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9화
군터와 라이언은 말없이 서로를 응시하며 보이지 않는 대립을 했다. 아주 팽팽하고 날 선 긴장감과 누구도 쉽사리 꺾지 않는 고집. 군터는 손으로 턱을 괸 채 여러 고민에 빠졌다. 그러다 결심이라도 섰는지 말문을 열었다.
“라이언, 너의 잘못이 무엇인 줄 아느냐?”
“예?”
군터의 뜻밖의 말에 라이언은 놀랐다. 여전히 군터가 제 방식을 부정하며 아예 믿지 않는다는소리를 할 줄 알았다.
“너는 사람을 설득하는 재주가 없다.”
“…….”
라이언의 말이 백번 옳다손 쳐도 그와 현재를 사는 사람들의 세계관 차이는 좁혀지지 않을 터. 시간을 거스르는 자라면 더더욱.
“증명해 봐라.”
“증명을 하고 싶어도 제 손발을 묶어 놓으셨는데 어떻게 합니까?”
“풀어 줄 것이다. 말로만 하지 말고 눈으로 확인할 수 있도록 보이란 말이다. 그래야 사람들이 믿을 테니.”
“!?”
묶인 제 수족을 풀어 주겠다니. 그제야 라이언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종교재판에 회부된 상황이라서 헬랜드에서도 숨죽인 채 살았다. 한데 이제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이었다.
“출산하기 어려운 산모는 배를 갈라서 아이를 꺼내야 한다고 했지?”
“예.”
“증명해라. 그런 방법을 써도 산모와 아이가 모두 무사하고 건강하다는 것을 보여 주란 말이다.”
“대왕!”
오히려 솔샤르가 군터의 허락을 막아섰다. 사람의 배를 갈라서 애를 꺼내다니. 그게 인간이 할 짓인가. 소가 새끼를 낳을 때도 사람은 그런 방법을 쓰지 않건만.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라이언은 악마가 틀림없었다. 하지만 군터는 솔샤르의 만류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병원이라는 것도 짓고 필요한 인력도 얼마든지 고용해도 좋다.”
“고……맙습니다. 대왕.”
“고마울 거 없다. 올해가 가기 전에 무엇으로든 내게 보여라. 가망 없다, 어렵다, 죽을 거다, 여겨지는 병자를 살리든지, 마리아처럼 난산인 산모와 아기를 살려서 내게 당당히 보여 주면 너를 인정하마.”
군터는 확고하게 마음을 정했다. 애초에 변화를 두려워하는 군터 플레이슬리는 없었기에 주춤거리는 모습은 저답지 않았다.
“솔샤르, 우리가 노예라는 굴레를 벗어나려 하지 않았다면 어찌 되었을까?”
군터는 설레는 발걸음으로 집무실을 나가는 라이언을 감흥 없이 바라보며 말했다.
“대왕, 그것과 저자가 하려는 일과는 다릅니다.”
“다르지 않아.”
노예로 살고자 했다면 지금도 여전히 시궁창의 쥐새끼처럼 살고 있겠지. 이 시점에서 변화를 도모하지 않으면 대왕이라는 허울에 갇혀 강자에겐 약하고 약자에겐 강한 한심한 인간이 될지도 모른다.
“내가 할라드의 등에 칼을 꽂았던 용기, 기억하느냐?”
“그걸 어떻게 잊습니까?”
“그것과 같다고 여겨라. 그러면 네가 나를 이해하기가 수월할 테니.”
솔샤르는 더 이상 반론하지 않았다. 물론 라이언이 아닌 군터를 믿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결심하고 노력하면 기어이 해내고야 마는 군터의 의지를 의심하지 않는다.
“예, 대왕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좋아. 내일부터 당장 왕성에 병원이라는 것을 짓도록 해.”
어느새 군터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 * *
라모나는 분홍빛 머리에 일그러진 한쪽 얼굴을 한 채 누군가를 기다렸다. 그녀는 제 인생에서 가장 비참하고 고통스러웠던 그 순간으로 돌아가 있었다. 그런데 자신은 한 번도 그 지옥 같았던 과거의 자신과 제대로 마주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오늘 끝을 낼 참이다. 마침 문이 열리고 시녀가 한 여자를 데리고 왔다.
“라모나 님, 노예를 데리고 왔습니다.”
“이쪽으로 데려오세요.”
시녀가 데려온 여자는 로랑 세라두였다. 돼지 농장에서 똥을 치우며 사는 노예. 그러나 오늘은 사람을 시켜서 로랑을 깨끗하게 씻기고 좋은 옷을 입혔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음식도 배불리 먹이라 했다. 어느새 자신이 알던 로랑이 온전히 모습을 드러냈다.
“로랑.”
“으…… 어으.”
라모나가 이름을 부르자, 로랑은 무어라 대답했다. 한데 어째서 그녀가 낯선 걸까. 자신이 알던 로랑이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혀는 잘리고 뺨에는 노예를 상징하는 낙인이 찍힌 모습.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로랑의 미모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무엇보다 제게 보이던 경계하는 눈빛이 사라졌다. 겁에 질려 눈치를 보는 가련한 여자만이 남았달까. 때마침 뒤쪽 문이 열리며 안쪽까지 빛이 길게 비쳤다.
“왕비님.”
라모나가 다소곳이 인사하자 마리아가 노라의 부축을 받으며 걸어왔다. 그녀는 걸어오는 내내 저만치에 서 있는 로랑한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왕비님, 앉으십시오.”
노라는 교양 있는 시녀장답게 마리아를 푹신한 소파에 앉혔다. 이내 마리아는 라모나와 로랑을 지켜보기로 했다.
“로랑, 기억해? 네가 나를 이렇게 만들었잖아.”
라모나는 예전의 흉측한 제 모습을 로랑에게 보였다. 그러자 로랑은 고개를 숙였다.
“나는 평생 너를 죽일 날만 기다리며 살았어. 얼마나 미워했는지 몰라.”
그녀의 목소리에 지난날의 설움과 분노가 가득했다.
“물론 지금은 네가 예전처럼 밉지는 않아. 그렇다고 아예 안 미운 건 아니야. 왜 그럴까 곰곰이 생각해 봤거든?”
에로 덕분에 지옥에서 빠져나왔고 지금은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런데도 가슴 한편에는 아직 다 풀리지 않은 응어리가 존재했다. 한데 저 자신은 그것을 애써 감추며 괜찮노라 덮는 데만 급급했다. 스톤이 말해 주지 않았더라면 평생 묻어 두려 했겠지.
“로랑, 나는 진심으로 너를 용서하고 싶어.”
“!?”
용서라는 말에 로랑이 놀라서 고개를 들었다.
“너를 용서하고 싶은데, 나는 아직 너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받지 못했더라고.”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죄를 시인하고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는 일련의 과정이 빠져 버렸다. 그저 복수만 했을 뿐. 그건 제대로 된 복수가 결코 아니었다.
“어으으……!”
로랑이 울기 시작했다. 마리아는 그런 로랑의 모습에 사뭇 놀랐다. 로랑을 안 이래 그녀가 울었던 적이 있던가. 아, 있었다. 저와의 결투에 졌을 때. 하긴 그건 지금의 눈물과는 조금 성질이 달랐지. 그땐 거의 발악이었으니까.
라모나는 천천히 로랑에게 다가가 그녀를 정면으로 응시하더니 손에서 빛을 쏟아 냈다. 라모나가 쏟아 낸 빛은 로랑의 몸을 휘감아 몸을 살짝 허공으로 띄워 올렸다. 그렇게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라모나가 쏟아 낸 빛은 로랑의 몸속으로 흡수되었다.
“아이고! 세상에나!”
역시 노라의 감탄사가 가장 빨랐다. 마리아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빛이 사라진 로랑은 예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우선 얼굴에 찍혔던 낙인이 사라졌다.
“로랑 세라두.”
“라……모나.”
심지어 말도 하게 되었다. 라모나가 상처 많은 로랑을 완전히 치유해 준 것이다. 이내 마리아는 노라를 시켜 로랑의 손에 손거울을 가져다주게 했다. 로랑은 손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곤 귀신이라도 본 양 놀라더니 몸을 떨었다. 털썩- 로랑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오열했다. 그러다 아무렇지도 않게 눈물을 닦곤 라모나에게로 다가갔다.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는 거잖아.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면 실수 따위 안 하고 싶을 뿐이야.”
로랑은 모호한 말로 제 잘못을 인정했다. 하지만 미안하다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이내 로랑은 마리아에게로 다가가 세라두 백작 영애가 다시 돌아온 양 무릎을 굽혀 인사했다. 아주 고고하고 기품 있는 자세로.
“황후님, 후회하고 있습니다.”
“네가 내게 저지른 일에 대해서 말이냐?”
마리아의 직접적인 질문에 로랑의 표정이 매우 복잡했다. 그녀는 조금 망설이는가 싶더니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애초에 어떻게든 랑데스 제국의 황후가 돼야 했는데……. 굳이 라스토니아까지 갈 필요가 없었어요.”
“하!”
마리아는 저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렸다. 역시 로랑다운 말이었다. 사람의 천성은 쉽게 변하지 않지. 죽어도 제 입으로 잘못을 인정하고 용서를 구할 위인은 아니었다. 하지만 말로 하지 않아도 느낌으로 알 수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로랑은 진심으로 후회하고 있었다. 그 과거에 자신이 저지른 만행도 포함되면 좋으련만.
역시 인간은 감정을 겉으로 드러내야 진짜 속내를 아는 법이었다. 마리아는 로랑을 향한 미움이 제 안에 크게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이렇게 대면하지 않았다면 평생 그녀를 증오했을 터. 하지만 조금은 달라진 로랑을 보니 그간 쌓아 놓았던 미움이 해소되었다.
“헨리는 죽었어. 선황후도 죽었고…….”
로랑은 놀라는가 싶더니 곧 평정심을 되찾았다. 그러곤 아주 조심스레 물었다.
“황후님, 제 아들 윌리엄도 죽었나요?”
“후!”
마리아는 이제야 제 아이를 찾고 염려하는 로랑을 보곤 길게 숨을 내쉬었다. 가슴 한편으론 로랑이 제 아이를 잊었으면 어쩌나 조마조마했었다.
“노라.”
“예, 왕비님.”
마리아의 명에 노라는 잠시 방을 나서더니, 아이를 데리고 다시 나타났다. 로랑은 노라의 손을 잡고 걸어오는 윌리엄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윌……리엄.”
로랑의 떨리는 입술을 비집고 아이의 이름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로랑은 그 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눈물만 흘릴 뿐.
“제가 무슨 염치로.”
그녀는 손으로 눈물을 훔치더니, 애써 윌리엄한테서 시선을 돌렸다. 감히 엄마라고 나서기가 두려웠다.
“로랑, 네가 원한다면 윌리엄과 함께 살 수 있도록 해 주마.”
“예?”
“물론 헬랜드가 아닌 다른 왕국으로 가야겠지.”
마리아는 모자 사이를 갈라놓고 싶지 않았다. 제 아이를 못 보고 사는 건 너무 슬픈 일이니까. 그래서 로랑이 원한다면 어느 나라든 이주해서 아이와 잘 정착할 수 있도록 지원할 생각이다.
“싫……습니다.”
로랑은 마리아의 제안을 거절했다. 어찌나 단호한지 되묻기가 쉽지 않을 정도였다.
“싫어?”
“예, 싫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