상전과 시녀가 아닌 자매라 여길 정도로 돈독한 사이였건만,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마리아는 씁쓸한 감정에 한숨을 토해 냈다.
낸시는 마리아를 향해 정중하게 인사했고, 마리아는 그녀를 애잔하게 바라보았다. 그러곤 낸시의 행색을 세심하게 살폈다. 옷차림도 그렇고, 특히 거친 손을 보니 왕경지에서 고된 농사일을 하는 듯했다. 사실 이건 추측이 아니라, 노라와 에로가 하는 말을 얼핏 들어서 알고 있었다.
“폐하께 먼저 인사하도록 해.”
마리아는 낸시를 위해 한옆으로 살짝 비켜섰다. 그리고 낸시는 헨리의 묘지를 마주하고 섰다. 그녀는 묘지 앞에 놓인 화병에 가져온 꽃을 꽂은 뒤, 두 손 모아 기도했다. 낸시는 애써 눈물을 참고 있으나, 몸이 떨리는 건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곁에서 보고 있기가 애처로울 정도로 떨었다. 그렇게 기도를 다 마칠 무렵, 낸시는 그대로 주저앉더니 헨리의 묘비를 붙잡고 소리 내 울었다.
‘헨리, 다행이야. 당신을 위해 저렇게 슬퍼해 주는 사람이 있어서.’
마리아는 헨리가 생전에 낸시의 진심을 조금이나마 알아주길 바랐다. 자신을 사모하는 마음을 악용하지만 말고 그녀의 사랑을 속까지 봐 줬더라면 좋았을 텐데. 결국 헨리는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물건이나 사람에 대한 제 감정만 중요하게 여긴 것뿐이었다. 그때 낸시는 마리아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황후님, 제가 잘못했어요. 어리석은 저를 용서해 주세요.”
그제야 낸시는 마리아에게 진심 어린 사과를 했다.
“시작할 때부터 잘못됐다는 것을 알았지만, 다시 돌아가기가 두려워서 그랬어요.”
낸시는 어깨를 들썩이며 오열했다. 마리아는 손으로 허리를 짚은 채 천천히 앉았다. 그러곤 초라하게 흔들리는 낸시의 어깨를 잡아 주었다.
“다 끝난 일이야. 나는 더 이상 너를 미워하지 않아. 하지만 완전한 용서를 하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겠지.”
애정과 신뢰가 깊었던 관계였기에 그 실망감도 큰 법이라고 했다. 솔직히 낸시를 완벽하게 용서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했다.
“언젠가는 예전처럼 웃으며 만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바랄게.”
마리아의 말에 낸시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보게 되었다. 예전의 마리아를. 단아하고 인자하며 평화로웠던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될 줄이야.
“낸시, 가끔 폐하를 찾아와 줬으면 좋겠어.”
그녀가 아니면 헨리를 찾아올 사람은 없을 테니까.
“제가 어떻게 감히!”
“부탁하는 거야.”
“!?”
어리석은 헨리가 이제라도 낸시의 진심을 알아준다면 좋을 텐데. 마리아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나 멀리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군터를 향해 손을 들었다. 그래도 마음은 편해졌다. 제 속에 낸시를 향한 미움이 사라져서. 이젠 미련 없이 헬랜드를 떠나도 되겠지. 마리아는 자신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오는 잘생긴 남자를 바라보며 환하게 웃었다. 라스토니아를 떠나면 제대로 된 제 인생을 살아 봐야지.
“잘 있어. 낸시.”
마리아는 낸시에게 마지막 인사를 전했다.
* * *
드디어 라스토니아에서 떠나는 날이 다가왔다. 사흘 정도면 다 마무리될 거라 예상했는데 의외로 이곳에 머무는 날이 길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모두가 제자리를 되찾았으니 군터와 마리아도 헬랜드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하지만 단 한 가지가 그들의 발길을 붙잡았다.
“아버지, 어머니도 함께 가시면 좋을 텐데.”
마리아보다 군터가 제임스와 엠마와 헤어져야 하는 것을 더 서운해했다. 특히 엠마와 많은 시간을 보내서 그런지, 그는 말할 때마다 ‘어머니’ 소리를 빼놓지 않았다. 마치 제 편이라도 얻은 양 좋아하는 모습이 아이처럼 천진해 보였다. ‘가족’이라는 호칭이 서로를 묶는 힘이 대단히 컸다. 소속감과 연대감이 군터에겐 큰 힘이 되는 듯했다.
하지만 솔샤르와 에로는 단 한 시간이라도 빨리 라스토니아를 떠나고 싶어 했다. 특히 에로가 조바심을 냈다.
“무슨 일이여?”
노라는 에로의 얼굴이 며칠째 어두운 것에 신경이 쓰였다.
“네? 아무 일도 아니에요. 빨리 헬랜드로 가고 싶어서 그렇죠.”
사실 솔샤르에게 청혼을 받은 뒤부터 고민이 깊어졌다. 행복한 건 이루 말할 필요가 없었다. 문제는 제 선택에 대한 확신이었다.
“휴, 그건 나로 그래. 왕비님 앞에서 말을 못 해서 그렇지. 아주 귀부인 노릇을 하는 게 고역이여.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성질도 못 내고. 무엇보다 귀부인들하고 얘기 나눌 때가 제일 따분하고 말이여.”
“내일 떠날 거예요. 그러니 염려 마세요.”
마침 나타난 마리아가 웃으며 말하자, 노라와 에로는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내일이요?”
“네, 다 마무리됐어요. 찰스 대공이 황제가 되셨으니 더는 우리가 이곳에 있을 이유가 없죠.”
투덜대긴 했으나 희소식에 세 사람은 즐거워했다. 그때 노라가 마리아에게 진지하게 물었다.
“헨리 왕의 사생아는 진짜 데려가실 거예요?”
“네. 왜요? 걱정되세요?”
“아무래도. 아이가 커서 제 부모에 대해서 알면 대왕과 왕비님을 오해할까 봐 그렇죠.”
“로랑한테 기회를 주고 싶어요.”
“예?”
리베리오의 조언대로 복수의 마무리를 징벌로 끝내기는 싫었다. 로랑이 제 아들을 키울 의지가 있다면 적극적으로 지지해 줄 생각이었다. 로랑이 아이를 양육하며 성숙한 인간으로 거듭나길 바랐다.
“거부하면 어쩌시려고요? 제 새끼를 잘 거둘 여자 같진 않던데…….”
“로랑이 아이를 거부하면 노라가 잘 키워 주면 되잖아요.”
“제……가요?”
애초에 노라를 믿었기에 윌리엄을 맡겼다. 강한 어머니 아래서 반듯한 아이로 성장할 거라 확신했기 때문이다.
“노라한테 윌리엄을 다 떠맡기진 않을 거예요. 저도 노력할게요.”
“예, 왕비님.”
“근데, 에로는 안색이 안 좋네?”
“네? 그……럴 리가요.”
마리아의 의심 가득한 눈초리를 피하긴 어려우나, 아직은 두 여자한테 다 털어놓을 때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저 자신도 여전히 망설이고 있기 때문이다.
‘헬랜드에 가서 라모나와 상의해 봐야겠어.’
“이럴 때가 아니지, 내일 떠나면 당장 숙소에 있는 짐을 싸야겠어요.”
에로가 부산스레 나가려 하자, 노라도 덩달아 그녀를 따라 나갔다. 그때 군터가 굳은 얼굴로 나타났다. 막 밖으로 나가던 노라와 에로도 놀라서 걸음을 멈췄다.
“군터, 왜요?”
마리아는 잔뜩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내일 일정을 취소해야겠다.”
“네? 왜요? 무슨 일이 또 생긴 건가요?”
마리아보다 노라와 에로가 후다닥 달려와 되물었다.
“찰스 대공, 아니 찰스 황제가 급사했다.”
“급사요?”
“새벽에 화장실을 갔다가 쓰러졌는데, 심장마비인 것 같다는군.”
“세상에!”
마리아는 두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울먹였다. 이제 겨우 황실이 안정되나 했는데, 다시 비극이 일어나다니. 군터는 얼마간 이곳에 머물러야 한다고 했다. 장례식에서도 참석해야 하며, 무엇보다 재상인 제임스의 곁에서 힘이 되어 줘야 해서 내일은 떠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마리아로선 새 황제가 누가 될지 지켜봐야 할 터였다. 예상대로라면 서열 2위인 앤드류가 유력하지만.
“다들, 그리 알라고. 난 아버지께 가 봐야겠으니.”
“그러세요. 군터.”
군터의 일방적인 통보가 끝나자 노라와 에로는 안타까운 얼굴로 서로를 쳐다보았다.
‘염병할, 그 인간은 왜 지금 죽고 난리여. 황제도 됐는데 오래오래 살 것이지.’
노라는 비통한 표정을 지으며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시늉을 했다.
‘뭐야 뭐야! 어째서 그 아저씨는 번번이 내 앞길을 막는 거냐고. 하루라도 빨리 헬랜드로 가서 라모나를 만나야 하는데.’
에로는 눈시울이 붉어진 마리아를 안아 주며 속으론 투덜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