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화 〉우주
모니터에서 뿜어져 나온 빛 때문에 눈을 찌푸렸다가 다시 눈을 떠보니 나만의 작은 아지트 같던 월세 방이 아닌 낯선 공간이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어두컴컴한 곳 같은데 손을 뻗으니 금방 벽에 닿았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건가 싶어 일어서 보려고 하니 머리가 천장에 부딪히는 듯 했고
일단 내 방은 아닌 것 같아서 손을 마구잡이로 두들기다 보니 버튼 같은 게 닿는 느낌이 들어 그 부분을 몇 번 더듬다보니 갑작스럽게 빛이 펼쳐졌다.
"우와.."
원래 내 방에 앉아있는 거였다면 모니터가 있었을 자리에 넓고 투명한 창이 비춰져 보였다. 이게 그 커브드 모니터인가 싶었는데 가까이서 보니 알겠다. 이건 창문이다
그리고 여긴... 우주?
창 너머로 보이는 건 은은하게 빛나는 별들과 검고 넓은 우주 공간.. 매번 기껏해야 pc 잠금 화면으로 해두었던 별들을 이렇게 볼줄이야
"커다란 별이 반짝였다 사라졌다 하고 있어. 커다랗네 혜성인가..? 그런데 여기 너무 좁은데. 누구 없어요? 꺼내주세요"
... 한번쯤 우주를 가까이에서 보면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그런데 목소리가 왜 이렇지 졸다가 깬 것처럼 갈라지는듯 얇은 목소리가 난 것 같았다.
[음성 제어를 인식. 사출 시퀀스를 활성화합니다]
어? 뭐? 설마 방금 꺼내달라고 농담으로 한걸 받은 걸까.
창문 아래 쪽 무언가 패널이 달린 것 같은 곳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사출을 시작합니다. 제어장치에서 손을 놓지 말아주세요.]
되돌리긴 늦은 것 같았다.
사출을 시작한다는 말에 허겁지겁 제어장치라는게 무언가 찾다가 이제야 앉은 곳 양 옆에 무언가 스틱 같은게 달린걸 확인했다.
[3...2...1 사출합니다.]
"...!"
순식간에 몸이 뒤로 쏠리며 앞으로 가속한다는걸 느꼈다.
고속도로에서 세게 밟아도 이런 느낌은 아닐 텐데 마치 유원지에서 롤러코스터를 탈 때 같은 느낌이었다.
눈앞에 펼쳐져있던 우주가 가운데로 뭉쳐지듯 쏠려 보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마치 대포에서 쏘아져 나가는 듯 한 느낌이었는데 너무 빠르게 가속하는 탓에 내가 어디서 쏘아져 나가는 것인지 뒤를 돌아봐서 확인조차 할 수 없었다.
아마 우주였다는걸 생각하면 SF영화의 우주선에 종종 나오는 탈출포드같은게 아니었을까
발사된 곳을 등진 채 뒷머리가 시트에 닿는 느낌을 받으며 한참을 가속되던 중 눈앞에 푸르른 배경이 보였다.
처음 보는 광경일 테지만 어딘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지구.."
눈앞에 보이는 푸른 배경은 지구의 바다였다.
단지 다른 점은 푸른 배경 위에 조그맣거나 커다란 붉은 원이 몇 군데씩 있다는 것 뿐이겠지
그렇게 탈출포드 같은 것 속에서 멍하니 지구를 바라보자 앞에 달린 창문이 붉게 가열되었다. 대기권에 들어온 걸까.
[스태빌라이저 과열중.. 온도 과열로 인해 항해 기능을 일시 중단합니다]
어???? 어?? 스태빌라이저 라는건 안정장치지 ?? 그리고 항해 기능을 중단한다고? 그게 멈추면 큰일나는 거 아니야??
대기권을 뚫고 오는 중이라 그런 걸까 마찰열로 탈출포드에 이상이 생긴 것 같았다 앉고 있던 좌석도 덜컹덜컹 흔들리는 게 크게 느껴져왔다
"항해기능 재시작! 리부팅! shutdown! start!"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에 마구잡이로 그럴싸한 명령어를 몇 개 뱉어봤다 아까 꺼내달라는 말 가지고 사출을 시작한 시스템이니 요령껏 알아듣겠지!!
[과열로 인해 항해 기능을 재시작 할 수 없습니다.]
"안 돼!! 아멜리아..!"
아니 지금은 단말마 같은걸 뱉을 때가 아니다. 이것도 해보고 싶은 말이었지만... 애초에 아멜리아가 누군지도 몰라
항해 기능이 안 된다면 다른 기능이라도 제공되는 게 있겠지?
"비상장치! 안정화! 일시중지!"
[비상 구명 모듈이 설치되어있지 않습니다. 모듈에 대한 설정은 모드 제어 기능을 참조해주세요]
아니 구명 모듈이라는 게 설치가 안돼있으면 왜 알려주는거냐고 희망 고문도 아니고..
"다른 모듈! 다른거!! 아무거나!! 다른 거로 바꿔봐! 우와아아아아!!!"
어느새 푸르게 보이던 창 너머는 하얀 구름 속을 지나 점차 도심이 보이기 시작했다.
[모드 변경 요청을 확인했습니다. 코쿤 모드에서 사도 모드로 전환 합니다]
사도???
아무렇게나 외친 소리였는데 적당히 인식된 게 있었나보다 덜덜 떨리던 포드가 잠깐 제자리에서 멈춘 듯 하더니 파각 하고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사도 모드 기동. 수동 조작으로 이행합니다. 스태빌라이저 비활성 확인.. 자세 제어를 주의해주세요]
눈앞에만 보이던 창이 포드에서 무언가 떨어져나가면서 양옆으로 시야가 더 넓어졌다. 마치 전투기의 조종석에서 보는 듯 한 풍경인데.
"뭐야 이거 손이야?"
넓어진 창의 양쪽 옆에서 보이는 건 하얗고 거대한 팔이었다.
내가 아까부터 쥐고 있던 스틱을 조금 움직이자 스틱의 움직임에 연동되는 듯 팔이 조금씩 움직이는게 보였다.
"오.. 신기해. 아니 이럴 때가 아니지"
아까부터 들려오던 목소리가 자세 제어를 주의해달라는게 생각났다.
다급하게 스틱을 움직이자 내가 마치 공중에서 허우적 거리는 듯한 모양세가 되었다.
이제 작게 보이던 도시가 점차 가까워져가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도심 한가운데 떨어질 것 같은데 그러면 나도 도시에 사는 누군가도 큰일 나겠지..
열심히 스틱을 흔들어대자 진로가 바뀌는 것인지 몸체가 기울어져서 도시를 벗어나는 게 보였다.
이대로 낙하해도 큰 충격을 주지 않을 곳이 어디 있을까 살펴보니 도시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저수지가 보였다.
저기라면 사람도 근처에 없고 괜찮겠지. 그렇지만 이대로 떨어지면 아마 머리나 몸통부터 떨어질텐데..
스틱이 팔을 제어하는 거라면 바닥에는 발을 제어하는 게 있겠지 싶은 생각에 발을 마구잡이로 놀리다보니..
정답이었다. 발쪽에 밟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었다.
양발의 무언가를 밟자 창문 끝 구석에 하얀 발 같은게 보였다.
공중에서 허우적거리며 떨어지는 모습이 아닌 발을 통해 천천히 내려오는 것을 이미지하며 발을 내렸더니 내가 타고 있던 팔다리 달린 포드가 상상한 이미지대로 강하하는 게 느껴졌다.
아 이거 포드가 아니라 탑승형 로봇이구나..
이제 주먹만 한 크기로 보이던 저수지가 완전히 가까워져서 눈앞에 물 밖에 보이지 않게되었다.
"떨어진다!!!"
최대한 발부터 착륙하려는 움직임에 물 끝에 발이 닿았다.
이대로 빠지면 속도가 줄어들어 물속에 착륙할거라고 생각했다.
"어어?? 어?"
물위에 기체의 발바닥이 닿자 물속으로 빠지는 것이 아니라 물위를 걷듯 발바닥 끝에서 공기를 쏘듯 물위를 튕기는 것이 느껴지더니 옆으로 쭉 미끄러지며 커다란 물보라를 일으켜가며 기체의 옆면을 저수지의 물로 적시기 시작했다.
그렇게 한 십초 정도 물위를 미끄러져 달려 나가더니 속도가 제법 줄어든 듯 대기권을 통과하는 동안 과열되었던 유리창의 색이 점점 돌아오면서 시트에서 목을 때어낼수도 있게 되었다.
-콰과곽... 콱!
하지만 목을 때어내자마자 바로 다시 시트에 머리가 처박히면서 기체가 한 바퀴 뒤집히는 느낌을 받았다.
큰 소리와 함께 드디어 착륙에 성공한 것인지 흔들림이 멈췄다.
다행히 대기권 돌입중에 타들어가서 별부스러기 마냥 사라지는 일은 없었네..
[□□에 도착했습니다. 자동 항법장치를 종료합니다.]
어디에 도착했다는 말은 노이즈가 낀 것처럼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뒤의 안내는 똑바로 들을 수 있었다.
"하.. 드디어 우주에서 지구로 돌아온 건가.. 내리고 싶은데.. 해치? 콕핏? 오픈"
내가 타고있는게 메카가 맞다면 적당히 이렇게 말하면 알아서 열리겠지
-푸슈욱
대충 찍은 명령어와 함께 조종석의 윗부분이 열렸다.
열린 틈 위로 팔을 올려 상반신만 밖으로 빼보니 아까 착륙이 엉망진창 이었던 듯 저수지 옆의 땅 위에 웅크리듯 처박힌 자세가 되어서 내리긴 쉬울 것 같았다..
높이도 2층 높이가 안 되는 높이고 내 키가 백칠십 정도니 이 정도면 뛰어내려도 조금 발만 얼얼하겠지..
"하나.. 둘!"
-툭
흙바닥을 향해 발바닥을 향해 폴짝 뛰자 조금 얼얼할 거란 예상과는 다르게 굉장히 사뿐히 내려올 수 있었다.
아저씨 무게감이면 툭이 아니라 쾅일텐데
땅으로 내려오고 나서야 뒤를 돌아보니 내가 방금 전까지 타고 있었던 포드.. 아니 기체를 볼 수 있었다.
새하얀 거인. 머리 양 옆으로 자리잡은 커다란 두개의 뿔. 거대한 주먹과 다르게 유선형으로 보이는 몸체.
하반신은 이쪽에서 보이진 않지만 크긴 크겠지.. 그래도 엄청 거대한 것은 아니고, 땅에 박힌 팔을 기어올라서 다시 조종석 까지 들어가긴 쉬울 것 같았다.
조금 현기증이 느껴진 탓에 한 손으로 머리를 짚자 손가락 사이로 무언가 사락하는 느낌이 들었다.
뭐야 이건 머리카락? 이발한지 좀 되긴 했지만 이정도로 길진 않았을텐데..
손가락 사이로 걸리는 머리카락을 더듬자 길이가 제법 되었다. 앞머리일 텐데 귀를 살짝 넘는듯한 길이감.
손끝으로 머리카락 끝을 집어보니.. 하얀색에 가까운 빛을 내는 ... 은발이었다.
서른 넘어서 은발이라니 아니 이건 그냥 허옇게 산거 아닌가?
아까 낙하의 충격 탓에 공포감을 느껴서 머리가 새어버린건가 싶어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꺼내 얼굴을 확인하려 했지만 지금 보니 옷도 집에서 입던 후줄근한 츄리닝이 아닌 얄쌍한 디자인의 슈트.. 흔히 우주에서 입을법한 의상이었다.
이 옷 주머니도 없고.. 핸드폰도 없다. 무엇보다 이상한건 내 후덕한 배는 어디가고 이 얇아빠진 허벅지는 대체 뭐란 말인가...
어디 모습을 확인할 곳이 없을까 살펴보니 흔들림이 멈춘 저수지가 비치는 것을 보곤, 겁도 없이 물 가쪽으로 내려가자 그 곳에 비춘 내 얼굴을 볼 수 있었다.
아까 손끝으로 집어 확인한 은발이 달빛을 받아 살짝 반짝이고 있었다.
그리고 눈은 붉은색.. 야근을 통해 피로가 쌓여서 충혈 된 눈이 아니라 홍채가 정말 붉은색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충격적 이었던 건 물가에 비춰지던 것은 아저씨가 아니라 하얀 슈트를 입은 여자아이였다는 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