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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황후 마리아-115화 (115/120)

116화

헬랜드 왕궁에서 연회가 열렸다. 한데 연회에 참석한 정무대신들은 사뭇 놀랐는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헬랜드의 연회에선 무희들의 춤사위나 격투 시합을 감상하며 밤새 술을 마시곤 했다. 하지만 초대할 때부터 옷을 제대로 갖춰 입으라는 왕명이 있었다. 이게 다 왕비인 마리아의 머릿속에서 나온 것일 테지.

“왠지 우리가 고급스러워진 것 같지 않아?”

“그러게 말이야. 라스토니아에선 연회를 이렇게 하나 보지?”

술잔을 들고 삼삼오오 모여 인사하고 대화하는 분위기, 잘 차려입은 악공들이 우아한 곡을 연주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시종들도 깍듯하게 예를 갖추며 술과 음료를 날랐다. 그중에서도 가장 달라진 광경은 외국에서 온 왕족들이 꽤 보인다는 점이었다. 군터와 마리아는 그들과 능숙하게 대화했고 정무대신들도 외국 왕족들과 대화하게끔 자리를 만들어 주었다.

“대단하네, 왕족이 헬랜드의 연회에 참석을 다 하고 말이야.”

“왕비님의 외교 덕분이지.”

“하긴 우리 용병 일이 줄어들긴 했어.”

“그런 거 안 해도 돈은 벌 수 있잖아.”

“이젠 우리도 사람답게 살아 봐야지.”

연회의 면면을 둘러보다 보니 새삼 나라의 정세가 많이 바뀌었음을 실감했다. 한데 그런 변화에 반발심보다는 이제야 헬랜드가 국가의 형태를 띠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군터는 연회가 시작할 때부터 마리아한테서 떨어지지 않았다.

“마리아, 걸을 수 있나?”

군터는 퉁퉁 부은 마리아의 발이 신경 쓰였다. 맞는 신발이 없어서 따로 제작해야 했으니까.

“괜찮아요. 막달이 되면 다 이렇게 몸이 붓는대요.”

“그래?”

그녀의 말에 수궁은 했으나 군터의 의구심과 걱정은 사라지지 않았다. 더구나 스톤의 겨울잠까지 길어져서 여간 불안한 게 아니었다. 혹여 스톤이 깨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마리아가 출산하는 일은 없어야 할 텐데. 순간 군터의 귓가에 환청이 들렸다.

‘아아악! 군터, 살려 줘요!’

“!?”

군터는 소스라치게 놀라 제 곁에 있는 마리아를 보았다. 분명 그녀의 목소리였다.

‘왕비님이 숨을 거두셨습니다.’

또 다른 환청과 아이 울음소리가 들렸다. 군터는 사색이 된 채 그 자리에 주저앉았고 연회장에 흐르던 음악은 뚝 그쳤다.

“군터!”

마리아가 놀라서 그를 부축하자, 군터는 식은땀을 흘리며 숨을 헐떡거렸다. 이내 그의 눈앞에 참혹한 환영이 보였다. 하얀 천에 덮인 마리아, 노라의 품에 안긴 아기, 그리고 통곡하는 자신. 군터는 공포에 휩싸여 몸을 떨었다.

“솔샤르!”

마리아의 부름에 솔샤르가 다급히 달려와 군터를 연회장 밖으로 안내했다. 물론 마리아가 뒤따랐다.

“괜찮아요?”

“괜찮아. 두통이 와서 그래. 마리아는 손님들을 대접해야지.”

군터의 만류에 마리아는 더는 그와 함께할 수 없었다. 군터의 말대로 자신은 초대한 손님들을 두고 나갈 수가 없었다.

“대왕, 왜 그러십니까?”

“마리아가…….”

입에 담는 것조차 끔찍했다.

“조금만 계십시오. 궁의를 데려오겠습니다.”

솔샤르는 군터를 푹신한 소파에 앉혀 놓곤 자리를 떴다. 아무래도 마리아의 출산이 임박하니 그의 신경이 예민해진 듯싶었다.

“대왕께 인사드립니다.”

솔샤르가 자리를 떠난 뒤, 얼마 뒤에 낯선 목소리가 군터를 불렀다.

“누구냐?”

군터는 제 앞에 공손히 서 있는 남자를 보았다. 일전에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금세 기억이 떠오르지 않았다. 본디 저라는 사람이 그렇게 신경이 둔하지 않은 것을.

“라이언 더프입니다. 아멜리의 남편.”

“라이언 더프? 아, 기억난다.”

자신은 미래에서 왔노라 궤변을 늘어놨던 치유사였다. 그에게 병원이라는 것에 관해 계획을 세워 보라는 명령도 내렸건만, 어째서 그를 까맣게 잊고 있었을까. 그가 이상하다 여겼으나 주장하는 논리는 전혀 이상하지 않았다.

“내게 할 말이라도 있느냐?”

“예.”

그제야 군터는 라이언에게 주목했다. 한데 그의 안색이 좋지 못했다. 느낌상 마리아에 관한 얘기를 꺼내려는 듯했다.

“왕비님은 임신중독증이십니다.”

“뭐? 그게 뭐지?”

라이언은 임신으로 인한 일종의 합병증 내지는 부작용이라 설명했다. 신체의 모든 기능이 저하되고 특히 혈류 공급이 잘 안돼서 최악의 경우 산모가 숨질 수도 있다고 했다.

“저를 믿지 않으시겠지요? 하지만 현재 왕비님을 보아하니, 상태가 매우 안 좋으십니다.”

그때부터 라이언은 알아들을 수 없는 괴상한 말들을 줄줄 쏟아 냈다. 임신성 고혈압이 동반되고 상복부의 통증이 있을 것이며 잘못하면 시각 장애가 올 수도 있다고 했다. 군터는 라이언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았다.

“위험하다는 것이냐?”

“예, 당장 출산을 해야 합니다.”

“뭐? 진통이 오질 않는데 어떻게?”

“제왕절개를 해야 합니다.”

“제왕절개? 그게 뭐지?”

“산모의 배를 갈라서 애를 꺼내는 겁니다.”

“!?”

라이언의 말에 군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내 군터는 라이언의 목을 우악스럽게 움켜잡았다.

“다시 말해 봐라. 누구의 배를 갈라?”

“크……. 윽!”

군터는 라이언이 숨조차 쉬지 못할 정도로 억세게 목을 잡았고, 그의 분노는 인내의 최대치를 넘고 말았다.

“군터!”

때마침 마리아와 노라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라이언은 군터의 손에 죽을 뻔했다.

* * *

연회가 끝나고 솔샤르와 에로는 손을 잡고 정원을 산책했다. 물론 두 사람의 대화는 라이언과 군터의 이야기로 시작했다.

“아멜리의 남편은 감옥에 갇힌 거예요?”

“응. 대왕의 진노가 대단하셨거든. 그나마 노라를 봐서 그 정도에서 멈추신 거다. 아니었다면 라이언은 이미 죽은 목숨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그건 나도 몰라. 궁의를 데리고 가 보니 한바탕 난리가 났더라고. 대왕께서도 딱히 말씀을 안 하시고.”

심각한 대화를 마친 뒤, 에로는 연신 솔샤르의 눈치를 보다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라모나가 마법으로 자신을 여자로 만들어 준다고 했다고. 또한 여자가 되는 그 일련의 과정에 대해서도 말했다. 솔샤르는 에로의 말을 경청하곤 고뇌에 빠진 듯했다.

“에로, 누차 말하지만 나는 네가 여자든 남자든 상관없다. 그냥 너라서 사랑하는 거야.”

“알아요. 그런데 제가 괜찮지가 않아요.”

“내가 변할까 봐 그러는 거야?”

“아뇨, 변하지 않으실 거 알아요. 실은 제 욕심이에요. 솔샤르를 사랑하는 마음과 별개로 아주 오랫동안 간직했던 꿈을 이루고 싶은 거예요.”

그건 완벽한 여자로 다시 태어나는 것. 에로에겐 너무 간절한 희망이었다. 또다시 솔샤르는 말이 없었다. 100일간 동굴에 갇혀 있어야 한다는 게 걱정이 되지만, 에로의 바람을 외면할 수도 없는 상황. 에로가 얼마나 여자가 되고 싶어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기에 가능하다면 그 꿈을 이뤄 주고 싶기도 했다.

“그래, 해 봐.”

“정말이요?”

“응. 인생에서 후회할 일은 남기지 말아야지. 하지만 힘들다 싶으면 언제든 동굴 밖으로 나와라.”

“알겠어요. 지지해 줘서 고마워요.”

솔샤르는 에로를 다정하게 안아 주었다.

그리고 다음 날, 에로는 만반의 준비를 마친 뒤, 문제의 동굴로 향했다. 기분 좋게 떠나고 싶어서 마리아와 노라 그리고 솔샤르와도 일찌감치 인사하곤 라모나와 둘이 동굴로 왔다.

“에로, 동굴 안에 들어가면 100일간 먹을 수 있는 순무와 사슴 고사리가 있을 거예요.”

라모나는 에로의 목에 마석 목걸이를 걸어 주며 이것저것 설명했다. 물은 절대 마시면 안 되고 오로지 순무와 사슴고사리만 먹어야 한다며 재차 강조했다.

“알았어. 잘할게.”

“에로를 위해서 동굴 안도 방처럼 꾸며 놨어요. 읽을 책도 많이 가져다 놨고요. 아차, 뜨개질거리도 잔뜩 있어요.”

“심심하진 않겠다.”

순순히 대답하던 에로는 라모나의 두 손을 붙잡곤 애틋한 어조로 말했다.

“라모나, 너라도 왕비님을 꼭 지켜 드려야 해.”

에로가 마음에 걸리는 건 단 하나였다. 마리아의 출산. 함께해 주지 못하는 것이 속상하지만 라모나가 날을 정해 준 터라 미루지도 못했다.

“음, 염려 마세요.”

라모나는 걱정 가득한 에로를 위로했다. 마침내 에로가 동굴 안으로 들어가고 문이 닫혔다. 이내 라모나는 얼굴이 굳은 채 돌아섰다.

“에로, 미안해요. 저는 왕비님을 지켜 드릴 실력이 못 돼요.”

기어이 라모나는 진심을 말하곤 두 뺨에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훔쳤다. 마리아의 죽음은 이미 예견이 된 상태라서 저 같은 중급 정령이 손을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그저 스톤이 하루라도 빨리 깨어나기를 바랄밖에.

* * *

군터는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창가 쪽으로 향했다. 그러다 흘깃 돌아서서 마리아의 상태를 확인했다. 다행히 잠은 잘 잤지만, 한 시간마다 깬다는 게 문제였다.

[산모의 배를 갈라서 애를 꺼내는 겁니다.]

‘미친 새끼.’

곱씹을수록 화가 났다. 감히 마리아의 배를? 그렇게 불경한 말을 지껄이는 놈을 살려 둔 건, 오로지 노라 때문이었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말도 있었다. 마리아의 몸이 심하게 붓는 건, 혈류 공급이 원활하지 않기 때문이라는 말. 이론적으로 의학에는 문외한이지만, 사람의 몸에 피가 잘 통하지 않으면 저리거나 마비되는 이치를 생각했을 때 완전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으나, 라이언은 천재이거나 괴짜인 듯했다. 그것도 아니면 그의 말대로 미래를 다녀온 존재일 수도 있고. 세상에는 해괴한 일이 많이 일어나곤 하니까.

‘그래도 마리아의 배를 가르다니, 그건 말도 안 돼.’

군터는 거칠게 도리질했다. 마침 침대 쪽에서 인기척이 났다.

“마리아?”

그녀가 깼나 보다. 군터는 다급하게 마리아를 향해 다가갔고 제 예상대로 그녀는 잠에서 깬 터였다. 그런데 마리아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군터, 양수가 터졌어요.”

군터가 이불을 들추자 마리아의 자리가 흥건했다. 진통 없이 양수가 먼저 터지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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