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화 〉내려오다 (4/152)



〈 4화 〉내려오다

창고 부지에 도착한 후 불가시 모드를 껐다.

지금은 창고지만 예전엔 전투기 비행장으로 쓰이기도 했던 곳이라 기체를 숨길만한 폐 격납고도 제법 있는 곳이었다.


계속 숨겨두긴 힘들지 몰라도 잠깐 숨겨두긴 좋겠지..


페달을 사뿐히 내려밟으며 스틱을 뒤로 당기자 서서히 땅으로 내려왔다.

처음 하늘에서 떨어졌을 때의 소음이 대체 무슨 망신이었나 싶을 정도로 정밀한 기체였다.


총 다섯 개의 격납고 중 문이 멀쩡하게 달린 격납고는 세 개.

그 중 가장 왼쪽의 격납고 앞에 서서 굳게 닫힌 문을 기체의 커다란 손을 조작해 조심스럽게 열었다.

-끼이익

버려진 곳이라 그런지 격납고 문 경첩의 녹슬어 부스러지는 소리가 제법 크게 울렸다.
아무도 없는 곳이라 망정이지 누군가 있었다면 바로 들켰을지도 몰랐다.


생각대로 격납고 안은 비어있었다. 게이트가 열리기 전 부터 다른 곳으로 이전한 비행장 부지니깐 아무것도 안남은게 당연하겠지.


격납고 치고는 제법 천장이 높았던 덕분에 거대한 기체로도 몸을 숙이면 아슬아슬하게 들어올 수 있었다.

들어온 뒤 조심스럽게 격납고의 문을 닫고 기체를 조작해 허리를 숙인 어정쩡한 자세에서 한쪽 무릎을 굽히고 다른 쪽 무릎을 땅에 내려 기체를 멈췄다.

현장에서 빠르게 도망친 덕분에 시간은 벌었으니 이제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생겼다.


우선 가장 급한  시간이었다.

내가 게임 속에 들어온  좋은데 과연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들어왔는가, 이미 이야기가 진행 중인 시점이라면 어디까지 진행되었는가. 이미 이야기가 끝난 뒤라면 어느 세력에 붙어야 하는가..


중요한 문제였다.


이제는 좋으나 싫으나 이 세상에서 굴러야 할 텐데 앞가림은 해야하니깐

"시간, 연도... 아무거나 알려줘."

[지금 시간은 현재 시간대를 기준으로 22시 57분. 연도는 2022년 2월 5일 입니다.]

게임의 시작 배경은 2022년 3월 3일. 시작까지 한달 정도 남았다.

흘러갈 스토리는 0.9 버젼을 기준으로 전부 알고 있으니깐 그 시나리오 대로 흘러가면 적당히 앞가림은  수 있겠지.

초반이면 주인공 세력이 탄탄할 시기니 지금은 이 쪽에 붙는 게 가장 좋겠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타고 있는 기체에 대한 정보였다.
정식 버젼으로 등장하면서 나에게 헌정해주기 위해 만든 캐릭터와 기체라는데 정작 내가 알고있는게 없어선 의미가 없다.

"매뉴얼, 문서"

개발 계획서도 잘 정리해두던 편이니 참조할만한 자료 정도는 남겨두었을거다.

-덜컹


매뉴얼을 요구하자 좌석 아래가 툭하고 열리더니 얇고 넓은 대리석 판 같은 게 나타났다.

이걸로  어쩌란 거지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조금 살펴보니 이게 단말기 같은거란걸 알게 되었다.

[ Code : □□□□ - 13 ,
Height : 7.8M,
Weight : 6T,
CORE : NULL,
MODE : Apostle,
Weapon :
Weapon1 : □□□□,
Weapon2 : □□ □□□□□ ,
Weapon3 : null,
Weapon4 : null,
Weapon5 : null
......
.. // 자세한 설명은 네비게이터의 안내를 받을 것. ]

기본적인 기체의 정보가 담겨있었다.


읽기 힘든 노이즈 같은 문자가 보여 읽어보려고 예전 버릇처럼 단말기를 눈앞에 가까이 가져다 댔지만 바뀐 몸은 시력도 좋은 건지 그럴 필요는 없는 것 같았다.

단순히 정말 읽을 수 없는 문자라서 읽지 못한 것 같았다.

무장은 두개 정도 탑재된 것 같은데 어떻게 사용할  있을까. 무게는 지나치게 가벼운데 배경이 되는 시대에 맞지 않는 테크놀로지가 아닌가..


가장 걸리는 점은 코어라는 항목이었는데 이 부분이 비어있다는게 신경 쓰였다.


 게임에 등장하는 기체들은 저마다 코어를 가지고 있다.


게이트에서 넘어온 괴물들의 에너지원이 되는 코어를 추출해서 본래대로라면 움직일 수 없는 기계에 에너지를 공급해 작동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전투에서도 상대의 코어를 먼저 파괴하는  핵심전략인데 코어가 달려있지 않다니.. 자동차로 치면 엔진 없이 운전을 하려는 꼴이나 다름없다.

당장 대기권 강하도 그렇고 여기까지 오는데도 많은 에너지가 소모되었을 텐데..


보조 전원팩을 장착했다고 하더라도 코어가 없으면 당연히 기동조차 되지 않아야 했는데 이 토끼를 닮은 기체는 그런 것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유롭게  곳까지 도망쳐올 수 있었다.


코어가 없는데 이렇게 움직일  있다니... 코어가 달리면 어느 정도의 출력을 보여줄지 상상도 가지 않았다.

그 다음은 좀 전의 기동때도 들었던 '사도' 라는 단어다. 모드 항목에도 당당하게 사도라고 영어로 써있는게 보였다.


무엇을 암시하는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다. 새로 추가 된 설정이겠지..

마지막 줄에 주석으로 남겨놓은 네비게이터.

이건 아마 우주에서 내려올 때부터 안내해주던  목소리를 의미하는  분명했다.

"네비게이터."

[호출을 확인했습니다. 서브 파일럿에서 페어리 모드로 전환합니다.]


기체를 조종할 때의 상태는 서브 파일럿 상태라고 불리는  했다.

조종석 전방 모니터 위쪽의 칸이 조금 열리더니 그 안에서 기체의 조종석과 비슷한 하얗고 매끄러운 원반 같은 게 천천히 이쪽을 향해 비행하며 내려왔다.


"음... 안녕?"

이 원반이 네비게이터의 본체인  같은데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손가락으로 그 원반을 툭 쳤다.

[안녕하세요 마스터. 이 모습으로 보는  처음이네요.]

원반이 주변을 조금 빙글 돌더니 부드러운 여성의 목소리로 나의 인사에 화답했다.

"지금 기체의 상태와 파일럿의 상태... 내 상태를 체크해줄래?"


[인사만 나누고 바로 일이라니... 마스터는 어지간히 재미없는 사람이네요.]

기체를 조종할 때는 무작위 명령어에 반응을 해 대답을 하더니 기체에서 분리가 되고 나서는 감정을 표현하기라도 하는  말이 많아진  같았다.


잠깐 제자리에 멈춰 서선 조그만 원반의 끝에서 레이저 포인터 같은 빛이 내려쬐었다. 조종석 앞의 움푹 패인 부분을 한번 훑곤
그 다음으로 내 몸을 머리부터 발 까지 한번 슥 훑었다.


[기체의 상태는 정상. 스태빌라이저가 조금 과열된 흔적이 있지만 지금은 멀쩡해요. 동력원도 순조롭게 공급중이구요.]


스태빌라이저의 과열이라면 아까 대기권 돌입의 충격으로 인한거겠지

"동력원? 이 기체는 뭐로 움직이는건데?"

[달에서 내려받는 빛이에요. 이  시간대를 기준으로 두 시간 정도만 받아도 72시간 정도 기동할 수 있을거에요.]


달에서 내려받는 빛으로 활동이 가능하다니...


이 게임 대다수의 기체들은 코어에서 오는 에너지를 기본으로 사용하며 소형 코어를 통해 가공한 배터리팩으로 추가 전력을 공급받는게 기본인데 외부 전력 공급이 필요없는 기체라니 사기성이 너무 짙었다.


사실상 무한동력이 아닌가..

[그리고 마스터의 상태도 정상... 인데 조금 체온이 높네요. 슈트의 체온 조절 기능을 쓰시길 추천 드릴게요.]

"체온 조절기능? 어떻게 쓰는 거야?"

아직 2월의 밤이라 그런가 추위를 느낄만도 한데 왠지 파일럿복이 조금 답답하게 느껴졌다.


2월의 늦은 밤인데도 조금 덥다고 느낄 줄이야.

[슈트의 손목 부분의 뱅글을 문질러 올려보세요.]

뱅글이라면 이걸 말하는 건가? 손목 뼈가 자리 잡은 위에있는 둥근 돌 같은 것을 서서히 문지르자 몸이 서늘해져 가는걸 느꼈다.




"진짜다. 신기하네"


[어때요 도움이 되셨나요? 도움이 되셨다면 칭찬해주세요.]

도움이 되었다면 칭찬해달라는 인공지능이라니 귀엽긴 했다.

"이렇게? 잘했다. 잘했다. 잘했다. 잘했다."

[자..잠깐 손이 너무 빠르잖아요..]

고작해야 지금의  손바닥만  원반이어서 손바닥으로 슥슥 빠르게 문질러주자 조금 빠르다는 불평을 들었다.

"미안 다음부터는 살살해줄게"

[그래줬으면 좋겠네요. 이런 바디라도 어지러움은 느낀 다구요!]

촉각과 방향감각까지 느낄  있는 것 같네. 기체도 그렇지만 이 네비게이터도 상당한 오버테크놀로지의 집합 같았다.


"이렇게 말을 귀엽게   수 있는데 아까는  그렇게 딱딱하게 반응한 거야?"

[귀엽다니.. 말뿐이라도 고마워요. 하지만 없는 코어를 대신 하려면  상당수 기능을 정지해야 하는걸요. 커뮤니케이션 기능도 최소화 되었을거에요.]




귀엽다는 말에 기뻐하며 살짝 제자리를 빙글 도는 원반.

그리고 이 원반이 아마도 코어의 기능을 대신 해주고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면 이제 가장 중요한걸 물어보고 싶어..."


[네 말씀하세요. 무엇이든 답변해드릴게요.]


"나는 누구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