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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황후 마리아-117화 (117/120)

117화

양수가 터져 당황했으나 곧 진통이 시작됐다. 노라는 군터에게 예정일보다 이르지만 괜찮다며 다독였다. 곧 산실에 궁의와 산파가 두 명씩 들어갔다. 물론 군터와 노라도 함께했다. 처음 진통을 시작할 때는 마리아도 참을 만했는지 신음이 그다지 크지 않았다. 한데 점점 통증의 강도는 거세지고 간격은 짧아지면서, 마리아의 고통도 커졌다. 그때 산실 문이 열리며 궁의 차림을 한 젊은 남자가 느지막이 들어왔다.

“넌 누구냐?”

군터는 본능적으로 강한 경계심을 드러냈다. 신경이 예민해진 상태라 낯선 사람의 등장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궁의입니다.”

한 번도 본 적이 없는데. 그때 노라가 거들었다. 라스토니아를 떠날 때 군터가 많은 궁의와 산파를 데려왔노라고. 지금 그들은 밖에서 대기 중이란 말도 해 주었다.

“아, 그랬지.”

그제야 군터는 손으로 이마를 거머쥐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많은 사람을 데려왔으니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 건 당연했다. 치유사와 산파만 100여 명이 넘을 정도였다. 그들 중에는 제국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한 치유사도 있었고, 아이만 수십 명을 받아 낸 유명한 산파도 있었다. 실력과 경험만 있다면 닥치는 대로 데려왔으면서 기억도 못 하다니.

사실 라이언 때문에 과도한 경계를 한 것일지도 모른다.

[왕비님은 임신중독증입니다. 당장 출산해야 합니다.]

[제왕절개를 해야 합니다.]

[제왕절개, 그것이 무엇이냐?]

[산모의 배를 갈라 아이를 꺼내는 겁니다.]

여전히 라이언의 발언에 노여움이 다 풀리지 않았다. 그런데 참 이상하지. 그의 말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으니까. 애초에 말 같지도 않다고 여겼으면서 그가 한 말은 토씨 하나 잊지 않았다.

“대왕, 제 사위라서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라이언은 미치지 않았습니다.”

“…….”

노라가 군터의 눈치를 살폈다. 괜스레 말 한마디 잘못하는 바람에 사위가 감옥에 갇히자, 아멜리는 매일 노라를 찾아와 눈물을 보였다.

‘속이 썩어 뭉그러지네.’

노라는 이래저래 머리가 아팠다. 마리아의 상태도 좋지 않은 데다가 제 집안까지 시끄러우니 속이 편할 리가 없지.

“아아악!”

마리아가 비명을 지르자, 군터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대왕, 가셔서 왕비님의 손을 잡아 주세요.”

“내가?”

군터가 잔뜩 겁먹은 얼굴로 노라를 보며 되물었다. 그래도 되는 건지 몰랐다. 출산하는 여자는 함부로 쳐다봐서도 안 되는 줄 알았으니까. 군터는 조심스레 마리아에게 다가가 그녀의 손을 잡아 주었다.

‘땀을 많이 흘린다.’

군터는 제 소매 춤으로 마리아의 땀을 닦으려다가 산파가 건넨 수건을 집어 들었다. 그는 애처로운 얼굴로 마리아의 이마에 흥건한 땀을 닦아 주었다. 통증이 올 때마다 시시각각 변하는 마리아의 표정, 아니 고통은 군터의 심장을 찌르는 바늘 같았다. 그런데도 자신은 그녀를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고작 손을 잡아 주고 땀을 닦아 주는 것뿐이라니. 순간 마리아를 임신시킨 저 자신을 저주했다.

“왕비님, 조금만 더 힘을 주십시오. 아기 문이 거의 열렸습니다.”

산파는 연신 마리아를 독려했다.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최선을 다했다.

“마리아, 내가 곁에 있다.”

“알아요. 그래서 할 수 있는 거예요.”

마리아는 지친 상태에도 군터의 물음에 대답했다. 그러나 마리아가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말하는 건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마리아, 잠시 후면 우리 아이를 만날 수 있다.”

“네, 어머니.”

“!?”

아무래도 마리아는 현재 자신이 무얼 하고 있는지 잘 모르는 듯했다. 감당할 수 없는 통증에 꺼졌다가 다시 불을 밝히는 촛불처럼 위태롭기만 했다.

“아……. 으윽!”

마리아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고통스러워하자, 노라가 득달같이 달려와 함께 호흡했다.

“자아, 숨을 들이마셔 보세요.”

“어머니, 너무 힘들어요.”

“예, 힘들지요. 이번에는 후- 하고 천천히 내뱉어 보세요.”

이미 마리아의 동공이 풀어진 상태. 무조건 아이를 낳아야 한다는 본능만 남은 것 같았다. 그때였다. 마리아의 몸이 심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눈이 하얗게 뒤집히며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마리아!”

군터는 공포에 질려 그녀의 이름만 부르고 노라는 궁의들을 채근했다.

“왕비님이 경련을 심하게 하셔.”

“아기는?”

“머리가 반도 못 나왔어. 걸린 것 같아.”

“출산하기 어려워.”

궁의들끼리 주고받는 말이 매우 회의적이었다. 이러다 마리아가 숨을 못 쉬면 그대로 죽어 버릴 터. 마침 늦게 들어온 젊은 궁의가 다른 사람들을 제치더니 마리아의 다리 사이에 자리했다.

“아기를 꺼내겠습니다.”

“아기를 죽이겠다는 건가?”

“왕비님이라도 살려야 합니다.”

젊은 궁의는 군터에게 물었다. 왕비와 아이 중에 누구를 선택할 거냐고. 하지만 군터는 정신이 반쯤 나간 상태였다. 황망한 얼굴로 입만 벙끗거렸다. 그러다 젊은 궁의와 시선을 맞추더니 이내 눈의 초점이 돌아왔다.

“왕비를 살……려라!”

그는 입 안에서 맴돌던 쓴 물을 내뱉듯이 말했다. 그의 허락이 떨어지자, 궁의는 마리아의 다리 사이로 손을 넣어 아기를 꺼냈다. 순간 왈칵 붉은 피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지혈하세요!”

그가 소리치자 산파들이 여러 장의 천으로 마리아의 출혈 부위를 막았다.

“아기 받아요!”

젊은 궁의는 다른 궁의에게 아기를 넘겨주곤 재빨리 경련하는 마리아의 곁으로 뛰어가 그녀의 입에 숨을 불어 넣었다. 군터에게 양해를 구할 겨를도 없이 급박한 상황. 아니 굳이 말하지 않아도 군터는 궁의의 행동을 이해했다. 간혹 숨이 끊어지려는 사람을 저렇게 살리는 광경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 젊은 궁의는 라이언보다 실력이 좋아 보였다. 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그리고 마리아에게 숨을 나눠 줄 때마다 그녀의 상태가 좋아지는 게 눈으로 보였다. 마치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처럼 제 몸을 아끼지 않고 마리아를 돌보고 있었다. 이내 심하게 경련하던 마리아의 몸이 진정되어 갔다.

“출혈은 어떻습니까?”

궁의의 물음에 산파들은 안도의 한숨으로 대답을 갈음했다. 그러자 궁의는 마리아가 경련을 멈추고 정상적으로 숨을 쉴 수 있도록 숨을 불어 넣어 주었고, 노라는 마리아의 몸을 주물러 주었다. 피가 잘 통하도록. 그러나 군터는 마리아의 손을 잡아 주는 것밖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대왕, 왕비님께 계속 말씀을 하십시오!”

“어……? 그래.”

궁의의 말에 정신이 난 군터는 마리아에게 아무 말이나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그가 말하자 마리아는 잔잔한 미소를 지으며 군터를 바라봤다.

“안 되겠습니다! 대왕. 왕비님께 입을 맞추십시오. 저 대신 숨을 불어 넣어 주십시오.”

궁의는 마리아의 상태가 위급하다 여겼는지 격앙된 어조로 말했다. 군터는 그의 말대로 마리아에게 입을 맞췄다. 그런데 잠시 정신이 혼미했다. 눈앞이 아득해지며 머리가 어지러웠다. 누군가가 제 의식을 휘젓고 있는 느낌이랄까. 제 의식의 일부가 마리아의 몸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몇 초간 정신을 잃었다가, 차가운 마리아의 손이 뺨에 닿는 순간 정신이 들었다.

“마리아.”

군터는 입술을 떼곤 자신을 바라보는 마리아를 불렀다. 초점도 또렷하고 숨소리도 안정적이었다.

“군……터.”

그녀가 제 이름을 부르자, 군터는 참았던 숨을 훅- 내쉬었다. 하지만 산실의 분위기는 그다지 좋지 않았다. 노라의 울음소리에 비극이 찾아왔음을 알게 되었다.

“노라.”

군터는 강보에 싸인 아기를 안고 오열하는 노라를 불안하게 불렀다.

“공주님이셨는데, 숨을 거두셨어요.”

“!?”

그러고 보니 산실에 있던 궁의와 산파 모두가 마리아한테서 손을 뗀 뒤였다. 그들은 고개를 숙이곤 흐느끼고 있었다. 이내 군터의 시선이 다시 마리아에게로 돌아갔다. 물론 그녀도 소리 없이 울부짖었다. 두 손으로 제 입을 막은 채 몸부림쳤다. 감히 그녀가 느낄 절망을 가늠할 수 없을 정도로 비극적인 몸짓이었다.

“송구합니다, 왕비님을 살리기 위해선 아기를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젊은 궁의는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안다.”

군터도 그들을 원망하지 않았다. 마리아가 경련을 심하게 해서 그냥 두었더라면 그녀마저 죽었을 터. 솔직히 군터는 여러 번 제 가슴을 쓸어내렸다. 아기에겐 미안하지만 마리아가 죽지 않아서 천만다행이며 신의 안배라 여겼다.

‘이것으로 충분해. 나의 마리아가 죽지 않았으니 된 거지.’

그래도 슬픔은 목까지 차올랐다. 노라는 비록 죽은 아기였지만 마리아와 군터에게 보여 주었다.

“이렇게 작은 몸으로 얼마나 힘들었을까? 미안하다. 아가야!”

마리아는 끝까지 힘을 내지 못한 저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반면 군터는 마리아를 쏙 빼닮은 아기를 보곤 끝내 고개를 숙인 채 울었다. 곧 산실은 울음바다로 변해 버렸다.

“왕비님, 공주님은 하늘의 별이 되어 매일 밤 반짝거릴 거랍니다.”

“응, 노라.”

“저도 세 아이를 낳았지만, 중간에 한 번 유산했고 또 한 번은 낳았더니 아이가 죽었더라고요.”

“!”

“아이를 잃는 경험은 끔찍하지만, 다음에 찾아올 아이가 더 많은 행복을 가져다줄 겁니다.”

노라의 말에 마리아는 눈물을 그쳐 보려 노력했다. 마침 궁의와 산파가 산실을 나가려 짐을 챙겼다. 군터는 마리아의 이마에 입을 맞추곤 노라에게 그녀를 부탁했다.

“잠깐만, 마리아를 부탁하지.”

“예, 대왕.”

군터는 그대로 산실을 나가 복도를 종종걸음쳐 가는 궁의와 산파를 바라보았다.

“스톤!”

그는 멀어져 가는 그들을 향해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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