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폐황후 마리아-118화 (118/120)

118화

군터의 부름에 궁의와 산파는 모두 제자리에 섰다가 다시 바쁘게 움직였다. 단 한 사람만 제외하고. 젊은 궁의는 군터를 향해 걸어왔다.

“스톤, 어째서 정체를 감춘 거지?”

그의 말에 궁의는 금세 모습을 바꾸었다. 어린 스톤으로, 군터와 같은 붉은 머리에 이번에는 황금빛 눈동자를 가진 열여덟가량의 소년의 모습이었다.

“대왕께서 원망하실지도 모르니까요. 저는 아기는 살리지 못했습니다.”

“원망하지 않는다. 오히려 네게 고마워.”

“고마워하실 필요 없습니다. 왕비님을 살리신 건 제가 아니라 대왕이시니까요.”

“!?”

“오래전 대왕께선 말씀하셨죠. 내 수명이라도 잘라서 마리아에게 주고 싶다고.”

스톤의 말에 군터는 잠시 상념에 빠졌다. 산실에서 스톤이 다급하게 마리아에게 숨을 나눠 주라고 했던 일이 떠올랐다. 그때 경험한 묘한 느낌에 젊은 궁의가 스톤일 거라 짐작했다.

“후회하십니까?”

“그럴 리가. 잘했다.”

“염려 마십시오. 두 분은 큰 고비를 잘 넘기셨고 아주 오랫동안 화목하게 사실 테니까요.”

하지만 이번에는 마리아에게 정해진 고난이었기에 피할 수 없다고 했다. 아니, 어찌 보면 운명을 바꾼 셈이었다. 원래대로라면 마리아는 아이를 낳다가 죽을 운명이었으니까. 스톤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기 위해서 겨울잠에서 깨어났는데도 일부러 정체를 감췄노라 해명했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구나.”

“그런데 더 잘 사시려면 왕비님의 마음이 편안하셔야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지?”

스톤은 마리아가 이번에 겪은 일은 대가를 치른 것이라 말했다. 원래는 그녀가 품은 복수가 너무 크고 강해서 죽을 수도 있었으나, 자신을 아프게 한 사람들을 끝까지 미워하지 않은 탓에 살 수 있었으며, 거기에 군터의 수명을 나누어 가진 것이 효과를 발휘한 것이라고 했다. 죽어 가는 타인에게 무작정 제 수명을 준다고 해서 다 살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복수의 대가라…….”

결국 복수를 하는 사람도 말로가 좋지 못하다는 것인가. 군터는 씁쓸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한데 스톤이 군터를 보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대왕, 어째서 용기를 내지 않으셨습니까?”

“뭐?”

“잘 생각해 보십시오. 인간의 의지로 어떤 난관도 극복할 수 있노라 말씀하셔 놓곤 정작 겁쟁이처럼 숨어 버리지 않으셨습니까?”

군터는 스톤이 무슨 말을 하는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저와 마리아가 출산을 결심한 자체가 인간의 용기였음을 모르고 하는 소린가.

“정령, 마법사, 신, 마녀, 주술……. 그런 것보다 인간의 용기가 더 위대하다고 하시더니.”

물론 그가 직접적으로 그리 말한 것은 아니었으나, 함축적인 의미가 담긴 말을 하며 마리아를 돕겠다고 했었다. 그러나 군터는 스톤의 말속에 담긴 뜻을 선뜻 떠올리지 못했다.

* * *

군터는 다시 마리아에게로 돌아갔다. 많이 절망하고 아파할 그녀를 생각하니, 문을 열기 전부터 심장이 아팠다. 하지만 마리아에겐 자신이 필요했다.

“마리아.”

“군터.”

“!?”

어쩐지 마리아의 표정이 나쁘지 않았다. 안색은 여전히 창백하지만 더는 울지 않았다.

“힘들지?”

군터는 그녀를 품에 안으며 물었다.

“후회하지 않아요.”

“뭐?”

그는 마리아를 살짝 품에서 떨어뜨려 놓곤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마리아가 그를 향해 환하게 웃었다.

“아기가 죽어서 많이 아프고 힘들지만, 출산을 강행한 건 후회하지 않아요. 물론 아기한테는 미안해요. 저는 8개월이 넘는 시간 동안 아기로 인해 충만하게 행복했거든요.”

마리아는 눈물을 참으며 조곤조곤 제 말을 이어 갔다.

“우리가 영원히 기억하면 돼요.”

끝내 그녀는 눈물을 터뜨렸다. 자신을 자책하며 자괴감에 빠지는 것조차 두려울 테지. 마리아는 이제껏 많이 힘들고 아팠으니까.

“제가 너무 이기적이죠? 아기를 죽여 놓고 뻔뻔하게 후회하지 않는다 하고.”

“아니, 전혀.”

마리아는 매해 아기가 죽은 날을 기념하며 작은 무덤에 꽃을 올려놓고 제 아이를 추억할 것이다. 지금은 그저 스스로 무너지지 않기 위해 동아줄을 잡고 매달려 있는 것일 뿐. 그래서 더 안쓰럽고 가여웠다. 군터는 알고 있다. 저 자신과 마리아가 절망하게 되면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구렁텅이에 빠져 절대 헤어 나오지 못할 거라는 사실을. 그러니 마리아는 본능적으로 스스로를 방어하고 있을 터. 그건 자신도 마찬가지였다. 마리아가 버텨 주면 자신도 절대 지옥으로 떨어지지 않을 것이다.

“스톤이 저를 살려 줬어요.”

마리아는 군터의 어깨에 기대어 가냘프게 속삭였다.

“알고 있었나?”

“네. 스톤의 향기를 기억하거든요. 아무리 다른 사람으로 몸을 바꿔도 향기는 같아요.”

말을 마친 마리아는 스르륵 쓰러지더니 잠이 들어 버렸다. 군터는 눈물을 머금은 채 잠든 마리아의 뺨을 연신 매만졌다.

‘이런 얼굴 오랜만이군.’

마리아가 라스토니아에서 모든 것을 잃고 죽으려 했을 때, 딱 이런 얼굴을 했었는데. 그 참담한 모습을 또 보게 될 줄이야.

‘마리아, 너는 강한 여자다. 그러니 반드시 일어나야 해.’

군터는 애써 참았던 눈물을 흘렸다. 이 눈물은 죽을 뻔했던 제 아내와 허망하게 가 버린 아이를 위한 눈물이었다. 죽은 제 아이를 위해 눈물조차 보이지 않는 매정한 아비는 되고 싶지 않았다.

* * *

마리아의 몸 상태는 하루가 다르게 좋아졌다. 물론 정서적으로도 꽤 안정을 되찾았다. 이게 모두 스톤과 노라 그리고 라모나 덕분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군터만큼은 아니었다. 그는 그날 이후로 한시도 마리아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녀와 함께 식사하고, 씻고, 산책하고 잠들며 자신의 시간을 온전히 마리아에게 바쳤다. 그래서일까, 우울하고 불안해하던 마리아도 하루가 다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그리고 이젠 소중한 사람들과 차를 마실 수 있는 여유도 갖게 되었다.

“왕비님, 아이는 또 가질 수 있습니다.”

스톤이 마리아를 향해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노라와 라모나는 넋이 나간 양 스톤을 보았다.

“하, 적응이 안 돼. 노인네였다가 새파랗게 어린 소년이라니.”

노라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자, 라모나는 새초롬한 표정을 지었다.

“저는 더 좋은 것 같아요.”

“좋겄지. 노인 수발드는 게 보통 고역이 아니여.”

“흠.”

노라의 말에 스톤이 헛기침을 해 댔다. 사실 자신이 노인이었을 적, 유난히 라모나를 부려 먹긴 했었다. 왜 같은 사람인데도 육체의 변화에 따라 성격도 바뀌는지.

“스톤, 정말이에요? 내가 또 아이를 가질 수 있어요?”

마리아는 다른 사람들이 티격태격하는 소리는 하나도 안 들렸다. 그녀의 귀에는 오로지 스톤의 말만 중요했다.

“그럼요. 그러니 더는 슬퍼하지 마세요. 겉으로만 나는 괜찮다 하시고 밤마다 우시는 거 다 압니다.”

스톤의 말에 마리아가 얼굴을 붉혔다. 극복할 수 있다고 자신했으나, 아이를 잃은 슬픔이 쉽게 가시지 않았다.

“왕비님, 진정한 용서를 해 보시는 게 어떠실까요?”

“네?”

마리아는 스톤의 뜬금없는 말에 놀랐다. 용서하라니? 누구를? 자신은 누구도 미워하지 않는데 어떻게 용서를 하라는 거지?

“아이를 낳아 보셨으니 그 소중함을 아실 거 아닙니까?”

‘로랑을 말하는 거구나.’

그러게, 그녀를 까맣게 잊고 있었다. 더 이상 미워하는 사람이 없다고 했으나 로랑은 여전히 꺼려졌다. 왜냐하면 로랑이야말로 제 불행의 원흉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순간 스톤의 시선이 라모나에게로 움직였다.

“라모나, 너도 상급 정령이 되고 싶다면 진짜로 용서를 해 봐라.”

“용서요?”

“복수했으면 용서도 해야 하는 것이 순리다.”

라모나는 스톤의 말에 정곡을 찔린 양 사색이 되었다. 마리아는 그제야 스톤의 진심이 와닿았다. 그는 제게 안식을 주고 싶은 것이다. 재물은 쉽게 가질 수 있으나 마음마저 평화로운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신이 되어야 가능하지 않을까. 그래도 덜 미워하고 더 용서하면 완전한 안식이 찾아오진 않아도 어느 정도 편해지긴 하겠지.

* * *

군터는 몇 날 며칠 스톤의 말을 곱씹었다. 어째서 자신은 도전 앞에서 용기를 내지 않고 뒷걸음질 친 걸까. 한데 그 도전이란 게 무엇인지 모르겠다. 그러다 불현듯이 그가 떠올랐다.

‘라이언, 그 미치광이!’

스톤이 말하는 인간의 도전이 그였을까. 갑자기 군터는 속이 뒤집혔다.

‘그런 것 같군.’

스톤은 늘 사람의 속을 뒤집곤 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그가 감옥에 갇힌 지도 꽤 오래되었다.

“솔샤르, 아멜리의 남편을 데려와라.”

“예? 그 이상한 작자를요?”

벌써 왕궁에 라이언에 대한 소문이 파다했다.

“그래, 확인할 게 있거든.”

“알겠습니다.”

얼마 뒤, 솔샤르는 라이언을 데리고 왔다. 한데 꼬장꼬장한 라이언의 표정은 여전했다.

“정신 좀 차렸나?”

군터는 의뭉스럽게 물었다. 그가 아직도 산모의 배를 갈라서 애를 꺼내는 방법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 궁금했다.

“대왕, 저는 미치지 않았습니다.”

“뭐?”

“왕비님은 임신중독으로 출산 당시 심한 경련을 하셨을 겁니다. 아이는 머리만 보인 채 걸려서 치유사가 억지로 꺼냈을 거고요. 그렇게 되면 심한 출혈로 아이도 산모도 모두 죽습니다.”

“그래, 네 말대로 아기는 죽었다. 하지만 다행히 산모는 살았다.”

“경하드립니다.”

라이언의 목소리는 냉랭했다.

“네게 맡겼더라면 아기도 살렸을 거라고 장담하겠지?”

“예, 그렇습니다.”

군터는 오랜 감옥 생활로 추레해진 라이언이 여전히 총기를 잃지 않은 것에서 해답을 찾았다. 스톤이 말하는 인간의 무모한 도전이 무엇인지. 애초에 라이언은 입증된 결과를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인간이 만들어 내는 변수란 건, 그를 온전하게 믿을 수 있는 자신의 용기였다.

‘하, 신이 나를 시험한 건가. 아니면 나의 우매함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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