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앤드류가 그토록 통곡하는 광경에 마리아와 군터는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 마리아가 기억하는 앤드류는 매사 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으며 분석적이었다. 특히 어릴 때부터 찰스한테는 다소 신경질적인 모습을 보여 왔던지라 그의 눈물이 더욱 놀라웠다. 한데 그는 여느 자식처럼 슬퍼하고 서러워했다. 마리아는 그런 앤듀르가 가여웠다. 생각해 보니 그는 아직 미혼에다가 어머니도 계시지 않았고 의지할 만한 형제도 없었다. 그러니 갑자기 자신의 머리에 씐 왕관의 무게가 버거울 터. 장례식이 끝난 뒤 황제 즉위식도 곧바로 이루어졌다.
“황제 폐하, 경하드립니다.”
마리아는 앤드류에게 극상의 예의를 갖췄다. 하지만 그는 조금도 기뻐하지 않았다. 오히려 마리아와 군터를 번갈아 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마치 할 말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대왕 그리고 왕비님, 당분간 황실에 머물러 주시면 안 됩니까?”
“!?”
“저는 아직 황제라는 자리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황후 자리도 공석이고 모든 면에서 미흡합니다. 하지만 두 분께서 곁에 계시면 마음의 의지도 되고 실무적인 도움도 될 것 같습니다.”
“그건…….”
“글쎄.”
마리아와 군터가 고민하는 사이, 맞은편에 서 있던 노라와 에로는 두 사람을 향해 손으로 엑스를 만들며 펄펄 뛰었다.
‘저 염병할 황제가 뭐라 씨불이는겨?’
노라는 아주 우아하게 웃으며 속으로 온갖 욕을 다 했다. 헬랜드의 시녀장이 아니었다면 정말이지 앤드류의 멱살이라도 잡았을 것이다.
‘어쩜, 두 부자가 똑같아. 왜 내 앞길을 막느냐고. 힝!’
에로도 겉으로 표정 관리를 하느라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나마 솔샤르만 무덤덤한 얼굴로 마리아와 군터의 결정을 기다렸다. 사실 에로와 함께 있는 곳이라면 라스토니아든 헬랜드든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때 제 사람들의 좋지 않은 표정을 두루 살핀 군터가 결심했는지 앤드류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황제, 징징대지 말게.”
“예?”
“황위는 고독하고 왕관은 무겁잖은가? 처음부터 누군가에게 기대려 하면 그 틈을 타고 교활한 신하들이 득세할 거라는 소리지.”
군터의 단호한 말에 앤드류는 물론이고 마리아도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의 말이 다 옳기 때문이다. 어느새 군터가 한 나라의 군주로서 품격을 갖춰 가는 모습에 경외심마저 들었다.
“제임스 재상께서 큰 힘이 되어 줄 걸세.”
군터는 저 자신이 기특했다. 제임스와 대화를 나누다가 가슴에 와닿는 말이라서 기억해 두었던 것을 이렇게 앤드류에게 써먹을 줄이야.
“그……렇군요.”
앤드류가 실망하자, 군터는 그의 어깨를 짚으며 다독였다.
“황제, 마리아가 벌써 8개월에 접어들어서 말이야. 헬랜드로 돌아가야 할 것 같다.”
“!?”
그제야 앤드류는 자신이 미처 염두에 두지 못한 사실을 깨달은 양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죄송합니다.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죄송할 필요까진 없네. 앤드류는 아주 좋은 황제가 될 거니까, 크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말이지.”
“고맙습니다.”
마리아는 두 사람의 훈훈한 대화에 지그시 미소를 지었다. 그러고 보니 라스토니아에 온 지도 벌써 석 달이 다 되어 갔다. 그동안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마음 같아선 엠마가 있는 친정집에서 출산하고 싶지만, 내키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심리적으론 부모님의 존재가 큰 힘이 될 수 있으나, 자신은 난산할 거라는, 아니 자칫 아이를 낳다가 죽을 수도 있다는 스톤의 예언이 있었다. 그러니 스톤이 있는 헬랜드로 돌아가는 것이 마땅했다. 물론 그런 운명에 굴복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반드시 이겨 낼 참이다.
* * *
우여곡절 끝에 헬랜드로 돌아왔다. 마리아가 헬랜드로 돌아왔을 때는 8개월의 막바지로 접어들면서 배가 급속도로 커졌고 온몸의 부종이 심해졌다. 노라는 그런 마리아의 증상을 가장 걱정했다. 임신부의 몸이 부을 순 있으나, 마리아는 그 정도가 매우 심했기 때문이다.
‘대왕께서 라스토니아에서 실력 있는 치유사와 산파를 데리고 왔으니 큰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하지만 그들한테만 의지할 수도 없는 상황. 노라는 매일 마리아의 상태를 확인했다. 그녀는 자신들이 돌아왔을 때쯤이면 스톤이 겨울잠을 마치고 돌아와 있을 줄 알았다. 한데 스톤의 방문은 굳게 잠긴 채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군터를 비롯하여 모든 이들이 더 걱정했다.
“염려 마세요. 제가 있잖아요.”
라모나가 사람들의 불안감을 의식했는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간 자신은 수많은 마도서를 깨우쳤고 실제로 경험한 것도 매우 많다며 자랑하느라 바빴다.
“라모나, 이번에는 머리가 보라색이네?”
에로가 라모나의 머리카락을 신기한 듯 만지며 말했다. 그러자 라모나가 에로를 의미심장한 눈초리로 살폈다.
“에로, 저한테 할 말 있죠?”
“어……? 어떻게 알았어?”
“나 정령인데……?”
“그랬지.”
“뭐야? 아무도 내 실력을 믿어 주지 않고.”
실은 헬랜드에 오자마자 라모나에게 할 말이 아주 많았다. 다만 마리아의 출산이 임박해서 참고 있었을 뿐이지. 그때 마리아의 시선이 에로를 향했다.
“에로, 무슨 걱정 있어?”
“저요? 아뇨!”
“아니긴! 라스토니아에 있을 때부터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낑낑거렸잖어?”
“제가 언제 똥 마려운 강아지처럼 굴었다고 그러세요?”
에로가 발끈하자, 노라가 소리 내 웃었다.
“아, 그래 쉬- 마려운 강아지라고 치지 뭐.”
“어머머! 교양 넘치던 시녀장은 어디 간 거야? 나 참, 기막혀서.”
에로와 노라의 실랑이 속에 마리아는 다른 것이 보였다. 에로가 큰 고민이 있다는 느낌이랄까. 솔직히 그동안 제 사람들의 사정을 세심하게 살펴 주지 못한 것에 대한 미안함이 있었는데, 이참에 물어봐야겠다.
“에로, 말해 봐. 우리한테 비밀 같은 거 만들 필요 없잖아?”
“왕비님.”
마리아가 정곡을 찌르자, 에로는 내내 망설이다가 어렵사리 말문을 열었다. 라스토니아에서 솔샤르에게 청혼을 받았노라고. 세상을 다 가진 양 기쁘지만, 한편으론 절망적이기도 하다는 속내를 털어놓았다. 자신의 영혼은 여자라고 굳게 믿고 있으나 육체가 그렇지 못하니, 솔샤르에게 못 할 짓을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솔샤르 님도 언젠가는 제 아이를 원할 수도 있잖아요.”
“그건 그렇지.”
노라가 에로의 말에 동의했다. 자신도 혼인을 해 봐서 알지만, 남자들이란 백이면 백, 제 아이를 원하지 않는 사람을 못 봤기 때문이다. 그러니 에로의 고민은 매우 당연했다.
“에로, 솔샤르는 마음이 변할 것 같지 않은데?”
마리아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가 에로와 사랑을 시작했을 때부터 이미 그런 것까지 모두 염두에 두지 않았을까? 매사 신중한 사람이니까.
“제가 편하지 않아요. 결핍된 가정이라 여기며 평생 자책하며 살 것 같아서요.”
에로의 고뇌에 모두 말문을 닫았다. 그야말로 한계니까. 육체적으로 가능성이 없는 일이기에 무어라 위로해야 할지 할 말이 없었다. 현재로선 에로에겐 어떤 말도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았다. 그때 라모나가 고개를 치켜세우며 에로 앞으로 다가왔다.
“에로, 제가 해결해 드릴게요.”
“라모나가?”
모두 의아한 표정으로 라모나를 바라봤다.
“전에도 말했잖아요. 제가 에로를 여자로 만들어 주겠다고.”
“그게 가능해, 라모나?”
선뜻 희망을 보이는 에로와 반대로 마리아와 노라는 크게 한숨을 쉬며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애초에 에로를 여자로 만들 수 있었다면 스톤이 해 줄 수도 있었을 터. 하지만 라모나는 홀로 궁에 남아 마도서를 열심히 공부했으며 자신 있노라 거듭 강조했다.
“이미 실험도 마쳤어요.”
“!?”
실험을 해 봤다는 소리에 라모나에게서 고개를 돌린 마리아와 에로도 그녀에게 다시 시선을 주었다. 물론 누구보다 반짝이는 눈으로 기대하는 사람은 에로였다.
“제가 수컷 곰한테 실험을 해 봤거든요. 그런데 암컷이 됐더라고요.”
“세상에! 우리 라모나가 진짜 마법을 부릴 줄 아는 거여?”
그제야 노라도 라모나를 인정하는지 큰 소리로 법석을 떨었다. 이내 라모나는 자신이 어떻게 실험했는지 그 과정에 관해서 설명했다.
“그럼 변화 마석을 목에 건 채, 100일간 동굴에서 순무와 사슴 고사리만 먹으면 된다는 거야?”
“아니! 사람이 어떻게 100일간 순무와 사슴 고사리만 먹어?”
노라가 발끈했다.
“원래는 마늘하고 쑥이었는데요?”
“마늘하고 쑥? 차라리 순무랑 사슴 고사리가 낫네.”
의아해하는 노라와 달리 에로의 얼굴에는 희망이 가득했다. 설사 마늘과 쑥이라고 해도 여자의 몸만 가질 수 있다면 아무 상관 없었다.
“할 수 있겠어요, 에로?”
“응, 할 수 있어.”
“실제로 저기 동대륙에선 곰이 마늘하고 쑥을 먹고 사람이 됐다는 소문도 있어요.”
“정말?”
화들짝 놀라 눈이 동그래진 에로는 이내 마리아를 향해 빠르게 다가가더니 손을 덥석 잡았다.
“왕비님, 저 해도 돼요? 제가 출산하시는 거 지켜봐야 하는데.”
“나 안 죽어, 에로.”
“그게 아니라…….”
에로가 눈물을 흘렸다. 이렇게 속마음을 들켜 버렸다. 그런 비극이 절대 일어나선 안 되겠지만, 혹여 마리아가 출산하다 죽기라도 하면 저와는 그대로 이별이니까. 한데 마리아의 의지가 매우 굳건해서 안심했다.
“에로가 할 수 있는 건 다 해 보도록 해. 내 걱정은 하지 말고. 노라, 라모나도 있고, 결정적으로 대왕께서 나를 지켜 주실 거야.”
마리아는 에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저 때문에 에로가 얼마나 험한 일을 많이 당했던가. 그것만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아팠다. 그래서 더 많이 응원해 줄 참이다.
“그럼, 해 볼게요. 모두 기도해 주세요.”
에로가 모두를 둘러보며 의지를 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