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화
로랑은 격해진 감정을 가라앉히며 차분하게 이야기했다.
“저 같은 어미는 윌리엄의 앞길을 막을 뿐입니다.”
“심사숙고해.”
마리아는 진심이었다. 자신은 아이를 잃은 것만으로도 상실감을 감당할 수가 없는데, 버젓이 제 아이가 눈앞에 있는데 어미이길 포기한다니. 아이의 미래를 위하는 마음은 이해하지만, 많은 고민이 필요한 문제라고 여겼다.
“아뇨, 차라리 윌리엄이 저라는 존재를 모를 때 헤어지는 게 옳습니다.”
“그게 현명할지도 모릅니다.”
내내 입을 다물고 있던 노라가 윌리엄을 번쩍 안아 들며 말했다. 그사이 아이와 정이 들었는지 노라와 윌리엄은 누가 보아도 모자처럼 보였다. 그때 윌리엄이 손가락을 입에 넣더니 노라의 품에 기대며 옹알거렸다.
“마마.”
“우리 아들, 졸리는구나.”
“!?”
로랑은 그 광경에 사뭇 놀라는가 싶더니 이내 차라리 잘되었다는 표정을 지었다.
“저는 어디로든 가겠습니다. 윌리엄만 키워 주세요. 이왕이면 잘…….”
부탁도 로랑다웠다. 그녀는 결국 사과의 말은 하지 않았으나, 이 정도도 로랑에겐 크나큰 용기였다. 그녀가 진심으로 참회를 했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로랑에게 변화가 있었던 건 확실했다. 그렇다면 이제 제 미움을 해소할 차례였다. 더는 로랑을 증오하며 제 감정을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 마무리를 지어야겠지. 마리아는 잠시 고뇌에 빠졌다.
‘무엇이 옳을까.’
“혼인도 하지 않은 젊은 여자의 사생아보다는 그냥 제 아이로 키우겠습니다.”
“노라.”
노라의 목소리에 불안감이 역력했다. 마리아는 노라와 품에 안긴 윌리엄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이제 겨우 안정을 되찾은 아이를 노라에게서 빼앗아? 아니지, 친모에게 보내 주는 것을. 여하튼 윌리엄은 갑작스러운 변화에 많이 힘들어할 터. 하지만 마리아는 로랑을 여전히 믿을 수가 없었다. 제 아이에 대한 미련은 언제든지 생겨날 수 있을 테니까.
“로랑, 그럼 윌리엄에 대한 너의 기억을 지워도 되겠느냐?”
그녀가 과거에 저질렀던 만행을 지워 주는 건, 너무 쉽게 면죄부를 주는 일. 마땅히 하지 않을 참이다. 하지만 로랑에 대한 제 믿음이 확고하지 않기에 윌리엄에 관한 일은 깔끔하게 마무리를 짓고 싶었다.
“예……? 예. 상관없습니다. 아니, 저도 좋습니다.”
“두 번 다시 돌이킬 수 없으니 잘 생각하고 답해야 해.”
“저는 황후님을 시기하고 질투했지만, 황후님의 인품은 믿습니다. 누구보다 제 아이를 잘 키워 주시리라는 것을요.”
로랑은 그것으로 자신의 대답을 갈음했다.
‘눈물 나게 고맙네.’
마리아는 씁쓸하게 웃었다. 로랑을 알아 오면서 남을 칭찬하는 듯한 말은 처음 들었기 때문이다. 이내 마리아는 라모나를 곁으로 불렀다. 어느새 라모나는 보라색 머리를 한 요정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라모나, 로랑의 기억에서 윌리엄에 관한 것만 지울 수 있어요?”
“그럼요.”
“라모나, 기억을 지워 줘요.”
마리아는 훗날 야기될 수도 있는 혼란을 막기 위해 이 방법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라모나는 마리아의 지시대로 로랑의 많은 기억 중에 윌리엄에 관한 것만 지웠다.
* * *
어느덧 석 달이 지났다. 마리아는 군터의 옷매무시를 정리해 주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었다. 군터는 마리아가 예전으로 돌아와서 이제야 겨우 안심했다. 마리아가 꿋꿋한 척했으나 얼마나 힘든 시간을 보냈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터였다. 한 번은 새벽녘에 일어나 베개를 든 채 숨죽여 오열하는 모습에 함께 끌어안고 운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시간은 인간의 고통을 옅게 만들어 주는 마법이 있는지 하루하루가 지날 때마다 그녀의 아픔도 치유되어 갔다.
“오늘이라고?”
“네, 에로가 동굴에서 나오는 날이에요.”
“과연 여자가 됐을까?”
“그러게요.”
마리아가 사뭇 긴장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군터는 얼마 전에 스톤이 라모나를 심하게 꾸짖는 광경을 본 터였다.
[라모나, 내 허락도 없이 이렇게 큰 일을 벌이면 어떡해?]
[스톤 님은 쿨쿨 주무시기만 했잖아요?]
[성을 변환시키는 게 그렇게 간단한 줄 알아? 잘못하면 여자도 남자도 아닌 기형적인 인간이 될 수도 있단 말이야.]
[마도서에 나온 대로 했고 실제로 실험도 했단 말이에요.]
[라모나, 너의 최대 단점이 무엇인 줄 알아?]
[너무 예쁜 거요?]
두 사람이 티격태격하는 광경에 실소를 금치 못했었다. 하지만 굳이 끼어들지는 않았다. 그런데 스톤의 말이 아직도 귀에 생생했다.
[순무, 사슴 고사리 그리고 하나가 빠졌어.]
[그……럴 리가 없는데요?]
[아세롤라가 빠졌다고. 너 마도서 꼼꼼하게 안 읽었지?]
그제야 라모나가 마도서를 이리저리 넘기며 확인하곤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어떡해. 난 몰라잉!]
군터는 그런 얘기는 마리아에게 하지 않을 참이다. 그녀의 기대에 찬물을 들이붓긴 싫으니까. 어쩌면 라모나의 실험이 성공할 수도 있고.
“군터, 얼른 가요. 곧 정오가 될 거예요.”
마리아는 군터의 손을 잡아당기며 재촉했다. 하지만 군터는 저와 그녀를 감싸는 평화를 좀 더 만끽하고 싶었다.
“마리아, 그거 알고 있나? 내게 종교가 생겼다는 거 말이다.”
“종교요? 그럴 리가요? 할아버지를 좋아하면서도 그 종교는 따르지 않으면서…….”
“아니, 나는 따로 믿는 종교가 있어.”
“뭔데요?”
“음, 너무 쉽게 말해 주면 재미없지.”
“치- 뭐야? 사람을 궁금하게 해 놓고?”
두 사람은 손을 잡고 본궁을 나섰다. 정오가 되면 에로를 다시 만날 수 있기에 시간 맞춰 그곳으로 가야 했다. 한데 언제 이렇게 날씨가 더워졌는지 모르겠다. 왕궁의 정원에 꽃이 만발하고 나무는 푸르렀다. 마침 그곳에서 솔샤르를 만났다. 청명한 오늘 날씨와 달리 그의 얼굴에는 늦가을의 서늘함이 역력했다.
“떨리느냐?”
군터가 짓궂게 놀리자, 그는 어색한 웃음으로 갈음했다.
“송구합니다. 저 먼저 가 보겠습니다.”
솔샤르는 군터와 마리아한테 신경 쓸 겨를이 없는지 인사만 하곤 서둘러 사라졌다. 지금쯤이면 스톤과 노라, 라모나는 벌써 동굴 앞에서 진을 치고 있을 터.
마리아와 군터는 다급하게 걸어가는 솔샤르의 뒷모습을 한동안 바라보다 서로를 마주 보았다.
“군터, 어서 말해 줘요, 나 몰래 신봉하는 종교가 무엇인지?”
“나는 여신을 믿는다. 숭고하고 아름다우며 자애로우신 분.”
“여신?”
왠지 기분이 좋지 않았다. 왜 하필 여신일까. 군터와 어울리지 않게. 아주 잠깐이었으나 그녀가 떠올랐다.
“왜요? 사만타처럼 농염한 여신인가요? 아니면 마녀인가?”
마리아가 입술을 삐죽거리며 투덜대자, 군터는 좋아서 히죽거렸다. 이렇게 마리아가 질투를 해 주면 왜 자신은 바보처럼 웃음이 나는지 모르겠다. 아니, 좋아서 미칠 것만 같았다. 반면 마리아는 군터와 사만타가 키스했던 광경이 떠오르며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까맣게 잊은 줄 알았건만, 그가 여신을 믿는다는 소리에 옛 기억이 울분으로 되살아났다.
그때였다. 군터의 커다란 손이 마리아의 두 뺨을 부드럽게 어루만지곤 입술을 덮어 버렸다. 이내 달콤하지만 끈적하고 아주 농염한 키스가 이어졌다. 화를 내다가도 이렇게 입술만 맞대면 몸이 알아서 움직였다. 짙은 속눈썹 사이로 몽롱하게 풀린 눈동자, 풍성한 붉은 머리를 마구 헤치는 가늘고 하얀 손가락, 마리아는 군터에게 더 많은 애정을 갈구했다.
군터는 가냘픈 마리아의 몸을 제게로 바짝 밀착시켰다. 그녀가 알까? 마리아와 함께하는 매시간이 제겐 기적이라는 것을.
“답을 알려 줄까?”
오랜 키스 후에 군터가 나직한 어조로 말했다.
“알려 줘요.”
“나는 마리아교를 신봉한다.”
“네? 마……리아교?”
“내게 여신은 마리아밖에 없거든.”
군터의 얼굴이 너무 진지해서 웃을 수가 없었다. 그저 기분 좋아지라고 하는 농담 같지도 않았다. 진짜 그런 종교를 믿는 신자처럼 진지해서 마리아는 한동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얼버무리기만 했다. 한데 왜 이렇게 심장이 쿵쾅거리는 걸까.
“마리아는 내게 종교다.”
“군터.”
어떻게 이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마리아의 하늘빛 눈동자에 맑은 눈물이 차올랐다.
“언제부터 믿었는데요?”
마리아는 눈물을 쏟는 중에도 웃으며 물었다. 아주 능청스럽게…….
“마리아를 처음 만난 순간부터였지. 세상에 이런 사람도 존재하는구나 싶었다. 내 눈에는 천사로 보였거든.”
그렇게 꼬박 10년간 마리아는 제 삶의 목표였으며 종교였고 고단한 여정을 끝낼 수 있는 천국이었다.
“군터 플레이슬리.”
“응?”
“사랑해요.”
마리아는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이 그것밖에는 없었다.
“믿지 않겠지만, 나는 열일곱, 마리아는 열다섯 살 때부터 사랑했다. 물론 심장을 뛰게 하는 감정이 사랑이란 것을 조금 늦게 알았지만.”
그저 욕심인 줄 알았다. 살면서 가져 보지 못한 것에 대한 열망이라 여겼으나, 매 순간 잊히지 않는 마리아를 떠올리며 알게 되었다. 자신이 아주 지독한 사랑에 빠졌다는 것을.
“죽어서도, 아니 다시 태어나도 당신을 사랑할 거예요. 각오해요, 군터.”
“나는 마리아교의 유일무이한 신자니까.”
두 사람은 다시 입 맞췄다. 마침 종탑에서 정오를 알리는 종이 울렸다. 두 사람은 키스의 여운을 느끼며 서로를 향해 빛처럼 웃었다.
“가요. 다들 기다리겠어요.”
“그래야지.”
“에로가 여자가 되었으면 좋겠는데…….”
“흠……!”
“뭐예요? 그 반응은?”
마리아는 군터와 있는 순간순간이 감동이었다. 그와 함께라면 제게 어떠한 고난이 닥쳐도 다 이겨 낼 수 있었다. 어느새 제 안에 존재하던 두려움이 사라졌다. 굳이 하나를 꼽자면 군터가 없는 세상일 터. 하지만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이미 그와 약속했다. 생사를 함께하자고. 그리고 소중한 사람들이 곁에 있으니, 앞으로 제 행복은 완성형이 될 테지. 아니라면 그들과 노력하며 가꿔 가면 될 것이다.
<폐황후 마리아> 본편 마침.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