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화 〉열다섯
열다섯 이라니
고등학생도 아닌 중학생 정도의 나이가 아닌가
아까는 저수지에서 도망치느라 얼굴만 확인한 탓에 신체 나이가 어느 정도인지 감도 못잡고 있었다.
애초에 조종석은 지금의 내 사이즈에 맞춘 것인지 딱 맞는 사이즈기도 했고
당장 차원수도 해결했으니 내려서 한번 몸을 확인해보긴 해야겠다.
-끼이익
격납고 문을 열고 기체를 멈춘 뒤 원반과 같이 기체의 목 뒤를 통해 내렸다.
조종석 밖이면 움직이지 못할 줄 알았는데 잘 떠있네 드론이라기엔 프로펠러도 안달려있는데 어떻게 나는 건가 싶어
내 눈높이에 맞추어 떠있는 원반을 살짝 고개를 숙여 아래에서 내려다보았다.
그냥 앞뒤가 똑같이 생긴 전병 같은 원반이네
[안된 다구요! 여자아이의 아래를 쳐다보는 건!]
내가 아래에서 쳐다본다는 것을 확인하자 원반이 화가 난 듯한 목소리로 말하며 제자리에서 바르르 떨듯 움직였다.
"미안..."
여자였구나. 조종석에서부터 여자 목소리로 들리긴 했는데 내 뇌내망상인줄 알았지
사과의 뜻으로 손가락으로 원반 위를 쓰다듬자 떨림이 조금 멈추긴 했다.
[같은 여자라서 넘어가주는 거에요.]
같은 여자... 맞다
자꾸 몸을 확인한다는 게 다른 곳으로 정신이 새버렸다.
"그 있지.. 거울 같은거 없니?"
이런 하이퍼 테크놀로지 머신이면 적어도 카메라 정도는 달려있지 않을까
[거울이요? 음.. 제 면적이 작아서 이걸로 보시기는 힘들 테니깐, 사도의 눈으로 비춰서 보여드릴게요]
격납해두었던 기체가 조금 움직여 고개를 이쪽으로 돌렸다.
아까 머리 빔 때문에 좀 섬뜩하네
다행히 이쪽으로 빔이 쏘아지는 일은 없었고 고개만 움직였는데
내 앞에 지금 나의 키 정도 되는 유리막 같은 게 생겼다.
[불가시 모드의 반사를 이용하면 이런 것도 할 수 있다구요]
투명해지는 것 외에도 주변을 반사시키는 기능이 있었던 것 같다.
유리막이 점차 진한 은빛으로 물들더니 거울처럼 나의 모습을 비춰주었다.
아까 저수지에서 본 것처럼 조명에 반짝이는 맑은 은발
야근으로 조금씩 허옇게 변하고 있었던 내 머리와는 다른 예쁜 색
이쪽을 신기한 듯 쳐다보는 빨간 두 눈동자
역시 충혈 되어 침침해 보이는 눈이 아닌 십대 소녀다운 맑은 눈이었다
얼굴도 수염자국 하나 없는 깨끗한 피부
목 아래를 내려다보자 아직 어린 소녀인 탓인지 가슴은 그렇게 크진 않았다.
여기에 있긴 있어요. 라고 주장을 하는 티가 나는 가슴이 파일럿 슈트 위로 봉긋 오른 정도였다.
허리도 가늘다.
단순히 가는 몸이 아니라 어엿한 2차성 징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듯
일자형 몸매가 아닌 미약하지만 볼륨이 있는 몸이었다.
지금 보니깐 전부 일자형 슈트였구나 우주에서 출발한걸 생각하면 기밀성이 높은 게 좋겠지
목부터 발까지, 손끝에도 전부 덮여있는 슈트였다.
그래서 몸이 이렇게 전부 드러나는 디자인이었구나
정말로 아저씨에서 미소녀로 전직했구나 이야 착하게 산 보람이 있었어
제자리에서 한 바퀴 빙글 돌아보기도 하면서 몸을 천천히 감상했다.
정말 내 취향의 미소녀는 맞네. 개발자군 에게 또 감사를 표한다
---
십분 정도 거울 앞에 미소녀가 되면 취해보고 싶었던 포즈들을 여러 개 취해보면서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이제 놀이시간은 끝났으니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좀 해봐야겠지
거울을 지나쳐 기체 주변을 원반과 같이 걸으면서 생각을 해봤다.
아까 확인한 날짜로는 2월 5일. 첫 에피소드가 시작하는 3월 3일까지는 아직 26일정도 남았다.
오늘 하루는 끝나가니 25일이 준비 할 수 있는 시간이겠지
25일 뒤면 적대 세력이 방송 전파를 탈취해 자신들의 성명을 발표하고 도심 점거를 위한 테러를 저지른다.
그 날 주인공은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이 도시로 올라오던 중 기차역에서 적대 집단과 마주치게 되고
그 자리에서 간신히 도망친 뒤 수송열차 화물칸에 실려 있던 시험기를 기동시켜 멋지게 사건을 해결한다.
그 후 본부에 시험기와 함께 이송된 주인공은 자기 아버지가 시험기의 개발 부장임을 알게 되고
첫 기동에 사용자 등록이 돼 버린 탓에 시험기의 주인을 바꿀 수도 없게되서 테스트 파일럿으로 활동하게 되고
본부와 파일럿 양성을 위한 특수 목적 학교를 다니며 히로인들과 교류하며 악의 집단을 물리친다는 심플한 스토리다.
하지만 초반에는 주인공의 미숙함으로 인해 여러 사건을 저지르게 되고 그 과정 속에서 희생도 겪으며 성장해가는데
그 희생이 본부의 절반에 가까운 손해라는 게 문제지...
도시도 주요 시설들이 파괴되고 주인공 세력은 비난을 받으며 히로인들과 큰 갈등도 겪는다.
개발자군은 시련 없이는 보상도 없다를 주장했던 탓에
몇몇 히로인은 그대로 이탈해서 적대 세력에 붙거나 사망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때까지 누구와 친하게 지냈고 얼마나 자주 출격했느냐에 따라 누가 이탈하는지 갈리지만 어떤 선택지를 골라도 모두를 구할 수는 없었다.
전부 매력 있고 사랑스러운 아이들인데 고작 주인공의 실수로 희생되는 건 가슴아팠다.
하지만 지금의 나라면 모두를 구해줄 수 있지 않을까?
그렇게 한다면 원래의 시나리오에서 벗어나겠지만
이제는 내가 살아가야 할 세상인데 부서지는 것은 사절이다
물론 적대 세력이라도 몇몇은 내가 만든 캐릭터들이니 가급적이면 구해볼 수 있게 노력은 해봐야겠다.
실제로 몇 명은 공략이 가능한 히로인이기도 하니깐.
이제 활동방침은 정해졌다.
원작의 배드엔딩 루트를 막으면서 모든 히로인들을 구원한다.
주인공은... 뭐 남자애지만 그래도 개발자군 이 만들고 내가 같이 기른 아이니깐 부모로서 적어도 이상한 실수는 안하게 도와줘야겠지.
내일부터 도시에 내려가서 시나리오 시작 전까지 정찰이라도 시작해야겠다.
원 시나리오에 없던 나의 존재와 이 토끼가 추가된 것부터 달라졌는데
내가 알던 시나리오와 다른 점이 있을지도 모르니깐.
---
활동방침을 혼자 생각하며 정하고 나서 멈춰 서서 주변을 둘러보니
계속 기체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던 탓에 격납고 바닥에 쌓인 먼지가 내 파일럿 슈트의 발자국 모양대로 눌려있었다.
그리고 원반이 머리 주변을 빙글빙글 순회하듯 돌다가 내가 멈추자 따라 멈추었다.
[생각은 다 하셨나요?]
"응. 내가 이 별에 내려온 목적도 알 것 같아"
우와 저절로 뻔뻔한 말을 했다. 아까까지 임무가 뭐냐고 물었던 주제에
그래도 이제는 미소녀니깐 그럴싸한 말을 하면 주변에서 적당히 받아주겠지
[다행이네요. 우주에서부터 너무 당황만 하시길래 정말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시는 건가 하고 걱정했거든요]
"아니야 조금 갑작스럽게 내려와서 당황했을 뿐. 걱정해줘서 고마워. 아.."
생긴 게 원반이라 계속 원반이라고 마음속으로 생각했는데 그래도 원반이라 부르면 상처받겠지
[제 이름 때문에 고민이신거에요? 저는 □□□.. 언어모듈에 문제가 있나보네요.]
이름을 듣자 노이즈가 껴서 알아들을 수 없었다. 기체 정보도 그렇고 지금 시점에선 알 수 없는 게 있는걸까
[음.. 이 별의 방식으로 부르면 엘-13이 되겠네요]
13이라는 숫자. 아까 확인한 기체의 형식번호에도 13이 붙어있었다.
아마 이런 게 열두 개는 더 있던 걸까 아니면 개발과정상의 버전 번호 같은 걸까
"그러면 엘이라고 불러도 될까?"
[네 좋네요. 형식번호가 아닌 제 독립성도 보장되는 것 같구요]
이름이 붙자 기쁜 것인지 주변을 도는 엘을 손가락으로 다시 쓰다듬어주었다.
[벌써 6일 01시에요 마스터가 깨있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 아닌가요?]
"아 정말이네.. 슬슬 잘까."
잠을 자기엔 이 격납고는 너무 더럽고 먼지투성이에..
솔직히 잠자기엔 많이 무섭다. 나이가 들어도 어두운 곳은 좀 무서웠는데
엘의 조명과 기체에서 은은하게 빛나는 빛 덕분에 서성거린 거지 빛이 닿지 않는 곳은 섬뜩하게 느껴졌다.
다시 기체로 다가가자 엘이 조작한 것인지 올라타기 좋게 어깨를 내린 채 웅크린 기체의 조종석에 들어가자 저절로 문이 닫혔다.
회사 다닐 때는 사무용 의자에서 꿀잠도 잤으니깐
이런 조종석이라도 편하게 잘 수 있겠지 라고 생각했는데
이런 조밀한 기체 어디에 여유 공간이 었던건지 시트가 뒤로 젖혀져서 기대어 눕기 좋았다.
아니 몸이 작아지니깐 그 위에 웅크리고 잘 수도 있네
"그러면 눈좀 붙일게.. 혹시 무슨 일 있으면 바로 깨워줘... 아 너는 안자니?"
어린 몸이라 잘 준비를 마치니 금방 피로가 몰려왔다
[저는 잘 필요는 없어요. 경계모드를 활성화 해둘게요]
"응 고마워..."
잠결에 발음이 뭉개지며 그대로 잠에 들었다.