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화 〉내려오다
물가에 비춰진 하얀 파일럿 슈트를 입은 은발의 여자아이
물가에 무릎을 꿇고 내려 보던 자세 때문인지 긴 머리가 머리 앞으로 쓸려 내려왔다. 그 표정은 당황만 가득한 얼굴이었다.
이게 정말 내 얼굴이 맞는 건가 싶어서 땅을 짚던 손 하나를 들어 얼굴을 매만져보자 피부에 닿는 느낌과 함께 물가에 비친 여자아이가 당황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게 '이게 정말 내가 맞구나' 하고 오히려 납득하게 되었다..
여기까지 기억을 정리하자면.
1. 나는 퇴근 후 개발을 도와주던 게임의 소스를 빌드했다.
2. 빌드 후 테스트를 위해 실행파일을 눌렀다.
3. 모니터에서 빛이 났다.
4. 눈을 떠보니 우주였다.
5. 말실수로 지구로 떨어졌다.
6. 사실 타고있던게 메카였다.
7. 착륙하고 내렸다.
8. 물가로 가서 얼굴을 봤더니 여자아이가 되어있었다.
아마 내가 마지막까지 아저씨 였던건 1~3 까지 였겠지 보통 사람이라면 패닉에 빠져서 난리를 쳤을지도 모르겠는데 오히려 머릿속에선 생각이 깔끔하게 정돈되었다.
이건 그거다.
자기가 개발하던 게임속 캐릭터가 되었다는 그런거 출근길에 틈틈이 읽은 웹소설이나 라노벨 덕분에 이런 상황은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미소녀가 된 것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범위다.
매일 구부정하게 노트북 앞에서 잔버그나 잡느라 허리 디스크가 걸린 아저씨보다는 젊고 가벼운 몸이 훨씬 좋다.
시험 삼아 한쪽 발을 세운 채 다른 발을 뒤로 쭉 뻗어보았다.
오 원래 사람 다리가 이렇게 잘 올라가는 거였나? 발끝의 저릿함도 사라진 게 디스크도 정말 사라진 것 같았다.. 아니 애초에 없었다고 봐야지
그러나 납득할 수 없는 점은 딱 한가지였다.
분명 최종 완성 전까지 모든 시나리오, 설정의 내용도 읽어봤었는데 이런 기체는 설정에 없었다. 지금 내가 깃들게 된 이 가벼운 여자아이도 그렇고..
뒤를 돌아서 방금 우주에서 타고 내려왔던 기체 주변을 천천히 걸으며 살펴봤다.
파일럿의 실력 미숙으로 땅에 배를 대고 엎드려 나자빠진 꼴이지만 표면에 흙먼지가 조금 묻은 것 말고는 외관상의 손상은 없는 것 같았다.
단독으로 대기권 돌입...
다른 창작물에서 우주 전투중 지구에 너무 가까이 가버린 나머지 지구의 중력에 이끌려 그대로 대기권에서 폭발해버리는 경우도 많았는데 아무런 손상없이 내려왔다는 점은 말 도안되는 내구성을 가진 기체라는 걸 증명해주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원래 작성된 시나리오에서 우주는 등장하지 않았다.
지구 곳곳에 열린 다른 차원의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오는 괴물을 상대하거나 범법자 집단을 상대로 전투를 하는 게 주 시나리오였지, 우주에서 오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체의 디자인도 내가 알고 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주인공 세력은 약간 각진 디자인을 기본으로 같은 회사에서 개발했다는 설정을 따라 각 기체별로 커스터마이징 된 부분이 조금씩 있긴 하지만 전부 비슷한 디자인이었다.
적 세력은 게이트에서 넘어온 괴물을 소재로 제조해서 인간형이 아닌 발이 여러 개 달리거나 동물의 골격을 한 기체가 많았다.
몇몇 정예기체는 인간형이지만 주인공 세력과는 다른 회사에서 개발되어서 인간형이라도 느낌이 달랐다.
딱 그런 느낌이다 이거 나쁜놈이네 싶은 디자인.
하지만 내가 타고 내려온 기체는 그 두 세력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디자인이었다.
머리는 둥근 가면을 얹은 것처럼 사람의 얼굴로 치면 코끝 부분까지 곡선형의 헬멧이 내려와 있었다.
그 양옆으로 안테나 역할을 하는 것 같은 긴 뿔이 머리 뒤로 뻗어있었는데...
자세히 보니깐 오른쪽 뿔은 끊어진 건지 아니면 원래 저런 비대칭 디자인인건지 한쪽이 다른 쪽의 절반정도 되는 길이밖에 오지않았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둥근게 로봇이라기 보단 사람의 얼굴같은 느낌을 하고 있었다.
그 아래에 달린 몸체는 방금 내가 내렸던 곳인지 머리와 목 뒤 사이가 열려있었다. 가슴 쪽은 조금 큰 갑옷을 걸친 느낌이고 어깨 양옆으로 작은 보호대가 달려있었다.
거기서 가장 눈에 띈건 어깨로부터 내려오는 양 팔이었다.
팔의 상완부는 곡선이었지만 하완부는 크고 두꺼웠다. 거의 상반신에 맞먹을 정도로 커다란 팔이 달려있었고 그 아래에 달린 손도 거대했다.
양 주먹위로 건틀렛을 낀 것처럼 두꺼운 보호 장비가 달려있었고 가운데에는 수정같은게 달빛을 받아 잔잔히 반짝이고 있었다.
양주먹은 거의 머리보다 큰 수준이었는데 손가락이 건틀렛 손등에 거의 가려진 걸보니 근접격투용 기체인가 싶었다.
조금 더 옆으로 걸어 기체의 하반신을 살펴보자 상체로부터 내려온 허리 부분은 가늘지만 탄탄해보였다.
그 밑에 자리 잡은 골반쪽도 제법 튼튼해보였고 골반 아래에 달린 허벅지는 살짝 각진 느낌이었다.
허벅지 아래로 뻗은 다리는... 인간형의 다리가 아니었다.
허벅지 아래로 내려온 종아리는 길지 않고 짧았지만 발이 앞으로 길게 뻗어 있었다.
이제야 이 기체의 디자인 컨셉이 뭔지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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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다.
달에서 두발로 걸으면서 떡방아를 찧는 토끼가 딱 이런 느낌이겠지
기체도 토끼인데 설마 파일럿도 토끼 수인같은건 아니겠지 하고 양손을 올려 내 머리 위를 더듬어봤지만 다행히 토끼 귀 같은건 없었다. 내 귀 두 짝도 얼굴 옆에 잘 달려있었고.
귀가 4개면 이어폰을 두 세트나 사야하잖아.
게임 속으로 들어오기 전에 개발자군과 나누었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내 취향의 은발 캐릭터를 넣어주겠다던 이야기였는데 아무래도 지금 내가 깃든 여자애가 그 캐릭터인 것 같다.
우호옷 내 취향의 미소녀에 이런 특이한 기체냐고 이러면 설렐 수밖에 없잖아... 라며 생각하기엔 내가 직접 그 미소녀가 되는 건 바란게 아니었는데...
이제 자아성찰은 그만 할 시간이다.
다시 한 번 정리하자면.
토끼를 닮은 소속불명의 기체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온 은발의 붉은 눈을 한 미소녀
그게 지금의 나다.
그리고 이 게임의 배경은 현대 21세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지만 게이트 덕분에 괴물이 나타나서 도시를 파괴하는 세계관이다.
그러면 하늘에서 무언가 저수지로 떨어져서 소동을 일으켰는데 아무런 반응도 없을 리가 없다.
분명 상황을 확인하고 수습하기 위해 도시를 지키는 주인공 세력이 등장할거다.. 지금 만나봐야 수상한 취급만 받으면 양반이고 열에 아홉 정도로 새로 나타난 적으로 간주하겠지.
아직 내가 어떤 캐릭터인지 모르고 이 기체도 어디 소속인지 모르고 있는데 정보가 적은 채 심문을 받는건 피하고 싶었다.
생각을 마치자마자 저수지 반대편에서 헤드라이트를 켠 차량이 달려오는게 보였다.
이럴 땐 우선 도망이지.
다시 기체 앞으로 달려와서 팔을타고 기체의 등 위로 오르려하자 기체가 스스로 움직여 타기 좋게끔 유도해주었다.
- 툭
미소녀 바디라는 건 정말 가볍구나.
목 뒤로 열린 조종석 입구로 단숨에 점프하듯 시트에 앉았는데 털썩이나 톽 같은 소리가 아니라 툭 같은 가벼운 소리가 나는게 벌써 두 번째인데도 신기했다.
기체에 앉아보니 조종계통도 알고 있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복잡한 전선과 버튼들, 그리고 모니터가 달려있는 기본 조작계도 아니고 생체 부품 같은... 그런 기분 나쁜 조작계통도 아니라..
미니멀리즘을 추구한 듯한 양 팔을 뻗으면 닿는 상아색의 도자기 같은 컨트롤 스틱과 피아노의 페달과도 같은 발판, 그리고 가슴 앞쪽에 있는 몇몇 심플한 버튼과 조금 푹 꺼진 수납칸 같은 공간이 보였다.
그런 건가 모과 같은거 하나 놔두라고 차 앞에 비워져있는 그거...
앞으로 이 세계에서 종종 타고 다닐 기체 같은데 모과향은 조금... 차멀미 날거 같다.
그런데 탑승한건 좋았는데 기동은 어떻게 하지 전원으로 보이는 게 있는것도 아니던데 착륙할 때 음성인식 기능이 달렸던 게 생각나서 적당히 말해봤다.
"스타트, 기동, Hello World!"
미소녀 목소리로 헬로 월드라니 한번쯤 들어보고 싶었다. 이제는 내 목소리지만.
조금 애 같긴 한데 예쁜 목소리였다.
[파일럿을 확인. 사도를 기동합니다.]
[스태빌라이저 자가 복구 완료. 항해모드를 다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이 기체는 사도라고 불리는 것 같았다.
사도라니 조금 중2병 스럽지만.. 아저씨는 그런거 좋아해.. 이런 설정을 만들어준 개발자군 에게 감사를.
기동을 완료했다는 음성안내를 받자 기체 내부에 은은한 조명이 들어왔다. 약간 잠 잘올것 같은 아늑한 무드등 같은 조명인데
기체 내부의 감상은 나중이다. 일단 이 자리에서 벗어나자.
양 스틱을 천천히 움직이자 기체의 목 뒤에 있던 탑승구가 닫히면서 기체가 손으로 땅을 딛고 섰다.
사도 대지에 서다!
메뉴얼을 찾을 시간도 없다. 어느새 저수지 입구에 도착한 건지 식별 가능할 정도로 차량의 헤드라이트가 점점 이쪽을 향해오는게 보였다.
"스텔스, 은닉화, 숨기기, 숨김, 일단 모습을 감춰줘."
[불가시 요청을 확인. 지금부터 300초간 불가시 모드로 진입합니다.]
정확한 커맨드는 모르겠고 이번에도 적당히 찍어서 맞췄다. 이 자리를 벗어나면 한번 이것저것 테스트하면서 기능을 확인해봐야겠다.
-스스스...
살짝 일렁이는 듯 한 소리가 나더니 전면부의 투명한 유리창과 같은 모니터의 우측 상단에 '불가시 모드 : 남은 시간 295(S)' 라고 적혀있는게 보였다.
이게 남은 시간이겠지
발의 페달을 살짝만 내려서 밟는다는 것이, 분명 에전 몸이었으면 살짝이 맞는데 여자애로 변하면서 키가 짧아져서 그런지 살짝 밟는다는 게 확 밟아버렸다.
-슈우욱... 팍!
튕겨져가는 느낌을 받으며 깜짝 놀라자 어느새 나는 하늘 위에 있다는걸 알게 되었다.
방금까지 있었던 저수지가 조그맣게 보일정도로 높게 올라온 것 같았다.
일단 당장 위기는 피했는데...
기체가 서서히 다시 땅으로 떨어져가는게 느껴졌다.
당분간 숨어있기 좋은 곳이 어디 없을까. 발 아래로 펼쳐진 도시를 살펴보니 여기가 어딘지 알 수 있었다.
게임의 주 무대이자 주인공 세력이 모여 있는 도시였다.
다행히 내가 잘 아는 곳이라 그런지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있었다.
방금 저수지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산 근처.
버려진 창고부지가 있는 곳이다.
주변에서 게이트가 자주 열리고 괴수도 종종 나타나는 탓에 버려진 곳 이라는 설정인데...
사실 그 위치가 바로 전투 데모를 테스트 해보기 좋은 공간이라 그 곳에서 자주 디버깅 하던 게 어느새 설정이 붙어버렸다.
그 곳이라면 한동안 아무도 안 오겠지 하고 스틱을 조금 당긴 채 이번에는 패달을 살포시 밟자 점점 땅으로 떨어지는 속도가 줄어들더니 비어있는 도로 위에 발끝으로 착지하듯 가볍게 내려왔다.
이 무게로 공중에서 떨어지는데 도로의 아스팔트는 금이 가긴 커녕 소음하나 없이 조용히 착지했다.
다시 한 번 페달을 밟자 아까보다는 덜했지만 공중으로 뛰었고 두 번 정도 반복하다보니 목적지인 창고 부지에 도착했다.
한밤중이라 아무도 없는 것을 보고 안도했다.
아직 게이트도 열리지 않은 것 같고 여기라면 내가 이 기체를 파악하고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 고민할 시간정도는 벌 수 있을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